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후계자들 - 팍스 몽골리카

시골농군 2009. 5. 19. 17:09


행정조직

몽골제국은 많은 울루스(소령)의 집합체였다. 이러한 사정은 대원-울루스에서도 같아서 원래 금나라 땅인 만주, 화북, 그리고 원래 남송 땅인 화중, 화남 등의 정주민 지역은 황족이나 장군들에게 나뉘어진 영지, 영민이 모자이크 형태로 있고 그 사이 이곳 저곳에 칸의 직할지가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많은 울루스를 경영하고 관리한 것은 중서성이란 관청으로서 몽골고원의 고비사막 이남과 화북의 산동, 산서, 하북을 관할하였다. 중서성의 직할지 이외의 지방은 중서성에서 파견된 행중서성이란 11개의 관청을 두어 각 지방의 정주민을 관리하였다. 영북(카라코룸), 요양(만주담당), 하남(개봉), 협서(서안), 사천(성도), 감숙(장액), 운남(곤명), 강절(항주), 강서(남창), 호광(무한), 정동(심양에 두어 고려, 제주도, 아무르강 하류지역을 담당)이 그것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행정체계를 중서성 예하 6부로 단순화 시켰다. 상서성은 상업에 투자하고 광산이나 공장을 경영하여 쿠빌라이 칸의 사재증식에 종사하였다. 선무사는 속민들의 모반을 평정하고 생산독려와 유통감시에 이르는 선무활동을 주관하였다. 군사행정은 추밀원이 관장하고 권력의 중앙집중 및 몽골인의 이익우선을 어사대가 담당하였다. 특히 어사대는 기본행정구역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3개 광역권으로 구분하여 중국일대의 복속권역을 순회하며, 한족 관리들과 지방토후 등에 대한 감사와 탄핵을 하였다.

대원-울루스 사회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신분사회였다. 몽골제국의 종주국인 대원-울루스의 지배에 놓인 민족의 수는 대단히 많았다. 이들 피 지배민족은 숫자도 많으려니와 몽골족에 비해 지식수준도 높았으므로 몽골족은 지배민족으로서 특별한 배려를 받았으며, 의식적인 민족차별정책과 함께 신분제도가 실시되었다. 민족별 신분은 4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몽골족, 색목인(위구르인, 이란인 등), 한족(옛 금나라 지배 아래 있었던 한족, 키탄족 등), 남인(옛 남송의 유민)이 그것이었다.

대원-울루스의 맨 위층은 황금씨족이나 그 혼족 집단이 차지했다. 그들은 국왕 또는 부마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몽골 본토 또는 중국내부에 봉토로 받은 넓은 유목지나 식읍을 가지고 최고의 세습적 특권을 누렸다. 다음으로는 몽골족 공신의 자손들이 주축을 이루는 특권 귀족영주층이 있었다. 이중에는 서아시아 제국의 왕손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러한 귀족층 아래에 일반 한족의 지식층 또는 무인층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나 하급군인으로 종사하였으나 남송을 합병한 후에는 그 땅의 통치를 위하여 각지에 파견되면서 중급관료나 무장으로 되었다.

이에 비하여 가장 늦게 정복된 남송의 유민들은 10명당 몽골인 1명을 섬기게 하는 갑장제, 일몰 이후의 통행금지, 회동금지와 상호밀고제 등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정권에 참여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무거운 세금과 끊임없는 부역 징발로 고통이 컸다. 몽골제국은 쿠빌라이 이래 대원-울루스를 종주국으로 한 연합왕국이었으며 이 연합왕국도 대원-울루스가 몽골고원으로 밀려난 후부터는 해체되었다.

몽골에서는 어떠한 정치행사나 의식이 있으면 반드시 군주, 왕족, 장군, 재상 모두가 연회를 열었다. 3일 내지 5일, 경우에 따라서는 1주일이나 연회가 계속되었다. 참가자는 지위와 신분에 따라 통일된 색과 디자인으로 된 연회복을 입었다. 색은 푸른색이 많고, 붉은색이나 갈색의 것도 있었다. 그리고 색은 같더라도 왕족이라면 타나라는 커다란 진주나 보옥을 많이 꿰어매고, 등에는 용무늬 자수가 수 놓여졌다.




