타타르와 오이라트
그 당시의 오이라트에는 3명의 대 수령이 있었으나 그중 한명, 초로스부의 마흐무드는 가장 유력하여 명나라에도 대항하고 타타르를 정복한 일도 있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토곤이 즉위하자 초로스부는 더욱 강력하게 되어 마침내 오이라트 여러 부를 통일하였다. 1433년에는 타타르의 칸에 대항하기 위하여 몽골칸의 피를 이어받은 톡토아부카를 칸으로 추대하였으나 실권은 토곤이 쥐고 남 몽골고원도 정복하여 전 몽골의 지배자가 되었다. 1439년 토곤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에센-타이시는 동쪽은 흥안령 동쪽의 명나라 우량칸 3위의 땅도 흡수하고 여진 여러 부족도 복속시켰으며 조선에도 통상을 강요하였다. 서쪽으로는 차카타이가의 모굴리스탄 칸가를 제압하였으며, 주치가의 아불카이르칸을 격파했다. 이리하여 오이라트 제국은 그 크기가 칭기스칸의 몽골통일 때와 비슷해졌다.
명나라가 국경교역에 제한을 가하려 하자 에센은 1449년에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유목민병사는 전원이 말을 타고, 여러 마리의 대체 말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이동이 매우 빠르다. 게다가 출진하는 경우, 병사는 각자 허리의 가죽부대에 치즈와 육포를 넣고 나가기 때문에, 수송대가 따로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농경민의 군대가 유목지대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에는, 현지에서 식량을 징발할 수 없기 때문에,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식량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유목민은 불리하다 여겨지면 전속력으로 전선을 이탈해 버리므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황제의 소재를 알아낸 에센의 2만 기병부대는 전속력으로 추격해 와 선부의 동쪽인 토목보에 당도한 명나라군을 포위하여 6일 동안 총공격을 하여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멸당했다. 왕진을 비롯하여 종군했던 대관, 대장들은 모두 죽었으며 정통제는 포로로 잡혔다. 이어 그는 북경을 포위하였으나 말먹이가 떨어지고 중국의 구원군이 요동에서 접근하였으므로 서둘러 물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명나라의 북방정책은 수세로 바뀌어 한결같이 장성의 수축강화에 노력하여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이후 에센은 1453년 오이라트인을 어머니로 한 자만을 살려두고 톡토아부카칸 등 북원의 황족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칸위에 올라 대원천성 대칸이라 불렀다. 그러나 다음해인 1454년 부하인 아락지원이라는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에센칸을 습격했다. 에센칸은 도망치다 살해되어 오이라트 제국은 무너졌다. 이로서 토곤, 에센 2대에 걸쳐 크게 팽창한 오이라트는 내란으로 동몽골에서 쇠퇴하였지만 서방에서는 여전히 일리강과 카스피해 사이의 초원지역을 위협하였다.
다얀칸
토곤, 에센-타이시의 시대에 오이라트의 지배하에 있던 타타르 여러 부는 에센의 사후 서로 싸우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475년 서방의 차카타이가의 후신인 모굴리스탄으로부터 온 벡알스란은 타이슨칸의 이모제 만도룬을 칸위에 세우고 자신은 태사로 되었다. 볼후 지농 진왕칸의 사후 쿠빌라이가의 마지막 자손인 5살의 바트몽케는 만도룬의 젊은 과부 만두카이-카툰이 키워 1481년 그와 결혼하여 섭정을 하다가 1487년 다얀(대원)칸에 오르게 하였다.
그는 먼저 타타르의 통일을 꾀하여 오이라트의 위협을 완전히 떨쳐내고 16세기의 10년대에는 내몽골고원에 주권을 확립하여 칭기스칸가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구분으로 동몽골의 부족들을 6투멘으로 편성하고 동부의 좌익(준가르)과 서부의 우익(바룬가르)으로 나누어 좌익은 다얀칸이 직접 통치하였고, 우익은 칸의 아들 중 지농의 칭호를 받은 자의 휘하에 두었다. 좌익은 차하르, 칼카, 우량칸의 3투멘이었고 우익은 오르도스, 투메트, 카라친의 3투멘이었다.
