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후계자들 - 알칸국과 킵착칸국

시골농군 2009. 5. 19. 17:11


일칸 아바카

일칸국(훌레그-울루스)이란 칭기스칸의 손자 훌레그가 1258년에 이란을 정복하여 세운 몽골왕국이다. 일이란 나라의 의미로서 일칸이란 몽골제국의 종가인 대원-울루스에 신속하는 국왕이란 뜻이다. 일칸국의 영역은 이란본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아와 소아시아 동부를 포함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페르샤만까지, 서쪽으로는 유프라데스강, 북쪽으로는 카프카즈고원 남부, 북동쪽으로는 아무다리아강에 다다르는 지방이었다. 수도는 타브리즈(초기는 마라가 그리고 후에는 술타냐)였으나 대원-울루스의 쿠빌라이처럼 일칸은 이곳에 살지 않고 유목민의 관습을 취하여 하영지와 동영지를 이동하며 생활하였다. 훌레그의 하영지는 우르미아호 동방의 마라가, 반호 북방의 아라타그, 시야쿠였으며 동영지는 우르미아호 남쪽의 자가토 및 아제르바이잔의 아쓰란주(특히 카라바그)였다.

훌레그가 1265년 48세로 사망하자 그의 유해는 우르미야호 동쪽연안의 샤후타라섬 산꼭대기 비밀장소에 매장되었다. 황금과 보석이 바쳐지고 어린 미소녀가 순장되었으며 수일간 묘 앞에는 먹을 것이 올려졌다. 이와 함께 지방에 있던 장자 아바카에게 급사가 파견되고 모든 도로가 폐쇄되어 여행자들은 그 자리에서 발이 묶였다. 후계자 아바카는 환영을 받으면서 상경한 후 새로운 일칸으로 즉위하였다. 역대 일칸은 계승과정에서 쿠빌라이의 인준을 받았으며 행정제도, 세제를 포함한 각종 법제와 친위대 편제에 이르기까지 대원-울루스의 제도를 따랐다. 일칸 아바카는 등극과 동시에 킵착을 공략하고 5년 뒤에는 차가타이의 바락과도 대 혈전을 치른 끝에 승리하였으나 이집트의 맘룩과 충돌하여 사망하였다.



일칸 가잔

아바카가 1282년 48세로 사망하자 칸위 계승을 놓고 그의 아들 아르군, 게이카투, 그리고 동생 테구데르가 경쟁하였으나 테구데르가 제3대 칸으로 추대되었다. 테구데르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몽골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아르군이 제 4대 일칸으로 즉위하였다. 1291년 아르군이 병사하자 그의 동생 게이카투가 칸위에 올랐다. 1256년부터 1295년까지의 40년간은 일칸국도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몽골인은 페르시아인 관료를 이용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징세를 하고 농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정치의 부패와 몽골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재정지출을 증가시키고, 가축의 돌림병까지 유행해 재정이 악화되자 제5대 칸 게이카투는 1294년 위기를 타개하고자 금, 은의 귀금속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원-울루스의 '교초'를 본따 '차오'라는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칸국의 차오 발행시도는 국제 통화로 지폐를 발행하려는 것으로 이슬람-중국의 양 경제권이 통합될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게이카투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지폐와 교환해 방대한 양의 귀금속이나 물자를 정부가 장악하게 되므로 일칸국의 재정이 재건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금-은 본위제를 취하고 있던 이슬람 제국에는 지폐발행의 전통이 없었고 중국처럼 관료기구도 완비되어 있지 않은 탓에 차오를 정착시킬 수 없었다. 상거래가 격감하면서 불과 두 달만에 차오 회수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위신을 잃은 게이카투는 1295년 바이두에게 살해되었다.

바이두 역시 칸이 된지 6개월만에 아르군의 아들 가잔에게 처형되는 등 1295년은 칸이 세 번이나 교체되었다. 명석한 판단력을 갖고 있던 제7대 칸 가잔은 바이두를 쓰러뜨리고 칸에 오를 때 공을 세운 부장 나우루즈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몽골인에게 이슬람교도처럼 터번을 착용하라고 명했다. 그 뒤로 일칸국에서는 몽골인의 집단적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그는 몽골고원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현지민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나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 나는 오직 거대한 황무지를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가잔칸은 몽골인 들을 불러모아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나는 득이 된다면 페르시아인 농민을 전부 약탈할 수 있으나 뒷날 너희들이 먹을 것과 사용할 것을 또다시 찾는다면 나는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만일 너희들이 농민의 소와 종자와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의 수확물을 다 거두어 먹어치운다면, 너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는가."

