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후계자들 - 흔들리는 대칸

시골농군 2009. 5. 19. 17:09


대칸 카이샨

테무르는 아들이 없었다. 테무르는 치세후반에는 병때문에 정무를 맡을 수 없어 황후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바야우트족 출신 불루간-카툰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테무르의 둘째형 다르마바라에게는 다기와의 사이에 카이샨과 아유바르와다 형제가 있었다. 만약 카이샨이나 아유바르와다가 황제가 되기라도 한다면 불루간은 다기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불루간은 1299년, 카이샨을 몽골지역 최전방으로 보내버렸다. 다기와 그 둘째아들 아유바르와다 모자는 하남 회맹의 습봉 명목으로 대도에서 축출하였다. 1307년 1월 병상의 대칸 테무르(성종)가 죽었다. 재위 13년 나이 42세였다. 그녀는 감숙, 영하의 구 탕구트령에 있는 칭김의 동생 망가라의 3남인 안서왕 아난다에게 밀사를 급파하여 하루빨리 대도로 입성하여 대칸이 되라 하였다.

불루간-카툰의 생각대로 아난다의 즉위가 실현된다면 콩기라트 씨족은 외척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잃게 될까봐 아난다의 서방인맥이 중앙정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하루가순을 위시한 이들은 아난다의 등극을 저지하려고 비밀리에 단결하여 궁정쿠데타를 일으켰다. 불루간과 손잡은 좌승상 아쿠타이를 차가타이가의 방류 토레가 짓눌러 죽였으며 불루간-카툰과 아난다 등은 체포되었다. 이들 콩기라트파는 고 대칸 테무르의 둘째형 다르마바라의 둘째아들 아유바르와다를 추대하였다. 1307년 2월, 아유바르와다와 다기 모자는 대도로 향하여 아유바르와다 정권이 수립되었다. 콩기라트파가 아유바르와다를 추대한 이유는 생모 다기-카툰이 콩기라트 씨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칸 테무르(성종)의 사망과 아난다의 계승을 밀보로 알게된 카이샨은 휘하의 여러 장수와 상의하여 중앙아시아에는 감시부대만 남기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향하였다.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은 카이샨군을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그는 최전선에서 용맹을 발휘하여 몽골유목민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3월, 카이샨군이 카라코룸에 입성하자 제왕, 인척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최정예 부대를 뽑아 전통의 좌, 중, 우 3군단 방식으로 편성하여 카이샨은 중앙군의 선두에 서서 남하하였다. 대도정부는 카이샨군에게 저항할만한 무력이 없었다. 아유바르와다 이하 대도의 요인들은 상도로 북상하여 카이샨군을 환영하였다. 5월, 상도에서 쿠릴타이가 소집되어 카이샨은 제7대 대칸(무종)이 되었다. 아난다는 처형되고, 불루간은 유배되었다.

카이샨은 몽골전체의 지지를 받은 대칸이라서 일체성이 살아났다. 동방의 쿠빌라이 왕조를 우두머리로 두아, 바투, 훌레그-울루스의 연합이 그보다 밑에 있는 지역권력 위에 서서, 느슨한 통합체를 만들었다. 1308년 7월 정권의 기반확립이 대충 끝날 무렵 카이샨은 제국 서반부 3명의 지도자 즉, 차가타이-울루스의 쿤첵(두아의 아들), 주치-울루스의 톡타, 그리고 훌레그-울루스의 올제이투에게 각각 제왕 및 유력신하, 장수로 이루어진 대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서방으로 사절단을 보낸 다음해인 1309년 카이샨은 동남아시아 다도해 해역에서 인도양 방면의 항만도시국가들에도 우호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쿠빌라이가 확립한 해상교역 장악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라는 세계규모의 환상적인 평화, 안정 상태가 정치, 경제의 양면에서 그리고 내륙, 해상의 양면에서 실현되었다.


