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제국
1370년 티무르는 먼저 심복의 아미르들을 군대와 여러 관청의 요직에 배치하여 신정권의 조직을 굳히고 사마르칸드에 요새와 성곽 및 궁전의 건축을 명령하여 수도에 어울리는 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불온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차가타이 아미르들을 숙청하고 여러 부족군을 해체, 재편하여 심복 아미르들의 지휘하에 집어넣었다. 이러한 내부 정리 후 그때까지 억눌려있던 차가타이인의 왕성한 에너지를 티무르는 외부로 분출시켰다.
티무르는 사마르칸드를 보급기지로 삼아 자신은 오르도를 이끌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정복전을 감행하였다. 티무르는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으며 한번 내린 명령은 결코 취소하는 법이 없는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드를 세계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장엄하고 화려한 왕궁을 비롯하여 모스크와 마두라싸를 차례차례 건립하고 관개망도 정비하였으며 바자르도 크게 확장시켰다.
수도 사마르칸드는 유럽, 중동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서의 교역간선로와 러시아 및 킵착초원과 인도를 연결하는 남북의 교역로가 교차하게 되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란, 시리아, 동투르키스탄, 중국 등에서 온 기술자들은 유리 기기, 도자기, 융단, 자수, 제지, 무구등 각종 공예방면에서 기술을 겨루었고 도로, 시장(바자르), 대상숙박소등을 정비하여 사마르칸드는 모든 내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중추가 되었다.
"티무르가 즉위한 이후 킵착칸국, 인도, 타타르 등 여러 나라에서 사마르칸드로 가져온 상품은 실로 엄청나서 판매진열장이 동이나 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티무르는 기술관리에게 명하여 사마르칸드 성을 가로지르는 시장 을 건설하여 그곳에 상인을 초치시키도록 하였다. 시장을 건설하는 비용은 사마르칸드의 전 시민이 부담케 하고 공사는 작업반을 2반으로 나누어 주야로 시행했기 때문에 20여일 남짓한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이 바자르는 사마르칸드성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는 대 시장으로 규모는 상당히 크고 천정은 돔으로 덮여 있는데 광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곳곳에 창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티무르와 그의 부하들은 도시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주변의 초원이나 정원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사마르칸드 교외의 목초지에 세워진 티무르의 텐트는 한마디로 성이라고 할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것으로 그 주위에는 4만-5만 정도의 부하 들의 텐트가 가지런히 세워졌다. 이들이 한번 원정에 나서면 일제히 텐트를 접고 가족과 가축 모두 전쟁터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도시주변에 살면서도 정착민으로 동화하지 않고 유목민의 생활양식을 유지함으로서 말을 이용한 기동성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목군단을 능숙하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티무르의 성공은 칭기스칸의 그것과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정착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많은 건축활동을 한 것에 비하여 칭기스칸에게 정착사회는 보호 육성의 대상이 아니고 약탈의 대상으로 파괴가 목표였다. 초원지대에서 자란 칭기스칸은 정착사회의 성질이나 이용가치를 잘 몰랐던 것이다.
대외원정
티무르는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유목국가를 수립한 이상 대외원정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티무르는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섰다. 중앙아시아 통일 후 티무르가 고향 땅에 머문 기간은 전부해서 몇 년 밖에 안되었다. 그는 사마르칸드에 대 바자르(공동시장)를 건설하여 통상활동을 활성화시켜 대외원정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상인을 각지에 파견하여 여러 나라의 지도와 기록을 제공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정세에는 더없이 정통하여 그의 외정은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랐다.
주치가의 푸른오르도에서 톡타미쉬가 망명해 왔을 때 티무르는 톡타미쉬를 도와 울루스칸과 싸워 톡타미쉬를 푸른오르도의 칸으로 세웠다. 톡타미쉬칸은 나아가 본가인 황금오르도에 개입하여 1378년 볼가강변의 아스트라칸과 사라이를 점령하였다. 톡타미쉬칸의 성공과 함께 티무르와의 관계는 차갑게 되었다. 1385년 톡타미쉬칸은 타브리스를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티무르는 먼저 이란 고원으로 진군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잘라이르 왕가를 격파하고 술타냐와 타브리스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티무르는 먼저 이란고원과 카프카즈를 정복하고 북 카프카즈의 테렉강 부근에서 톡타미쉬칸군을 분쇄하고 사라이와 아스트라칸을 불태웠으며 모스크바까지 진군하였다. 이렇게 서방을 석권한 후 티무르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인도원정을 감행하였다. 1398년의 인도원정은 풍부한 인도의 물자와 교역타개가 목적이었다. 펀잡과 갠지스강 상류지역은 간단하게 티무르에게 유린되어 투굴룩 왕조의 수도 델리는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이어서 다음해 1399년 그루지아를 정복하고 잘라이르 왕가로부터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뺏고 시리아에 진격하여 알레포, 다마스커스를 급습하여 맘룩 왕조를 굴복시켰다. 1402년 7월, 티무르는 강적 오스만투르크의 바야지드1세와 앙카라에서 회전하였다. 양군모두 10만을 넘는 대군을 거느린 싸움이었으나 티무르군의 승리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었으며 티무르는 그 여세를 몰아 에게해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서는 소아시아, 시리아로부터 동은 천산산맥, 델리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 티무르의 직접, 간접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대 제국이 성립되었다.
