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단
16세기 중순 타타르(몽골) 좌익의 일부였던 칼카는 북몽골고원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남쪽 내몽골의 여러부가 청나라 밑에 들어간 후에도 세첸칸, 투시에트칸, 자삭트칸의 3부로 남아 북쪽의 부리야트, 서쪽의 오이라트와 함께 독립하였다. 오이라트는 초로스, 도르베트, 호쇼트, 톨구트로 나뉘어 칼카의 자삭트칸에 복종하였다. 이중 톨구트는 시베리아를 거쳐 남 러시아의 볼가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호쇼트도 청해로 옮겨 청해호쇼트로 되었다. 남은 초로스부와 도르베트부는 원래 오이라트의 좌익이었기 때문에 준가르라 불리었다.
이 준가르(초로스)부에서 에센-타이시의 후손으로 바아토르-홍타이지가 나타나 이들을 이끌다가 1653년 아들 셍게가 뒤를 이었다. 1671년 셍게가 그의 배다른 형제 즉 세첸칸과 초드바-바아토르에 의해 살해되자 라싸의 다라이라마에게 수업받던 바아토르-홍타이지의 4째 아들 갈단이 1676년 환속하여 자이산호에 있던 호쇼트칸 오치르투-세첸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토벌하고 준가르 부족장이 되어 형의 처였던 아누다라를 취하였다.
이윽고 갈단은 칭기스칸이 몽골인들을 통합하였던 것과 비슷하게 호쇼트부 등을 합쳐 전 오이라트의 칸이 되었다. 갈단의 유목 기마군단은 기동력은 말할 것도 없고, 화기에서도 상당히 강하였다. 갈단군은 전투 시에는 제일 앞에 철포와 대포, 두 번째에 궁시(활부대), 세 번째에는 칼과 창의 순서로 싸웠다. 대포는 낙타로 옮겼으며 화승총수는 키르기스인과 부하라인을 부렸다.
1679년 갈단은 하미, 투르판을 복속시켰으며 다음해에는 카슈가르와 야르칸드를 정복하였다. 당시 카슈가르에는 백산당, 야르칸드에는 흑산당이란 종교적인 호자가문이 차가타이칸들의 권위가 약화되자 이슬람적 신권정치를 하고있었다. 1684년에는 카자흐의 타쉬켄트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갈단은 방향을 돌려 자삭트칸과 투시에트칸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는 칼카에 진출하였다. 원래 자삭트칸가에 복속하였던 준가르(오이라트)는 1688년의 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항가이 산맥을 넘어, 오르콘강 상류의 타밀강변에서 투시에트칸의 주력군을 격파하였다. 오르콘과 툴라유역을 점령한 갈단은 케룰렌 하곡을 따라 만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며 우르가-칼간 루트를 따라 내몽골까지 위협하였다.
1690년 9월, 북경 북방 300 km인 우란-부퉁에서 청군과 갈단군이 처음으로 충돌했다. 갈단군은 습지를 앞에 둔 숲 속에 포진하고, 낙타의 다리를 묶어 땅에 앉히고, 등에는 물에 적신 펠트를 걸쳐 탄환을 막는 방패로 한 후, 그 뒤에서 소총을 나란히 늘어놓고 격렬하게 사격전을 벌여 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톨구트-오이라트(칼묵)
17세기 초 칼카의 알탄칸이 초로스부를 홉도 지역에서 예니세이 상류로 밀어내자 톨구트부는 준가리아를 버리고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해와 카스피해 북방으로 향하였다. 톨구트부는 1632년부터는 서남쪽을 향해 볼가 강 하류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톨구트부는 카스피 해 북방, 즉 볼가 강 하구부터 망기쉴락 반도에 이르는 초원을 장악하였고 그곳을 근거로 하자라습, 카트, 우르겐치 등 히바 칸국에 속하는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반면 톨구트부는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1654년 크리미아와 오스만투르크가 동맹하자, 모스크바는 톨구트부에게 러시아 도시에서의 교역을 허가하여 주고, 크리미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또 1673년에는 우크라이나영유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톨구트부 기마대가 필요하였다. 그후 러시아-오스만투르크 전쟁 때에는 많은 부를 쌓아 전반적으로 톨구트부는 러시아의 보호아래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팽창으로 유목지가 감소하여 톨구트부는 가난해져, 어부로 된 자와 러시아정교로 개종한 자, 자식들과 자신을 러시아인에게 파는 자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수산물과 소금을 러시아인이 장악하고 러시아의 법률을 이들에게 적용하였다. 1761년에는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그리고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톨구트는 물도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다.
이때 준가르부가 멸망하여 일리지역의 인구가 격감한 것을 안 톨구트부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조상의 땅 일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코사크, 바시기르, 카자흐와 키르기스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7개월에 걸쳐 10만명을 잃은 끝에, 7만명의 톨구트부는 1771년 일리지방으로 돌아왔다. 청나라 건륭제는 북경에서 이들의 지도자 우바시를 접견하고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지쳐있던 이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초로스부와 호쇼트부의 전멸로 생긴 빈 지역을 메우도록 하였다.
서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에는 16세기이래 초원으로 남하한 투르크계의 우즈벡족에 의한 3개의 나라 즉, 코칸드칸국, 부하라칸국, 히바칸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칸국도 상호 영역문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동쪽과 같이 정치적으로는 분열상태였으므로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1853년 오렌불그 성에서 출발한 러시아군은 코칸드칸국을 공격하고 별동대는 일리강에서 세미레체에 들어와 베르누이 요새(알마아타)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1867년 이곳에 타쉬켄트를 수도로 하는 투르키스탄을 세웠다. 1868년에는 부하라칸국 1873년에는 히바칸국이 모두 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 되었으며 코칸드칸국은 1876년에 직할령으로 페르가나주가 되었다. 1884년 러시아군은 이란에 가까운 메르브의 투르크멘도 정복하여 서투르기스탄 전역을 지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