다기-카툰

대칸 카이샨은 다기-카툰을 황태후로 승격하여 강복궁에 살게하고 이어서 1308년에는 흥성궁을 세웠다. 또 어머니 다기의 간청으로 동생인 아유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대신 그후에는 대칸 카이샨의 아들 코실라를 칸위에 올리기로 하였다. 그는 또 쿠빌라이 적통에게만 허용되던 왕호를 주요 왕족과 인족에게도 주었으며 제국각지에 있는 자들도 중앙정부의 고위, 고관을 명예직으로 수여 받아 승상, 평장 등의 직함을 가진 자가 크게 늘었다. 특히 카이샨 등극으로 노예신분이었던 특수친위군단은 단번에 몽골인과 같게 취급되었다.

1311년 새해 대칸 카이샨은 31세, 약 3년반만에 돌연 쿠데타로 사망하였다. 원래 다기와 아유바르와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들인 대도의 요인들은 카이샨의 탈권을 아쉬워하였다. 카이샨의 장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리고 새 황제선출을 위한 쿠릴타이도 소집되지 않은 때 카이샨 개혁의 중추인 중앙관청 상서성이 폐지되고 정부수반 톡타 이하 주요 신하들이 구금되었다. 이어서 4일 뒤에는 모든 각료들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3월, 아유바르와다는 정식으로 대칸이 되었다.

이때 궁정의 실권을 장악한 자는 흥복궁 황태후 다기-카툰이었다. 대칸 아유바르와다의 황태자로 카이샨의 아들 코실라가 황태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키레스 씨족출신이었으며 둘째아들 톡테무르의 어머니는 탕구트인 이었다. 황태후와 콩기라트 파는 코실라를 주왕으로 봉하여 먼 운남으로 쫒아내고 섬서에서 죽이려고 하였다.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한 코실라는 서북지방으로 도망하여 부친과 인연이 있던 차가타이-울루스에 몸을 맡겼다. 다기는 1316년 콩기라트 씨족을 어머니로 둔 아유바르와다의 큰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세운 후 이번에는 톡테무르를 하이난 섬으로 추방하였다. 1320년 1월 치세 10년만에 아유바르와다가 사망하자 시데발라(원종)가 즉위하였다.

대칸 쿠빌라이가 타계한 뒤 뒤를 이은 대칸들은 상무의 면모를 잃고 무력해졌다. 대칸 테무르의 경우, 치세전반은 친어머니 코코진-카툰의 감독 하에 있었고, 후반은 불루간-카툰이 대권을 장악했었다. 카이샨의 친정이 좌절된 뒤에 전권을 장악한 이가 다기였다. 대칸 권력의 공동화가 가져온 악영향은 아주 컸다. 아유바르와다, 시데발라 시대 서방의 3대 울루스는 정식사절단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대칸 시데발라는 다기가 죽자 실권회복을 서둘렀다. 그러나 1323년 가을 대칸 시데발라가 여름수도인 상도에서 겨울수도인 대도로 남천하는 도중 콩기라트파 다기인맥은 테구시를 중심으로 칸의 텐트를 습격하여 21세의 시데발라를 죽였다.



군벌의 등장

시데발라 칸에게는 자리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들 모반자들이 떠받든 자는 어머니가 콩기라트씨족 출신으로 꼭두각시로 삼기 좋은 몽골지역 왕인 진왕 이순테무르였다. 테구시등은 신정권의 공로자가 됨으로써 대칸 암살의 대죄를 벗어나려 하였다. 이순테무르는 카마라의 아들이었다. 카마라는 1292년 몽골고원의 케룰렌 강변에서 유목하는 칭기스칸의 유산인 4대 오르도의 영주로 있다가 1294년 할아버지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쿠릴타이에서 칸의 자리를 놓고 동생인 테무르와 겨루다가 양보하고 고비사막 이북을 지켰었다.