1335년 일칸국의 붕괴후 군소정권이 난립한 이란을 티무르는 탈환한 것이었다. 본래 이란땅은 차가타이가의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침해하는 존재(오스만투르크, 맘룩조, 킵착칸국등)에 대한 공격은 당연하였다. 결국 티무르의 성공은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착민의 경제력이 잘 맞아 들어갈 때 강력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조화가 깨질 때 내륙국가는 망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샤르흐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함으로써 서쪽의 걱정이 사라진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원수이며 이슬람교의 적인 명제국으로의 대원정을 기도하였다. 이 원정이 성공한다면 그는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는 것이었다. 티무르는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드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큰눈이 쌓이고 심한 찬바람이 불었다. 1405년 1월에 결빙한 시르다라아강을 건너 오트랄에 이르른 70세의 티무르는 추위를 녹일 술을 너무마셔 책상에 앉은채 2월 18일 쓰러졌다. 즉시 중국원정은 중단되고 티무르의 유해는 사마르칸드의 구르이미르묘에 매장되었다.
권력의 핵이 빠진 티무르 제국에서는 자연 정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1409년에 티무르의 4남 샤르흐가 사마르칸드를 점령함으로서 내란이 겨우 진정되었다. 샤르흐 자신은 헤라트(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사마르칸드에는 아들인 울룩-벡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학문, 예술의 보호자여서 사마르칸드나 헤라트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화려한 궁정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들 여러 도시에서는 장려한 모스크, 마드라싸, 공동 숙박시설, 공동 목욕탕, 궁정에 딸린 정원이 만들어져 방문객을 놀라게 하였다. 샤르흐는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오스만투르크와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실크로드를 둘러싼 동서교역은 더욱 번창하였다. 내륙아시아가 하나의 강대한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15세기는 몽골제국의 전성기와 같은 동서교통이 이루어졌다.
중앙아시아의 변모
이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명나라가 감숙지방의 관문인 가욕관을 폐쇄하였고 소아시아와 발칸지방에서는 오스만투르크가 멀리 빈까지 침입하여 유럽인이 아시아로 오고 가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려 실크로드는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진출로 새로운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고 있던 유럽인은 1498년 마침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도달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낙타등에 실려서 조금씩 수출되어 오랫동안 동경해 온 동방의 차, 도자기, 칠기, 견직물, 벽지 등을 배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내륙아시아의 혼란과 분쟁이 겹쳐 실크로드는 해상로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델란드가 인도항로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의 동진이 진행되었다. 16세기 중반 러시아와 영국과의 해상교역이 시작되자 시베리아의 모피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귀중한 상품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무렵 우랄산맥 서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제정러시아 최대의 어용상인 스트로가노프가는 1581년 돈-코사크의 수령 에르마크를 대장으로 한 탐험원정대를 시베리아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우랄산맥을 넘은 에르마크는 오브강, 이리티쉬강 유역에 이르러 쿠춤칸을 격파하고 그 수도인 시비르를 점령하였다. 그는 1584년 이리티쉬 강변으로 역습하여 온 쿠춤칸과의 전투에서 난전 중에 익사했지만, 러시아제국의 동방 진출은 그 후에도 착착 진행되어 광막한 시베리아의 대 삼림지대를 개척하고 여러 차례 아시아의 역사에 폭풍을 일으킨 북아시아의 유목세력을 흡수하였다.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의 존재가 희미하게 되어 버렸으나 실크로드가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카자흐와 코칸드칸국, 혹은 부하라칸국과 같이 동서교역은 변함없이 중세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다 1935년경 연안을 근거지로한 중국공산당은 감숙, 하미, 우르무치, 알마아타를 잇는 이전의 실크로드로 구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교역이 필요하여 철도라도 놓게 된다면 이 길은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