1524년에 다얀칸이 죽자 곧 내분이 일어났다. 특히 좌우 양익 사이의 대립은 여러 형태로 문제가 되었다. 오르도스는 다얀칸의 셋째아들 발스보라트가 담당하였는데 1531년에 그가 죽자 우익 내에서도 세력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투메트를 이끄는 발스보라트의 둘째아들 알탄이 당시 그의 조카인 지농을 대신하여 실력을 키워 좌익도 압도할 정도로 자라났다. 명목상 타타르의 칸위는 차하르에 양도하였으나 실제의 주도권은 그가 쥐게 되었다.
알탄칸
알탄은 명나라와의 교역을 바랐으나 명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매년 국경지대를 침입하였다. 그 중에서도 1542년의 침략으로 명장 장세충을 죽이고 산서성을 중심으로 한 18주현에서 20만 명을 잡아갔으며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여 명나라를 위협함으로서 칭기스칸의 전통을 일깨웠다. 알탄 등은 잡아간 한족들을 농경에 종사하도록 하여 몽골고원에도 이때부터 곡물이 나게 되었다.
1552년 알탄군은 오이라트에 대승하여 몽골제국 종주권의 상징인 카라코룸을 탈환하고 오이라트의 본거지 준가리아까지 급습하였다. 또 1566년에는 청해지방을 정복하고, 1572년에는 티베트까지 원정하였다. 알탄의 세력에 눌린 좌익의 차하르부는 흥안령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칼카부는 오이라트 세력이 물러난 북몽골고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차지하였다. 청해지방에 몽골인이 이주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582년 75세로 알탄칸이 사망한 후 강력한 통일 권력은 없어졌지만 이때의 몽골인 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얀이 칭기스칸이 아니었던 것처럼 알탄도 쿠빌라이가 아니었다. 알탄칸은 손자가 명에 망명한 사건을 계기로, 1571년 명나라와 강화하여, 오랫동안 지속된 양자간의 항쟁은 끝났다. 명나라는 알탄에게 순의왕의 칭호를 주고, 매년 국경에 정기교역시장을 열어, 몽골측은 가축과 피혁제품, 유제품을, 명나라는 직물과 일용잡화를 바꾸고 몽골 영주들에게 명나라가 수당을 지급하게 되었다. 호흐호트에는 중국으로부터의 물자가 모이고, 그 후 몽골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 교역의 중심으로 되어 번영했지만, 알탄칸 자신은 성내에 머물지 않고, 부근 초원의 오르도에서 지냈다. 명은 1575년에 이 도시를 귀화성 이라고 이름하였다.
타타르의 발전과 때를 같이하는 15세기말 서방 초원에서 우즈벡의 아불카일칸이 정권을 잡자 그를 떠나 동쪽의 차가타이칸과 손을 잡고 추강 방면을 차지한 우즈벡인들이 있었다. 또 아불카일칸이 죽자 또 많은 우즈벡인들이 이들과 합류하였는데 이들을 카자흐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우즈벡을 차가타이칸과 함께 공격하여 무너뜨렸으며 16세기초 카심칸을 중심으로 동부카자흐스탄에서 이르티쉬강 상류까지 세력을 펼쳐 초원의 새로운 세력이 되었다. 이후 카자흐는 발전하여 카자흐스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이라트를 대신한 타타르, 우즈벡을 대신한 카자흐는 그후 세력이 분산되어 청나라나 러시아로 흡수되었지만 민족국가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라마불교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8세기 토번왕국 시대였다. 토번시대에는 계율이 엄한 불교만을 정통으로 여겼지만, 9세기에 토번왕국이 분열된 후, 민간에서는 탄트라 불교가 확대되었다. 그후 10세기에 이르자, 티베트 각지에 교단이 생겼다. 이때 유행한 티베트 불교는, 계율의 전통을 갖고 학습을 주로 하여 탄트라 불교에 제한을 둔 것이었다.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는 몽골제국 2대칸 오고데이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1239년 오고데이의 차남 고딘은 티베트를 공격할 때 가무 지방에서 중앙티베트로 들어가 명찰인 게루라간을 불태우는 등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때 명승으로 평판이 높았던 사가파의 궁가-겡첸은 몽골과 교섭하기 위해 티베트의 대표로 감숙의 양주로 향했는데, 이에 동행한 그의 조카인 팍파는 쿠빌라이에 초대되어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마교는 원나라에 전래되어 라마승이 중용된 것은 사실이나 그때는 아직 초원의 일반 유목민까지 보급되지는 않았다.