실크로드

몽골제국의 광막한 영역을 뚫고 네 가닥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즉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그리고 초원루트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있었다. 13세기 실크로드의 가장 큰 특징은 초원루트와 천산북로가 사라이, 오트랄, 우르겐치를 중계기지로 하여 직접 키에프, 크라코우 또는 안티오키아, 베니스,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몽골은 실크로드 위에 얌(역전제)을 시행했기 때문에 동서교통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어져 몽골의 평화(팍스 몽골리카)가 시작되었다.

이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 서방으로 간 사람으로는 야율초재, 장춘진인, 상덕 등이 있었고, 서방에서 몽골로 온 여행가로는 카르피니, 베네딕트, 루브룩, 마리뇰리, 그리고 마르코-폴로 등이 있었다. 야율초재는 1219년 칭기스칸의 서정에 동행하였다. 그는 알타이산을 넘어 베슈발릭으로 나와 여기에서 천산북로를 따라 알마릭, 이리계곡, 탈라스를 지나 오트랄에 이르고 여기에서 사마르칸드, 부하라, 우르겐치, 발흐에 도달하였다. 장춘진인은 칭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사마르칸드에 도착한 후 다시 남하하여 힌두쿠쉬 산맥의 남록에서 그를 만났다. 또 훌레그 진영에 파견된 상덕 역시 알마릭 등 여러 성을 지나 천산북로를 서행하였다.

마르코-폴로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니콜로-폴로와 숙부 마페오-폴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지나 타브리즈에 이르고, 다시 케르만, 발흐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남도로 나와 감숙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후 영하에서 이전의 탕구트를 횡단하여 상도에 도착하여 중국에 체재한 지 16년이 지난 때 왕녀 코나친을 일칸국에 보내는 데 수행하였다. 복건의 천주에서 1000-1100톤 규모의 14척의 정크선을 타고 출범하여 베트남 남부의 참파, 말라카 해협, 니코발제도, 안다만제도, 실론섬, 인도서해안, 인도북서부의 구자라트 지방을 거쳐 2년 반 가까이 대 항해한 후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다.

독특한 유라시아 문명은 오랫동안 내륙 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주요 교통 수단이던 낙타 한 마리가 실을 수 있는 짐은 270 kg 정도여서, 낙타들을 거느린 대상이 나를수 있는 짐의 양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찌는 듯한 사막을 통과해 가려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그래서 수송 가격이 비쌌고 대부분의 수송 상품 또한 비쌀 수밖에 없었다.




바다의 교역

8세기 후반, 그때까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유라시아 해역이 이슬람상인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슬람상인이 항해에 이용한 범선인 다우선은 널빤지에 구멍을 뚫어 야자 섬유로 만든 끈으로 꿰 맞춘 다음 나무못을 선체에 박고,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이나 고래기름을 바른 봉합선이었다. 그리고 역풍에도 전진할 수 있는 삼각 돛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계절풍이나 별자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살려서 아프리카 동해안, 홍해, 페르시아만,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연안을 연결하는 교역망을 확립해 갔다. 이슬람 상선의 목적지였던 광주에는 이슬람 상인을 비롯한 외국 상인이 거주하는 대규모 거류지나 모스크가 만들어졌다.

이슬람 상인의 항로는 광주를 지나 중국 연해를 따라 북상한다. 복건성의 천주, 양자강 하구의 상업 도시인 양주에도 거류지가 만들어지면서, 왜국이나 신라에 대한정보도 이슬람세계에 전해졌다. 이슬람상인이 교역에 이용한 다우선은 가장 큰 것이 300톤이었는데, 적재량은 180톤이었다. 한척의 다우선이 600마리의 낙타가 짐을 싣고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맞먹는 상품을 수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가 되면서 중국상인의 활발한 교역활동이 남지나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2세기가 되면 이들의 교역범위는 말라카 해협을 넘어 인도양에까지 미치게 되고, 동의 정크교역권과 서의 다우교역권이 공생하게 되었다. 정크선의 재료로 이용된 것은 소나무, 삼나무들이며, 이중-삼중으로 측판이 덧붙여졌으며, 동유와 석회로 틈새를 메워 누수를 방지했다. 선창은 열 개 정도의 튼튼한 격벽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선창에 물이 스며들더라도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 격벽은 둘레의 선판을 지탱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원양 정크선은 큰집과 같고, 돛은 구름과 같으며, 커다란 것은 300톤에 500-600명의 선원이 탈 수 있으며, 중간 것은 60-120톤에 200-300명의 승선이 가능하였다.