이순테무르는 곧바로 10월 4일 케룰렌강변의 칭기스칸의 대 오르도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대칸 이순테무르(태정제)는 이전의 칸과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하여 대도에 군대를 급파하여 대칸 시데발라를 살해한 궁정신하 일당을 체포하고 모두 처형하였다. 그런후 대칸 이순테무르는 대원-울루스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콩기라트파를 대신하여 이순테무르의 가신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구 귀족의 몰락은 쿠빌라이가의 안정에 큰 영향을 주어 1328년 가을 5년째 왕위에 있던 이순테무르가 상도에서 다우라트샤 등이 주도한 쿠데타로 사망하였다.

새로운 칸에는 콩기라트씨족의 황후 바브칸-카툰이 낳은 황태자 아리기바가 상도에서 즉위하였다. 그런데 대도는 엘테무르가 지휘하는 킵착인 군단(카라친)이 이에 반대하여 카이샨의 차남 톡테무르를 칸으로 추대하였다. 킵착 부족장의 피를 이은 엘테무르의 가계는 카이샨 밑에서 컸다. 카이두와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쿠빌라이가는 몽골고원에 대군을 상주시키게 되었는데 이 결과 군사령관들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었다. 카이두와의 싸움에서 킵착친위군단의 사령관 토토카는 눈부시게 활약하여 몽케의 오르도를 하사받을 정도였다. 이 토토카의 아들이 쵼굴이고 쵼굴의 아들이 엘테무르였다. 엘테무르는 아유르바르와다, 시데발라시대에는 콩기라트 파에 밀려 지냈었다.

톡테무르는 서둘러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했다. 대도와 상도간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전통몽골세력을 중심으로하는 상도측이 우세하여 대도를 포위하였으나 대도 측이 잘 견디자 대도 측으로 내응하는 자들이 속출하여 상황은 역전되었다. 때마침 동방3왕가의 하나인 카사르가의 오룩테무르가 상도를 측면에서 급습하자 상도측은 궤멸되어 2개월간의 내란은 끝났다. 이 1328년의 내란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칸의 지위를 떠받들어 왔던 콩기라트파 귀족들은 세력을 잃었고, 대신에 군대를 장악한 장군들이 궁정의 실권을 독점하게 되어, 대칸은 군벌의 손에서 손으로 전전하는 꼭두각시로 되었다. 엘테무르는 톡테무르의 궁정에서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의 장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형제의 싸움

그러나 알타이 서방에 있던 코실라가 차가타이-울루스군의 지원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코실라군이 알타이에 이르자 몽골지역 유력자들이 모두 나와 맞았다. 코실라가 동쪽으로 군대를 진군시키자 유목민들은 카이샨에게 했던 것처럼 크게 환영하였다. 다음해인 1329년 정월, 코실라는 옛 수도 카라코룸의 북쪽에서 몽골지역과 중앙아시아의 지지를 배경으로 제위에 오름으로서 지난해 9월, 전투중인 대도에서 즉위한 동생 톡테무르와 형제가 맞서는 형태가 되었다. 엄동기라서 두 진영은 겨울야영상태에 들어갔다.

엘테무르는 원래 코실라가 대칸이 된다해도 상관없었지만 권력을 손에 넣은 지금에는 물러서기 아까웠다. 1329년 코실라(명종)는 차가타이가의 대군단을 고비북쪽에 머무르게 한 뒤 남하하였다. 8월 코실라 일행이 상도지구의 끝 옹구차트에 도착하자 동생인 톡테무르는 퇴위하여 황태자가 되어 코실라를 만나게 되었다. 대천막 속에서 제실, 제왕, 대신 등과 축하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로부터 나흘 뒤 코실라는 갑작기 사망하였고 엘테무르는 죽은 코실라의 아내의 명으로 우선 황제의 옥새를 톡테무르(문종)에게 주고 지체없이 옹구차트를 떠나 9일 뒤인 8월 15일, 상도에서 톡테무르를 복위시켰다.