시대는 흘러 타타르의 알탄칸이 청해에서 티베트방면으로 진출할 때인 1578년 알탄칸은 당시 신흥의 겔구파(황교)의 고승으로서 평판이 있던 쉐남갸초를 청해의 차부찰까지 불러 그와 이야기하는 중에 감명을 받아 열렬한 신자로 되었다. 그는 그에게 다라이라마의 칭호를 주어 쉐남-갸초는 다라이라마 3세로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황교는 다얀과 알탄이 이룩한 칭기스칸가의 부흥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였고 그 대신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불교인 황교에 헌신하게 됨으로서 몽골의 유목정신은 라마승들의 기도 속에 길들여져 갔다.
다음해 알탄은 귀화성에 라마사원을 건조했으며 여러 부에서도 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알탄의 사후에도 후계자들의 라마교신봉은 변하지 않고 점점 널리 퍼졌다. 85년 알탄칸의 아들 셍게는 제3대 다라이라마를 이번에는 귀화성으로 불렀다. 몽골의 여러 왕후들도 귀의하는 자가 많아졌으며 그 중에는 북몽골고원, 칼카부의 아부다이칸도 있어 그로부터 칼카에도 황교 라마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다라이라마 3세는 내몽골 각지의 영주들에게 초청되어 포교를 하다가 1588년 몽골에서 죽었다. 겔구파의 일부 급진파세력은 라싸의 반대를 물리치고, 알탄칸의 손인 스멜-타이지의 아들을 달라이라마 3세의 전생자로 인정하였다. 이가 달라이라마 4세 윤딩-갸초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는 더욱더 밀접하게 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 오이라트에도 퍼져 제5대 다라이라마는 오이라트의 호쇽트부 구시칸을 최대의 지지자로 확보하였다. 이 제5대가 칼카의 아부다이칸의 증손을 활불로서 젭츈담바의 칭호를 주어 이 젭츈담바-후토쿠토(활불) 1세가 칼카와 오이라트의 양쪽에서 성속을 겸한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640년 칼카와 오이라트의 합동대회의가 북 몽골고원에서 열렸다. 이때 양측의 여러 부족간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소위 동맹조약을 맺어 이들 규정은 몽골(칼카)-오이라트법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라마교, 라마교 승려의 존재가 주요문제로 다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승려 라마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아이막(령민, 일족)을 살해하고 약탈하면 벌로서 백개의 종, 백마리의 낙타, 천마리의 말을 바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슬람의 동진
투르크계의 유목민중에 이슬람교가 전입되어 보급된 것은 칼라한왕조시대의 일이었다. 서투르키스탄은 물론 동투르키스탄의 서부 카슈가르 지방도 11세기에는 완전히 이슬람화하였다. 차가타이칸국의 몽골인들도 14세기 전반에는 서투르키스탄의 투르크계, 이란계 오아시스 주민들과 접촉함과 함께 이슬람교도로 된 사람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굴리스탄의 유목민들에게도 미쳐 16만명의 모굴인이 집단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등 14세기 후반에는 모두 이슬람화 하였다.
15세기초 모굴리스탄칸, 와이스는 동쪽의 명나라 땅으로 많은 불교도를 추방해 버렸다. 15세기 후반 투르판칸인 만스루는 명나라의 서역경영의 거점이었던 하미를 자주 침입하였다. 명나라도 16세기 전반에는 하미 주둔군을 철수하여 동투르키스탄, 타림분지 일대에도 이슬람교가 퍼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투르키스탄은 이슬람세계의 변경이었다. 여기에 16세기말 호자라는 이슬람의 종교귀족 이스하크와리가 카슈가르에 왔다. 그는 부하라 지방에서 발전해 온 이슬람 신비주의(수피)파의 하나인 낙슈반디 교단의 지도자로서 카슈가르, 야르칸드에서 열심히 포교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야르칸드에 남아있던 그의 아들과 손자가 호자가를 이어 왔다. 그런데 17세기 중순에 무하마드-유스프라는 호자가 그의 아들과 함께 카슈가르에 왔으므로 앞서의 호자가를 야르칸드의 흑산당, 새로온 자는 카슈가르의 백산당으로 서로 대립하였다.
이들 호자가는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 사회에서 각지의 칸들을 능가하는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신망도 얻고 칸가에서도 중요시되어 사령지 기타의 막대한 기부를 받았으므로 칸권이 약화하고 정치적 불안정이 생기자 그들의 종교적 권위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쪽의 청나라 서쪽의 러시아제국의 진출을 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