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이전의 대원-울루스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절반정도가 그대로 명나라에 남았다. 무슬림이나 위구르인들도 그대로 남아 중국식 성씨를 가지고 살았으므로 명나라는 옛날의 당, 송 시대의 중국이 아니라 몽골 화한 다 인종 혼합사회가 되었다. 명나라의 정예부대는 중국본토에 남은 몽골부대였으며 영락제시대의 무슬림 대관 정화에 의한 7번의 인도양 원정은 몽골시대의 해상교류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정화함대의 남해원정은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잃어버린 정크 교역권에 명 나라의 힘을 과시하여 조공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였다.
정화의 원정 반세기 뒤인 1492년 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에 참가한 인원이 함선 3척에 승무원 120명이며, 기함 산타-마리아 호도 200-250톤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스페인 왕국에게는 큰 비용을 들였다. 또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바스코-다-가마의 함대는 함선 4척에 승무원 170명이며, 기함 산가브리엘 호는 120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젤란의 항해에 참가한 함선과 인원은 함선 5척과 승무원 265명에 불과하여 정화의 함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였다.
명나라의 제도도 모두 몽골 식이었다. 몽골제국의 유목민과 정착민의 2중 조직을 그대로 따 전국민을 세습 직업군인을 내는 군호와 일반인의 민호로 나누었다. 군호의 도시 위(군단)의 밑에는 5개의 천호소(천인대), 천호소의 밑에는 10개의 백호소(백인대)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몽골제국의 만인대(투멘), 천인대(밍간), 백인대(자운), 10인대(알반)이란 10진법의 조직과 같은 것이다. 민호도 10진법으로 편성되어 백호소에 해당하는 것을 리라고 부르고 그밑에 10개의 갑을 두었다. 또 명나라의 황족은 군대를 거느리고 중국 각지의 왕으로 되었는데 이것도 몽골제국의 유산이었다.
이보다도 더욱 큰 유산은 먹거리였다. 여러가지의 고기요리, 향신료를 사용한 조미료나 증류주를 먹는 습관 등은 몽골 인이 중국에 가지고 온 것이다. 면(국수류)도 이때에 중국에 보급되었다. 또 하나 12세기 남송의 중국인 주희는 유교의 고전을 새로이 해석하여 주자학을 만들어 냈는데 남송에서는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으나 몽골제국은 이것을 공인하고 과거시험에 주희의 저작을 출제범위로 하였다. 명나라는 이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 주자학이 중국의 관료들 사이에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
그러나 명나라는 시원찮은 계승국가였다. 은본위제로 염인, 지폐 등을 사용하여 대규모로 전개한 몽골시대의 통화체계는 지금도 서양의 자본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명나라는 이것을 포기하고 물물교환의 자연경제로 되돌아갔다. 또 육지와 바다를 이은 통상도 명나라의 억압으로 쇠퇴하였다. 몽골제국시대에 이미 5백톤 급의 배까지도 건조하였던 대형선의 건조를 모두 금지시켜, 해양에 관한 지식, 기술, 전통, 시야는 물론이고 의욕까지도 꺾어 버렸다. 대신 명나라는 농본주의 이갑제로 국민을 토지에 묶어두고 철저히 관리하였다.
이후 서유럽에서는 몽골제국시대에 동방에서 배우거나 섭취한 해양술과 화기를 1세기만에 일시에 발전시켜 동양과 서양의 힘이 뒤바뀜과 함께 서유럽에 의한 세계침략이라는 역사의 대역전을 만들어냈다. 바다의 시대에 선박과 화포개발에서 크게 뒤떨어진 동양은 이를 대표하는 서유럽 제국의 세계지배를 가져왔다.
이반4세
황금오르도는 1395년 티무르의 원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모스크바는 17의 티마(투멘-만인대)를 가진 대공국으로 되었다. 모스크바는 주변의 하천 망을 따라 계속 영토를 확장하였다. 1478년 노브고로드 공국을, 1485년 칼리닌 공국, 1489년 뱌트카, 1521년 리아잔을 각각 정복하였다. 1533년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북서쪽의 발트해까지, 북쪽의 북극해 연안, 동쪽의 우랄 접경지대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16세기경에는 과거 몽골이 침입할 때 서쪽으로 이주해 간 슬라브족들이 드네프르 중상류 지역에 다시 정착하기 시작하여,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 16세기 후반 무렵에는 비록 서쪽 지역 영토를 상실하였지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각각 카스피해와 시베리아 접경지대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확장이 계속 이루어졌다. 이때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되자 모스크바는 비잔티움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밟았다. 모스크바는 이후 동부 슬라브권의 새로운 핵심지역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콜라철학, 르네상스, 종교개혁운동, 계몽주의 등 여러 가지 신학적, 철학적, 지적 조류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러시아의 경우 1917년 볼셰비키혁명 전까지 그리이스 정교와 귀족제도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 1386년 리투아니아의 야가이라 대공은 폴란드의 여왕과 결혼하여 폴란드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폴란드의 땅은 동과 남으로 커져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445년 주치가의 왕자 하찌-기라이는 리투아니아-폴란드의 도움으로 크리미아의 칸이 되었다. 하찌-기라이칸의 아들인 멩구리-기라이칸은 1502년 황금오르도의 칸 자리를 빼앗아 황금오르도를 크리미아와 합쳤다. 크리미아와 합친 황금오르도는 다시 강대해졌다.
