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다극화 시대 - 마지막 제국 준가리아

시골농군 2009. 5. 19. 17:45


청나라 홍타이지

1598년 누르하치라는 여진 건주좌위의 수령이 건주의 3위를 통합하고 7개의 여진 아이만(부족)들을 합쳐 1616년에는 칸을 칭하였다. 여진족은 원래 수렵과 목축, 농경을 하는 사람들로 초피(담비 가죽)등의 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이들의 본거지는 숭가리강의 지류인 후르카 강의 원류 오돌리에 있었다. 1621년 그는 심양을 차지하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흥안령 동부와 숭가리강 서쪽에서 유목하던 칭기스칸의 동생 조치-카사르가의 호르친부 몽골인과 혼인을 맺어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호르친부 등 몽골의 여러 부가 각종 왕호, 작위를 받아 청나라는 만주귀족과 몽골귀족의 연합정권이 되었다.

1626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8째 아들 홍타이지는 내몽골의 여러부를 차례로 공격하여 링단칸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링단칸은 귀화성(후흐호트)에 들어가 세력을 재건하였으나 1634년 티베트 원정 중 청해에서 병사하였다. 이때를 이용하여 홍타이지는 후흐호트를 점령하고 링단칸의 어린 아들 에제이와 그의 어머니 수타이 태후를 심양으로 끌고왔다.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원나라 역대황제가 사용했던 옥새 제결지보를 바쳤다. 홍타이지는 칭기스칸의 천명이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하여, 여진이라는 종족 명을 만주로 바꾸고 1636년 심양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만주인,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인, 요하 델타의 중국인 대표로부터 3종족 공통의 황제로 뽑혔으며 국호를 대청으로 하였다.

에제이는 홍타이지의 차녀와 결혼해서 사위가 되었으며 홍타이지의 5명의 황후는 모두 몽골인으로, 그중 3명은 호르친 부족 출신이고, 나머지 2명은 차하르 부족 링단칸의 미망인이었다. 내몽골의 16부는 그가 몽골대칸의 대를 이어받은 것으로 인정하여 복드-세첸칸으로 받들었다. 청나라는 이때부터 남쪽을 향해서는 중화황제, 내륙세계에 대해서는 몽골대칸이라는 두개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커다란 청나라는 이 두개의 얼굴을 나누어 사용함으로써 이룩되었다.

1644년 4월 하남과 산서를 지배하던 이자성이 북경에 난입하였다. 이에 산해관에서 청군과 싸우던 오삼계는 청군과 합세하여 북경을 다시 찾았으나 청군은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청나라는 오삼계에게 처음에는 섬서 땅을 그리고 뒤에는 사천과 운남 땅을 주었다. 이후 청나라는 중국 남부에서 명나라의 왕족들을 쫓아내고 외몽골, 티베트, 신강을 정복하여 대원-울루스를 넘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은 청나라의 한개 식민지였으며 중국인은 2급 시민이었다. 청나라가 1912년 무너진 후에 성립한 중화민국은 청나라의 모든 통치권을 주장하였으나 한족 이외의 여러 민족은 청나라 대칸에 대한 충성의 의무가 없어지자 몽골은 러시아를 티베트는 영국을 후견인으로 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또 만주는 일본, 신강은 러시아 세력밑으로 들어갔다. 이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무력으로 신강, 티베트를 합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갈단

16세기 중순 타타르(몽골) 좌익의 일부였던 칼카는 북몽골고원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남쪽 내몽골의 여러부가 청나라 밑에 들어간 후에도 세첸칸, 투시에트칸, 자삭트칸의 3부로 남아 북쪽의 부리야트, 서쪽의 오이라트와 함께 독립하였다. 오이라트는 초로스, 도르베트, 호쇼트, 톨구트로 나뉘어 칼카의 자삭트칸에 복종하였다. 이중 톨구트는 시베리아를 거쳐 남 러시아의 볼가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호쇼트도 청해로 옮겨 청해호쇼트로 되었다. 남은 초로스부와 도르베트부는 원래 오이라트의 좌익이었기 때문에 준가르라 불리었다.

이 준가르(초로스)부에서 에센-타이시의 후손으로 바아토르-홍타이지가 나타나 이들을 이끌다가 1653년 아들 셍게가 뒤를 이었다. 1671년 셍게가 그의 배다른 형제 즉 세첸칸과 초드바-바아토르에 의해 살해되자 라싸의 다라이라마에게 수업받던 바아토르-홍타이지의 4째 아들 갈단이 1676년 환속하여 자이산호에 있던 호쇼트칸 오치르투-세첸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토벌하고 준가르 부족장이 되어 형의 처였던 아누다라를 취하였다.