코실라 지원을 위해 동진했던 차가타이-울루스 군은 엘테무르로부터 막대한 공여물을 받고 중앙아시아로 되돌아갔다. 이때 투르판 분지를 포함한 천산일대는 대원-울루스에서 정식으로 차가타이가에 양도되었다. 엘테무르 등은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다 차례로 없앴다. 이로서 전 몽골을 지탱해왔던 대칸 중심의 몽골공동체는 무너졌다. 군벌의 허수아비 톡테무르는 치세 3년뒤 1332년 8월 친형암살의 괴로움에 시달리다 죽었다. 상징적인 대칸을 원했던 엘테무르는 7세인 코실라의 둘째아들 이린지발을 선택하였으나 재위 43일만에 죽었다.


대칸 토곤테무르

엘테무르는 다시 부다슈리-카툰에게 엘테구스에게 칸위를 잇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우리아들은 아직 어리다. 광서에 있는 토곤테무르는 코실라의 큰아들로서 지금은 13세이다. 그를 세우는 것이 도리이다" 라고 하였다. 토곤테무르는 엘테무르에 의하여 계림으로 추방되어 있었다. 코실라의 장자 토곤테무르가 대도에 오게되자 부득이 엘테무르가 출영하였으나 토곤테무르는 엘테무르를 경계하였다. 엘테무르는 차일피일 즉위식을 미루었다. 그런 상태로 그는 다음해에 사망하였다. 겨우 장애물이 없어지자 황태후 부다슈리-카툰은 토곤테무르의 다음에는 엘테구스를 후계자로 한다는 조건부로 토곤테무르를 즉위시켰다.

유라시아 교역망을 통합한 몽골 제국의 형성에 기동력이 되었던 것은 강건한 몽골 기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지의 지배자가 되어 유라시아의 여러 도시에 군림하게 되자 도시의 편안한 생활이 그들의 에너지를 차츰 빼앗아 갔다. 도시는 인간의 욕망을 살찌우는 장은 될지언정 인간을 단련하는 장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골제국의 지배층들은 거대한 이권이 따르는 권력을 놓고 투쟁을 거듭하면서, 질박하고 용감한 몽골인 들의 기개는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 사라져 갔다.

몽골인이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정치는 한없이 어지러워졌다. 하천의 치수를 소홀히 해서 큰 가뭄과 홍수가 잇달아 농민들을 괴롭혔다. 대원-울루스는 동아시아의 대농경 지대를 유지, 관리할 능력을 잃어갔던 것이다. 황하 하류의 유로를 크게 바꾸는 대홍수, 한발에 따른 대기근은 농민생활을 파괴하면서 많은 유민을 낳고 반 몽골 봉기를 낳았다. 봉기가 한창 심각해지던 1353-1354년에는 돌림병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가면서 제국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되었다.

사회적 혼란과 빈번한 기근, 돌림병의 유행은 말세라는 절망감을 민중 사이에 퍼뜨리고, 회하로부터 양자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농민의 반란이 확산되었다. 강남의 반란결과 해운과 대운하를 통해, 북쪽의 대도방면으로 수송되던 식량이나 물자가 끊기게 되었다. 천재지변으로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이 점차로 남하하여 구조를 요청했지만 대칸은 이들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

엘테무르의 사후 궁정의 최고 실력자는 아스인 군단을 이끄는 메르키트인 바얀이었다. 바얀은 하남에 주둔하는 몽골군 사령관으로서 엘테무르에 협력하였으나 1335년 엘테무르의 아들 탕기쉬의 쿠데타를 진압하여 독재권을 장악하였다. 바얀은 제국혼란의 이유로 몽골인이 지나치게 중국화 한데서 찾고, 중국인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장, 유, 이, 조씨 성을 가진 자를 몰살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몽골인의 통치는 혼란에 빠졌다. 대칸 토곤테무르(혜종)의 친위병은 초라한 반면 대원-울루스군의 최정예 부대가 경호하는 바얀의 행렬이 크자 대칸은 바얀의 동생 마자르타이의 아들 톡토를 선동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벌 마자르타이, 톡토 부자가 권력을 장악하자 대칸은 이번에는 베르케-부카등 원래 이순테무르에게 발탁된 일파를 끌어 들였다. 일은 성공하여 마자르타이 부자는 감숙으로 추방되고 대칸은 어느 정도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칸은 베르케-부카의 세력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같은 해 마자르타이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톡토를 불러들여 정권을 맡겼다.