가잔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나우루즈를 죽여 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와지르(총리)에 이란인 라시드-앗-딘을 등용한 가잔의 경제개혁으로 정기적인 징세 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물품과 화폐에 의한 납세제도를 절충 시행하고 탐가 등 각종 세금을 감면하거나 폐지하였다. 그는 농번기에 농민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짓을 규제하여 생산성을 유지하고, 화폐제도를 정비하며 도량형도 표준규격화 하였다. 농업의 소생을 위하여 관개시설을 복구하는 등 가잔의 개혁의지에 힘입어 생산성은 크게 향상됨으로서 속민들의 세금부담은 감소하였으나 세수는 이전보다 오히려 급증하였다.

일칸국에서도 매사냥꾼, 표범사냥꾼 등의 전문 수렵관이 있어 노획물을 국고나 공직자에게 납입하였으나 이들이 토착민들을 괴롭히자 가잔칸은 이것을 개혁하였다. 대칸 오고데이에 의해 제도화된 몽골의 얌 즉 역전제도는 일칸국에서도 시행되었으나 가잔칸은 착취와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역참제도를 재편성하고 화폐주조와 도량형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재정정체를 타개, 경제혼란을 수습하였다. 또한 해마다 원제국에 사절단을 파견해 몽골제국의 단결 강화에 노력했다.

가잔칸은 개종하였지만 칭기스칸의 야사를 준수하고 샤머니즘, 불교의 유풍을 버리지 않고 주술을 믿었으며 유목전통을 지켰다. 일칸가는 칭기스칸의 후예로서 몽골의 전승을 유지하며 유목군주로서 이란 땅에 군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잔이 둔전인 익타를 병사들에게 분배하자 몽골인과 페르시아인의 결혼도 성행하여 몽골인과 현지 페르시아 속민 간에 공동체의식이 확립되었다. 이제 현지 몽골인들은 한군데에 자리잡고 농사짓기를 바라게 되었다. 가잔칸은 재위 5년만에 시리아 정벌에 나서 맘룩군을 몰아내고 다마스커스에 현지주둔 총독을 임명한 후 33세에 병사하였다.


일칸 올제이투

가잔이 사망하자 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잔의 동생 올제이투는 경쟁후보들을 재빠르게 제거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한편, 가잔의 개혁정책을 계속하였다. 올제이투의 치세에 대외적으로는 대체로 평화분위기가 유지되었다. "몽골인의 모든 내분은 종식되고, 대몽골제국의 판도는 중국해에서 카스피해에 이른다." 그는 킵착지방에 근접한 타브리즈에 있던 수도를 카스피해 서남지역의 술타냐로 천도하였다. 올제이투는 무절제한 생활태도로 1316년, 36세로 사망하자 아들 아부사이드가 12세에 등극하였다.

아부사이드는 과감한 군주로 반란 진압작전을 진두지휘, 바하두르칸, 즉 훌륭한 칸으로 불렸다. 그러나 1335년 11월 아부사이드는 바그다드-카툰에게 독살되었다. 이로서 훌레그가의 적통은 끊어졌다. 그 대신 아릭부케의 혈통을 이은 아르파케운이 옹립되었다. 그는 대원-울루스의 아난다 사건때 함께 살해된 멜릭테무르의 장자인 밍간의 손자였다. 밍간은 카이두-울루스를 두아일족이 차지함으로서 흔들린 중앙아시아를 뒤로하고 동쪽으로 이동한 부친과는 반대로 서쪽 이란 땅으로와 대칸 아릭부케의 적자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아르파케운 대가되자 훌레그가에 충성하였던 유력자들은 서로 자신들의 혈통을 떠받들고 대립함으로서 훌레그-울루스의 구심점은 급속히 무너졌다. 1353년에는 칭기스칸의 후예도 모습을 감추고 몽골계의 잘라이르 부족출신의 왕가가 15세기초까지 아제르바이잔과 이라크를 통치하였으나 그외의 이란고원은 몽골인이 아닌 많은 지방정권이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일칸국은 1360년 티무르에 멸망하였으나 그후의 사파비조 이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칸왕가 역대의 하영지, 동영지를 보면 하영지는 아라타그, 스구루룩, 시야크, 우쟌, 술타니아, 동영지는 아쓰란주(특히 카라바크), 자가토, 무간주, 마잔다란주, 바그다드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역대 일칸의 즉위식은 대개 하영지나 동영지에서 거행되고 쿠릴타이도 아라타그, 우잔등의 땅에서 개최되었다. 또 일칸국의 몽골군도 서북이란과 코라산에 나누어 유목민생활을 하였다. 일칸 궁전에는 대칸 쿠빌라이의 특명사절로 폴라드 칭상(승상)이란 재상이 대원-울루스 대표부 또는 이란지방 장관과 같은 형태로 주재하였다. 그외 일칸 궁정에는 중국인 의사도 있었고 초기의 불사에 사용된 중국 미술공예 수법은 이란의 세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황금오르도