이윽고 갈단은 칭기스칸이 몽골인들을 통합하였던 것과 비슷하게 호쇼트부 등을 합쳐 전 오이라트의 칸이 되었다. 갈단의 유목 기마군단은 기동력은 말할 것도 없고, 화기에서도 상당히 강하였다. 갈단군은 전투 시에는 제일 앞에 철포와 대포, 두 번째에 궁시(활부대), 세 번째에는 칼과 창의 순서로 싸웠다. 대포는 낙타로 옮겼으며 화승총수는 키르기스인과 부하라인을 부렸다.

1679년 갈단은 하미, 투르판을 복속시켰으며 다음해에는 카슈가르와 야르칸드를 정복하였다. 당시 카슈가르에는 백산당, 야르칸드에는 흑산당이란 종교적인 호자가문이 차가타이칸들의 권위가 약화되자 이슬람적 신권정치를 하고있었다. 1684년에는 카자흐의 타쉬켄트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갈단은 방향을 돌려 자삭트칸과 투시에트칸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는 칼카에 진출하였다. 원래 자삭트칸가에 복속하였던 준가르(오이라트)는 1688년의 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항가이 산맥을 넘어, 오르콘강 상류의 타밀강변에서 투시에트칸의 주력군을 격파하였다. 오르콘과 툴라유역을 점령한 갈단은 케룰렌 하곡을 따라 만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며 우르가-칼간 루트를 따라 내몽골까지 위협하였다.

1690년 9월, 북경 북방 300 km인 우란-부퉁에서 청군과 갈단군이 처음으로 충돌했다. 갈단군은 습지를 앞에 둔 숲 속에 포진하고, 낙타의 다리를 묶어 땅에 앉히고, 등에는 물에 적신 펠트를 걸쳐 탄환을 막는 방패로 한 후, 그 뒤에서 소총을 나란히 늘어놓고 격렬하게 사격전을 벌여 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청나라 강희제

이때 칼카에서는 청나라에 의지할 것인가 러시아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는데 이교도인 러시아보다는 청나라가 낫다는 제1대 활불 젭춘담바의 뜻대로 수십만이 넘는 칼카부민이 내 몽골로 내려와 청나라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 강희제는 1691년 5월 돌론-노르(원나라의 상도)에서 대회의를 소집하여 그곳에서 젭춘담바와 3명의 칼카 칸을 비롯한 주요 수령들의 충성서약을 받고 황실에서 봉록을 주는 대신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1695년 갈단은 눈 강가에 있던 호르친부를 청나라의 보호에서 끌어내려고 헨테이 산맥을 넘어 케룰렌 강의 상류인 바얀-우란에 본영을 설치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강희제는 청군을 3개 군단으로 하여 고비사막을 건너게 하였다. 흑룡강장군 사부스가 이끄는 동로군 3만 5천은 심양을 출발해서 케룰렌 강으로 향하였으며 강희제 자신이 지휘하는 중로군 3만 7천은 북경을 출발해서, 내몽골을 거쳐 고비사막을 서북으로 가로 질렀다. 무원대장군 휘양구백이 이끄는 서로군 3만 6천은 내몽골 서부에서 음산산맥을 넘어 고비사막 서부의 옹깅하로 나아간 후, 톨강으로 향하였다.

갈단은 중로군을 피했지만 서로군에 걸려들어 우르가 남쪽의 존-모드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갈단의 부인은 사망하고 시종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가축도 빼앗겼다. 갈단 자신은 겨우 살아남아 부하 5천 여명과 함께 항가이 산중의 타밀강 근처에 머물렀다. 그때 갈단에게 속해있던 셍게의 아들 체왕랍탄이 준가리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준가리아로 돌아갈 수가 없게된 갈단은 아주 쪼들렸다. 과거 오이라트군을 이끈 아릭부케는 서투르키스탄을 지배한 차가타이가의 아루그에 배신당하여 쿠빌라이에 패한 것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갈단은 결국 1697년 5월 서북고원을 떠돌다가 사망하였다.



준가르의 멸망

갈단의 뒤 준가르를 이끈 자는 체왕랍탄, 그리고 그의 아들인 갈단체링이었다. 강희제는 준가르가 티베트를 차지하는 것을 막으려고 1720년 두 무리의 청군, 하나는 사천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차이담을 통해서 티베트로 진격시켜 준가르군을 격파하고 라싸로 들어가 친 중국적인 다라이라마를 세우고 청나라 고위관리가 황교의 정책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후 청군은 칼카 투시에트칸부의 서부를 새롭게 개척하여 사인노얀부로 만들어 칼카4부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1745년에 갈단체링이 죽고 준가르에 내분이 일어나 갈단체링의 외손인 아무르사나가 청나라에 망명하자 건륭제는 1755년 봄 2방면으로 청군을 이끌고 준가리아로 진격하였다. 가는 도중 청군에게 투항하는 자가 속출하여 청군은 100일만에 일리를 차지하였으며 타림분지로 도망한 다와찌는 우슈에서 붙잡혀 북경에 보내졌다. 청나라는 오이라트 4부중 호쇼트부의 아무르사나를 칸으로 하였는데 그는 그후 자립하려 하였다. 여기서 청군은 1757년 다시 일리를 정복하였고 아무르사나는 카자흐로 도망하였으나 병사하였다. 그후 3년간에 걸쳐 청군은 오이라트 전 인구 60만 중 절반을 살육하고 나머지도 천연두로 병사하거나 도망하여 준가리아는 버려졌다.