홍건적의 반란

1348년 대주(절강성 천대현)의 소금상인 방국진이 반란을 일으켜 해적이 되어 강소, 절강, 복건의 해안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1351년에는 하북인 한산동의 백련교란 종교비밀결사 운동이 하북, 산동, 하남, 안휘, 강서, 호북에서 폭발하여 중국의 곡창지대는 하나하나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 1352년 톡토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상호간에 연락이 부족한 이들을 각개격파하였으며 한산동은 체포되었다. 1353년에는 소금상인 장사성이 강소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해운항로와 제염지를 압도한 후 강소성 고유에 정권을 세웠으므로 톡토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런데 군단이 너무 커 톡토가 황제가 되려하는가 하는 생각이 궁정에 퍼지자 실권회복을 노리던 대칸 토곤테무르는 톡토 포박을 지시하였다. 톡토는 추방되었으며 다음해 운남의 유배지에서 독살되었다. 주장 톡토가 실각하자 남벌군은 스스로 무너졌으며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는 1355년 안휘성 호주에서 대송황제-소명왕이라 칭하였다. 이들 홍건정권은 일시 안휘성 안풍으로 물러섰으나 곧 세력이 회복되어 1358년에는 하남성 개봉으로 진출한 후 3갈래로 나뉘어 산동, 산서, 협서로 향하였다. 이때 대도가 믿고 있던 사람은 하남의 차간테무르였다. 차간테무르는 위구르인이었으나 증조부이래 하남에 정착한 가계로 1352년 홍건적이 하남으로 진출하였을 때 의용군을 결성하여 산동, 산서, 하남, 협서의 홍건적을 차례로 패퇴시켰다.

1359년 차간테무르는 홍건적의 수도 개봉을 탈환하여 홍건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차간테무르는 1362년 산동의 잔적을 소탕하는 도중에 살해되어 그의 조카인 양자 코코테무르(왕보보)가 대를 이어 하남군벌을 이끌었다. 이즈음 원나라 궁정에서는 황태자 아유시리다라 일파와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항쟁이 계속되었다. 황태자파는 코코테무르를, 반 황태자파는 산서 대동분지의 군벌 보로테무르와 손을 잡고 싸우다가 마침내 보로테무르는 멸망되었다.



주원장

이렇게 대도에서 군벌들이 서로 싸울 때 강남에서는 홍건적의 일파인 주원장이 남경에 자리잡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세력을 온존할 수 있었던 주원장은 1363년 파양호의 함대결전에서 진우량을 격파하고 1366년에는 한림아를 양자강에서 죽게한 후 1368년 1월 황제가 되어 국호를 대명이라 하였다. 즉위와 동시에 주원장은 서달, 상우춘에게 군사를주어 북벌에 오르게 하였다. 오랜 천재지변과 기근, 그리고 쟁란에 지쳐있던 강북, 화북의 여러 도시는 싸울 힘이 없었다. 대칸 토곤테무르는 각지의 몽골군벌이나 전통세력에 도움을 청했으나 대답은 없었다. 같은 해 9월 명군은 쉽게 대도를 점령하였다.