칭기스칸은 주치에게 이르티쉬강과 알타이산맥 부근에 있는 모든 울루스를 주었다. 또 킵착초원과 그 방면에 정복한 여러 나라를 준다는 야르릭(칙령)을 내렸다. 킵착초원(디시트-이-킵착)은 지금의 카자흐초원이다. 주치와 그의 자손은 이렇게 하여 이르티쉬강 상류유역으로부터 남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북방에 펼쳐진 광대한 지역을 할당받았다. 주치에게는 40명 가까운 아들들이 있었다. 주치가 죽자 바투가 주치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주치 군의 반은 장남 올다에게 그리고 나머지 반은 주치가 차지하였다. 올다는 4명의 동생들과 함께 주치본래의 유목영지인 시르다리아강 이북의 초원, 즉 킵착동부를 차지하여 좌익의 왕가를 이루었다. 후계자 바투와 동생 시반은 주치-울루스의 우익을 이뤄 볼가강변을 근거지로 했다.

킵착은 11세기 중반까지 아랄해 북쪽에서 서쪽으로는 혹해북쪽에 걸쳐 영토를 지배한 부족연합체였다. 킵착 부족 연합체에 포함되어 있던 몇몇 부족들은 원래 중국 접경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서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동한 9세기에는 몽골어를 사용하는 카라키타이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시베리아에서 남부 러시아로 이주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비잔틴인, 페체네크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들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면서 지냈다. 1237년 몽골 침략군들은 동부 킵착 부족들의 수장이었던 바치만을 죽였으며 이로 인해 킵착 부족 연합체는 붕괴되었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와 주민들은 대부분 바투-울루스(킵착칸국)에 병합되었으며 서부 킵착의 부족들은 헝가리로 달아났다.

바투는 볼가강 하류지역에 사라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자신은 그 도시에 살지 않고 황금오르도에 살면서 볼가강변을 이동하였다. 바투가 볼가강 하류지역을 근거지로 한 것은 이 지역이 원래부터 동서교역 또는 남북교역의 주요도로였기 때문이었다. 몽골제국의 통일로 여행의 안전이 보장되고 부터 교역은 더욱 발전하여 관세 등의 수익은 대단하였다. 1252년 바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과 손자가 짧은기간동안 승계한 후 1257년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칸에 등극하였다. 사라이는 바투의 동생 베르케의 시대에 볼가강을 조금 올라간 지점으로 이동하였다.

사라이는 번성했을 당시 약 60만 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세계각지의 상인이나 외교사절이 모였다. 아르메니아나 그루지아의 왕자들, 크리미아나 흑해에있는 제노아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코라즘이나 맘룩조의 이집트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러시아제후들도 방문하여 황금오르도의 칸에게 공물이나 조세를 바치고 경의를 표하였다. 사라이에는 상인들의 창고가 나란히 세워지고 사라이에만 오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의 산물, 북방의 모피 등을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 농구, 피혁제품, 직물과 도기 등 일상용품도 생산되었다.