1502년 황금오르도의 칸위를 크리미아에 빼앗긴 대오르도 일족은 모스크바의 동남 나마강가의 카시모프에 영지를 받아 모스크바 대공 이반3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반3세는 열심히 영토를 합병하여 러시아의 통일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반3세의 손인 이반4세는 1552년 볼가강 중류에 있는 카잔의 칸가에 내분이 일어나 모스크바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그는 몽골인 어머니와 함께 카잔에 입성하여 그대로 눌러앉았다. 1556년에는 볼가강 하류의 아스트라칸을 점령하였다. 이때 아스트라칸의 칸가는 부하라로 이동하여 시반가를 대신하여 1598년 우즈벡스탄의 영주로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이반4세는 전 러시아 대공의 칭호에 더하여 카잔 및 아스트라칸의 칸(짜리)으로 불리게 되어 몽골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하였다. 한편, 크리미아로 옮긴 강한 황금오르도는 1571년 모스크바를 공략해서 공세를 부과했으며 이는 17세기말의 피터 대제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바투이래의 황금오르도는 1783년 에카테리나 2세가 크리미아를 멸망시킴으로서 끝나게 되었다. 13세기 바투의 침입으로부터 18세기까지의 거의 5백년간 황금오르도의 지배하에 몽골문명을 흡수한 사람들이 오늘의 러시아인이다.
1575년 8월 이반 4세는 시메온-벡브라토비치라는 몽골 황족을 짜르에 앉히고 다음 해 그로부터 양위를 받아 짜르로 되었으며 시메온은 투베리 대공이 되었다. 시메온-벡브라토비치는 몽골어로 사인-부라트로 카시모프 칸이었다. 이런 과정으로 모스크바 대공은 황금오르도의 계승자 중 한 사람으로 되었다. 이반 4세의 사후 얼마 안되어 류릭가의 혈통이 끊어져 몽골인 귀족 보리스-고두노프가 짜리로 되었다. 짜르 보리스-고두노프가 사망한 후 1613년에 미하일-로마노프가 짜르가 되어 로마노프왕조를 세웠다. 이 로마노프왕조에도 계속 몽골계 귀족이 많았다. 미하일-로마노프의 손자 피터1세는 크리미아의 황금오르도로부터 독립하여 1721년 임페라토르(황제)란 칭호를 썼으며 러시아 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시베리아 개척
러시아는 이반4세때 시베리아로 진출하였다. 그 선발대가 된 것은 킵착칸국의 주치가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유목집단 코사크(카자흐)인들이었다. 그들은 아타만(수령)이 이끄는 자립적인 군사동맹체 100인대(소트냐)를 만들어 사람과 말리 함께하는 생활을 하였다. 러시아사에서는 돈강과 야이크(우랄)강의 코사크가 유명하였다. 이반4세 때 코사크의 아타만인 예르마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볼가강을 지나는 배를 습격하여 강도 짓을 해오다 러시아 군대에 쫓겨 6천명의 동지와 함께 우랄산 속의 카마강으로 도망가 스트로가노프가에 몸을 의탁하였다. 마침 러시아 황제로부터 시베리아 개척을 부탁받은 스트로가노프가는 그의 시베리아 원정을 권하였다.
당시 그 동쪽의 토보르강에는 우즈벡스탄 시반가의 일족인 쿠춤칸이 이스켈을 중심으로 살면서 시비르 칸이라 하였다. 예르마크는 1581년 이들을 정복하였으나 쿠춤칸의 반격을 받아 1584년에 이르티쉬 강변에서 죽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이후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러시아는 1586년에 톨라 강변에 추메니란 도시를 세우고, 1587년에는 트볼하구에 트보리스크 요새를 세워 행정의 중심으로 삼았다. 1594년에는 이르티쉬강변에 타라의 요새를 세우고, 1604년에는 오브강 상류에 톰스크시를 세웠다. 시베리아에 세워진 러시아의 도시는 모두 요새에서 시작되었다.
1598년 쿠춤칸은 코사크와 타타르의 혼성군에 패하여 쿠츔의 5아들, 8명의 처, 8명의 딸, 2명의 며느리, 2명의 손자, 2명의 손녀가 포로로 되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쿠춤은 노가이로 도망했으나 살해되었다. 당시의 짜르, 보리스-고두노프는, 포로로 잡혀온 쿠춤의 아들들을 황자로 존칭하며 우대하였다. 코사크들은 시베리아의 삼림지대를 수로를 따라 나가 17세기초부터 몽골고원 북변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여 1620년대에는 부리야트-몽골의 정복을 시작으로 1650년대에는 서 바이칼 지방의 지배, 1658년 네르친스크 요새의 건설, 이윽고 동 바이칼 지방을 정복하였다. 마침내 1649년에는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에 도달하였다.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젭춘담바-후톡토의 거주지로서 발전한 툴라강변의 쿠롱(울란바토르)에는 많은 러시아인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양국인간의 분쟁도 많아졌다. 그 때문에 새로이 경계를 세우고 통상관계를 규제하는 캬흐타 조약이 1727년 맺어졌다. 러시아의 동방진출은 코사크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옛 몽골제국의 영토회복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