토곤테무르는 거용관을 통하여 몽골고원으로 피난하였다. 대칸은 처음에는 상도에 궁정을 설치하였으나 다음해 상도도 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므로 더욱 북쪽에 있는 콩기라트 부마가의 응창부로 일시 피난하였다. 1370년에 대칸 토곤테무르가 죽고 황태자 아유시리다라가 대칸이 되었다. 이윽고 명군이 응창부에도 쳐들어 왔으므로 아유시리다라는 더욱 북방으로 달아났으며 토곤테무르의 손자인 마이트레야바라를 위시한 수백 명의 몽골황족이 명군에 체포되었다. 그후 아유시리다라는 옛 수도 카라코룸에서 만주, 감숙, 티베트, 운남,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몽골 여러 세력을 거느려 아직도 지난날 칭기스칸 제국 정도의 세력권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원장은 1372년 서달이 이끄는 15만 대군을 3길로 나누어서 막북의 몽골고원을 침입했으나 톨강 방면에서 몽골의 승상 코코테무르에게 공격을 받아 수만인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1378년, 타계한 형을 계승하여 대칸이 된 토구스테무르는 중국본토에 자주 쳐들어가 몽골과 명조와는 일진일퇴의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토구스테무르는 명조로의 대진격을 꾀하여 요동방면을 쥔 잘라이르 국왕가의 나가추와 호응하여 동부 몽골지역의 훌룬부유르 지방에 진출하여 남하태세에 들어갔다.

그런데 1387년 풍승이 이끄는 명군이 북만주에 진군하여 무칼리 국왕의 자손 나하추가 이끄는 20여만의 대원-울루스군을 투항시켰다. 이 때문에 생긴 동부전선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토구스테무르는 스스로 부이르-노르 호반으로 가서 고려와 연락을 취하여 명군을 협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388년 오히려 명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서쪽으로 도망간 토구스테무르는 톨강 부근에서 아릭부케의 후예 이수데르에게 살해되어 쿠빌라이왕조는 단절되었다.

1392년 무렵 이수데르는 대원칸(다얀칸)을 칭하였으나 그것은 대원-울루스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몽골제국을 구성했던 각 부분, 각 집단은 이때부터 자립하거나 다른 대 세력에게 흡수되었다. 몽골고원에 되돌아온 사람들 속에는 킵착이나 아스 등의 집단도 있었다. 그들은 대원-울루스 시대의 신분이나 지위, 직명 등의 잔상을 각각 끌고 다니면서 서로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몽골을 만들어갔다.


동북아와 한반도

1308년 고려의 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의 충선왕(이질부카: 왕장)은 대도궁정에 그대로 머물면서 동북지방의 심양왕인 채로 고려국왕을 이었다. 그러나 아유바르와다가 대칸이 되자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차남인 라트나슈리(충숙왕: 왕도)에게 고려국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조카인 올제이투(왕호)에게는 고려세자 자리를 준 후 자신은 심왕으로서 대도궁정에 남았다. 충숙왕은 자기의 큰아들인 부다쉬리(충혜왕: 왕정)에게 왕위를 주려하자 고려 충선왕은 올제이투에게 심양왕 자리를 넘겨주었다.

올제이투는 대원-울루스의 양왕 순샨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순샨은 카마라의 둘째아들로 이순테무르의 동생이 되고 충선왕의 처 부다슈리의 형이었다. 고려계승권을 포기하여 불만이었던 그는 시데발라가 즉위하자 운동을 벌려 고려 충선왕을 티베트의 사카 땅으로 추방하고 충숙왕을 억류하였다. 충숙왕은 고려국왕의 자리를 아들인 충혜왕에게 내주었으나 대원-울루스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실권을 장악한 장군 바얀이 엘테무르와 사이가 좋았던 충혜왕을 싫어하였기 때문으로 1343년 고룡보가 원나라의 사자로서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 궁정으로 압송하였다. 충혜왕은 광동의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 호남성 악양에서 급서하였다. 그후 고려국왕의 자리는 충혜왕의 큰아들로 8세인 충목왕(파드마도르지: 왕혼)가 이었다.