러시아 지배

러시아의 옛말은 루시로서 원래는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9세기 슬라브인이 루시인 노르만인이 있는 곳에 사절을 보내 통치자를 요청하여 류릭을 시작으로 3형제가 동슬라브의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노르만인이 러시아의 지배자로 된 것은 발트해부터 드니에프르강을 경유하여 흑해로 또는 볼가강을 경유하여 카스피해로 나가는 교역로를 그들이 확보하였기 때문이었다. 목적은 비잔틴 상인이나 이슬람 상인과의 교역을 하는 것으로 모피나 노예가 상품이었다.

몽골군이 침입하자 류릭가의 공작들은 칭기스칸의 피를 이어받은 황금오르도의 황녀들과 경쟁적으로 혼인을 맺어 칸의 사위로 되었다. 또 동족간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났을 때도 대공들은 많은 공물을 가지고 몽골 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라이로 향하였다. 또 여러 공국의 통치자들은 공인된 하청관리인으로 낙점을 얻고자 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와 갖은 재간과 재롱을 다 부렸다.

황금오르도의 제9대 칸인 외스벡은 1328년 루시에 있는 류릭가의 쿠냐지(공)들의 우두머리로 모스크바공 이반 1세에게 대공의 자리를 주고 황금오르도에 바치는 징세권을 위탁하였다. 모스크바는 1237년의 몽골군 침입당시에는 작은 요새였는데 징세를 청부받자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341년 외즈벡칸이 사망하고 페스트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후부터 황금오르도 내에서는 칸위를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1380년까지 21년동안 14명의 칸이 교체되면서 바투가의 혈통은 끊겼다.

이때 주치의 서자 토카테무르의 7대손 톡타미쉬가 시르다리아 강북의 청색오르도(코크오르도)에서 서차가타이의 실력자 티무르에게 망명하였는데 티무르는 그를 도와 청색오르도의 우르스칸과 싸워 톡타미쉬를 청색오르도의 칸으로 올려 주었다. 그러자 톡타미쉬는 더 나아가 황금오르도에 개입하여 볼가강변의 아스트라칸과 사라이를 점령하였다. 이때 크리미아의 영주 마마이(주치의 8남 보아르의 자손)가 황금오르도의 칸으로 자칭하다 1381년 칼카강에서 패하여 쫓기다 살해되었다.

톡타미쉬는 처음에는 티무르의 지원을 받았으나 얼마 안되어 그와 충돌하였다. 티무르는 볼가강하류지역을 유린하고 리아잔에 들어가 아스트라칸, 사라이, 불가르, 크리미아반도를 황폐시켰다. 티무르는 수도 사라이베르케를 파괴하고 거의 대부분의 수공업 장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데리고 갔다. 톡타미쉬를 마지막으로 서북 유라시아에는 몽골계의 여러 권력이 느슨하게 늘어선 상태로 2백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모스크바는 표트르 대제의 시대까지 대오르도의 칸위를 계승한 크림 타타르에 징세를 바쳤다.




짜르

모스크바는 몽골지배를 받는 사이 징세 등의 통치방법을 배웠다. 16세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문서는 몽골식이었으며 군 장비도 모두 몽골식이었다. 그즈음 모스크바는 17개의 돔(투멘=만호)을 가진 대공국이 되었다. 1502년 황금오르도의 칸위를 크림에게 빼앗긴 대오르도의 칸 일족은 모스크바의 동남방에 있는 카시모프에 영지를 받아 이반 3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러시아인 자신은 몽골인처럼 말을 잘 다루지 못하였으므로 카시모프 칸국에서 기마병을 고용하였다.

16세기 중엽에 모스크바의 이반 4세가 바투가의 본거지인 볼가유역의 몽골왕국 카잔과 아스트라칸을 차지하였다. 이반 4세는 1547년에 정식으로 짜르(칸)의 칭호를 썼다. 이반 4세는 모스크바에 카시모프칸의 시메온 벡부라트비치(사인부라트)를 맞아들여 짜르에 올리고 자신은 그 신하로 섬기다 다음해 양위를 받아 짜르로 됨으로서 모스크바 대공은 황금오르도의 계승자로 되고 다른 주치의 후예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짜르들이 몽골제국 영토 서반부를 지배하게 된 것은 그들이 황금오르도의 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서북 유라시아의 킵착칸국이 이번에는 러시아제국으로 더 한층 대형화하였다. 그후로도 몽골제국의 잔영은 크림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나 1783년 캐서린 여제의 치세에 지배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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