당시 타림분지는 준가르부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는 그대로 군대를 몰아 다음해인 1759년 카슈가르를 점령하여 준-회 양부를 통합하였다. 청나라의 위력에 겁먹은 일리지방 서북쪽의 발하쉬호에 있는 카자흐 족장은 번속국이 되었으며, 페르가나 지방에 있던 코칸드칸국의 에르디니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준가리아는 유라시아 초원의 마지막 유목국가였다. 청나라와 러시아가 유목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였고 당시는 이미 기마군보다 화기의 힘이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유목군주의 경제기반인 내륙무역이 쇠퇴한 것에 더하여 정착지대의 농민이 초원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 초원에는 유목제국이 두 번 다시 생길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13세기 칭기스칸과 같았던 갈단과 체왕랍탄이 화기보병 위주의 18세기 군대와 부딪쳐 무너졌던 것이다.

청나라가 승리하자 내몽골고원에 있던 칼카인들은 다시 옛땅에 돌아갈 수 있었으나 이때부터 청나라 수비대가 우르가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준가르가 멸망한 후에는 칼카 각맹의 경계를 확정하여 내정간섭을 강화하였다. 또 청나라의 라마교 보호정책에 의해 고급승려들은 특수귀족으로 되어 사원부속의 토지와 유목민도 가진 일종의 봉건영주가 되었다.

1636년에 시작된 청나라의 내몽골고원의 지배로부터 60년 정도지나 북몽골고원의 지배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나 시작된 신강 지배야말로 그때까지 몇번있었던 일시적인 원정과는 달리 유목민 또는 오아시스의 정착민을 밑바닥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이들 지역의 통치방법으로 내란과 분열이 계속된 이 지역의 정치권력을 더욱 잘게 부수어 약화시키면서 봉건적 수탈은 그대로 두었다. 건륭제가 준-회부를 병합한 사건은 한나라 이래 1800년 동안 중국이 추구해온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보복을 이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톨구트-오이라트(칼묵)

17세기 초 칼카의 알탄칸이 초로스부를 홉도 지역에서 예니세이 상류로 밀어내자 톨구트부는 준가리아를 버리고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해와 카스피해 북방으로 향하였다. 톨구트부는 1632년부터는 서남쪽을 향해 볼가 강 하류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톨구트부는 카스피 해 북방, 즉 볼가 강 하구부터 망기쉴락 반도에 이르는 초원을 장악하였고 그곳을 근거로 하자라습, 카트, 우르겐치 등 히바 칸국에 속하는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반면 톨구트부는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1654년 크리미아와 오스만투르크가 동맹하자, 모스크바는 톨구트부에게 러시아 도시에서의 교역을 허가하여 주고, 크리미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또 1673년에는 우크라이나영유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톨구트부 기마대가 필요하였다. 그후 러시아-오스만투르크 전쟁 때에는 많은 부를 쌓아 전반적으로 톨구트부는 러시아의 보호아래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팽창으로 유목지가 감소하여 톨구트부는 가난해져, 어부로 된 자와 러시아정교로 개종한 자, 자식들과 자신을 러시아인에게 파는 자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수산물과 소금을 러시아인이 장악하고 러시아의 법률을 이들에게 적용하였다. 1761년에는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그리고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톨구트는 물도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다.



이때 준가르부가 멸망하여 일리지역의 인구가 격감한 것을 안 톨구트부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조상의 땅 일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코사크, 바시기르, 카자흐와 키르기스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7개월에 걸쳐 10만명을 잃은 끝에, 7만명의 톨구트부는 1771년 일리지방으로 돌아왔다. 청나라 건륭제는 북경에서 이들의 지도자 우바시를 접견하고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지쳐있던 이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초로스부와 호쇼트부의 전멸로 생긴 빈 지역을 메우도록 하였다.

서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에는 16세기이래 초원으로 남하한 투르크계의 우즈벡족에 의한 3개의 나라 즉, 코칸드칸국, 부하라칸국, 히바칸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칸국도 상호 영역문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동쪽과 같이 정치적으로는 분열상태였으므로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1853년 오렌불그 성에서 출발한 러시아군은 코칸드칸국을 공격하고 별동대는 일리강에서 세미레체에 들어와 베르누이 요새(알마아타)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1867년 이곳에 타쉬켄트를 수도로 하는 투르키스탄을 세웠다. 1868년에는 부하라칸국 1873년에는 히바칸국이 모두 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 되었으며 코칸드칸국은 1876년에 직할령으로 페르가나주가 되었다. 1884년 러시아군은 이란에 가까운 메르브의 투르크멘도 정복하여 서투르기스탄 전역을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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