고려 충목왕은 1348년 12세에 사망하여 동생인 고려 충정왕(미스캅도르지: 왕저)가 뒤를 이었다. 이때 대칸 토곤테무르는 그를 폐위시키고 고려 충혜왕의 동생 바얀테무르(공민왕: 왕전)를 고려국왕으로 봉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대칸 토곤테무르에게 충실하여 1354년 장군 톡토가 장사성 토벌에 나섰을 때 고려군을 참가시켰다. 고려군은 홍건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톡토가 해임되는 통에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대칸 토곤테무르의 제1황후 다나슈리-카툰은 장군 엘테무르의 딸로서 실권이 장군 바얀에게 넘어가자 독살되고 다음 황후인 바얀-쿠도크-카툰은 아들이 없었다. 여기서 고려인 기자오의 딸이 제2황후의 자리를 얻었으며 기황후(엘제이투-코톡토-카툰)가 낳은 왕자 아유슈리다라는 황태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기황후 일족은 대원-울루스에서도 고려에서도 절대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으며 특히 기황후의 형 기철(바얀-부카)의 권세는 공민왕을 웃돌았다. 그러자 기씨 일족과 요양, 심양왕 파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공민왕은 갑자기 기철과 그 일당을 살해하고 쌍성(함경남도 영흥)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고려군에 항복한 자 중에는 우루스-부카(이자춘)라는 여진인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이성계였다. 고려군은 그대로 북진하여 함흥, 홍원, 북청의 땅을 99년만에 탈환하였고 고려군의 별동대는 압록강을 건너 요양, 심양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공격하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홍건적이 일어나 이중 일부가 동방으로 향하여 동북아로 들어갔다. 이들은 1359년에 요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들어와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1361년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켰다. 또 1364년에는 기황후가 고려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 타스테무르를 고려국왕으로 세우고 요양, 심양의 고려인 부대를 이끌게 하여 압록강을 건넜으나 청천강 이북에서 고려 본국군에게 패퇴 당하였다.


고려의 몽골풍

고려는 1231년부터 몽골의 병화를 입고 특히 제24대 원종 이후 제 31대 공민왕에 이르는 약 100년간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 지배층을 중심으로 몽골풍속이 크게 유행하였다. 몽골은 고려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설치했고 여자들을 공녀로 뽑아갔다. 또한 많은 몽골병사들과 관리들이 고려에 와서 통치하고 몽골 여자를 고려의 왕비로 삼아 몽골풍속이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외국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하여 회동관, 영빈관, 회선관 등 외국인 전문의 객관도 마련되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만두이야기나 회회아비는 이러한 세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대표적인 몽골 풍속으로는 여자들의 머리에 올리는 족두리,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칼, 신부의 두 볼에 찍는 연지, 장사치, 시정아치, 그리고 벼슬아치 등 명사의 어미에 치를 붙이는 언어습관, 왕의 진지 상을 수라라고 부르는 것, 여자들이 다리를 넣어 머리를 땋는 것, 절따말, 가라말 같은 몽골식 말이름 등이 있다. 특히 몽골이 목마장을 직접 경영했던 제주도에는 결혼 습속이나 아기를 키울 때 쓰는 구덕(요람) 등 몽골 풍속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말의 사육에 관계되는 용어 중에는 몽골말과 비슷한 것이 많다.

어승생(좋은 물), 비바리(미래의 며느리란 뜻으로 처녀를 지칭), 한저(빨리), 냉바리(늙은 여자), 정랑(가축이 못 들어오도록 집 주위에 쳐놓은 막대기), 허벅(물항아리) 등의 말도 몽골 말이다. 또 단령(옛날의 공복)과 수화자(비올 때 신는 무관의 장화), 남자의 착수의(소매가 좁은 옷)와 홀태바지, 그리고 여자들이 귀뿌리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속 등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의 생활풍습도 몽골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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