송나라 때 해외에 수출된 상품은 170여 품목으로 견직물이나 금-은을 비롯한 광산품 외에 새로 도자기와 동전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도자기는 송나라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수출품이 되고, 해상 네트워크의 주력상품이 되었다. 또 질 좋은 남송 동전은 대량으로 아시아 각지에 수출되어 정크 교역권에서 세계통화가 되었다. 중국과 페르시아만을 잇는 바다의 간선루트는 대원-울루스와 일칸국의 보호아래 더욱 발전하였다. 대원-울루스의 최대 항구도시 천주에서 화물의 10%를 세금으로 징수한 화물은 타 지역에서 징세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들어온 보석과 진주와 값비싼 상품이 먼저 천주에서 부려지고, 이어서 만자(남송지역)의 각처로 보내졌다. 천주에는 1만 5000척의 해선이 수송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만과 동아프리카까지 항로가 뻗어 있었다.


오르톡

유라시아에서 최대의 부를 가진 중국을 제압한 대원-울루스는 내륙통상에서 활약한 소그드상인의 전통과 혈맥을 계승한 이란계 무슬림 세력과 정치, 경제, 문화, 행정의 전반에 걸쳐 몽골의 교사였던 천산 위구르상업세력을 이용하여 경제와 유통을 정부가 관리하려 하였다. 대원-울루스의 재무, 경제관료는 자본규모가 제일 컸던 이란계 무슬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천산지방의 위구르가 이에 준하고, 여진족, 한족 등의 경리에 밝은 자가 하급관료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대원-울루스 정부의 인허가 행정에 이들 상업세력 오르톡(동료조합)을 끌어들이고 비호해 주었다. 인가된 오르톡은 몽골이 유지, 관리하는 육로, 수로, 해로의 운수, 교통, 숙박기관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대원-울루스의 경제정책, 경영전략이 오르톡과 하나가 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무슬림인 해양기업가와도 연결되었다. 원래 세제에 있어서는 화북지구에서는 세량(현물납에 의한 전토세)과 과차(비단실과 은)의 2가지 과세체계를 두었으며, 강남에서는 남송 이래로 행해져온 하세(여름에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입하는 것)와 추량(가을에 내는 전토세)이라는 징세체계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대원-울루스의 중앙재정은 한정된 농산물의 세수에서 벗어나 전매와 통상의 상업이윤으로 세입의 8-9할을 거두었다. 최대수입원은 염인 즉 전매품이된 소금교환권의 판매대금이었다. 소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연결된 유가증권 염인을 중앙정부가 만들어 기축통화인 은과 연결시켰다. 제국의 확대로 팽창하는 통화수요에 대응시킬 만큼 은이 많지 않았으므로 소금 염인은 보조통화가 되었다.

간접세인 상세의 세율은 30분의 1을 원칙으로 하였다. 쿠빌라이 정권은 각 도시, 항만, 나루터,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과세를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물품의 판매 세는 마지막 매각 지에서 한번만 지불하게 하였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상세의 납입도 은이나 염인으로 이루어졌다. 은은 매년 정월의 정례 사여를 비롯하여,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들이 갖가지 명목의 경제지원을 통해 제실 일족을 자신들의 정권에 연결해 두는 수단이 되었다.

은을 대량으로 사여받은 몽골왕족들은 그것을 단골 오르톡에게 대여하였고 오르톡들은 그 자금을 모아서 거대한 자본을 만들어 각종 상업활동을 조직하고, 제국 각지로 확대하여 물자를 돌게 하였다. 왕족들과 각지의 크고 작은 궁정이 자본가가 되고 그 정점에 대칸이 있었다. 몽골국가는 은과 오르톡을 통하여 거대한 경제, 금융조직으로 변한 것이다.


종교

중국땅에 대원-울루스를 건설한 몽골인들은 자유로운 선교는 허용하였으나 교리논쟁과 상호비방을 엄금하여 신앙생활과 상업활동의 공평한 기회를 보장받았다. 몽골은 종교활동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중서성 아래에 티베트 라마승들이 주류를 이루는 선정원을 설치하여 중국불교의 정치성향 및 집단화를 감시, 견제하였다. 제국 선정원의 초대 책임자로는 라마승 팍파가 지명되었다.

팍파는 대칸 쿠빌라이를 불교의 천상 대황제인 차크라바르틴의 황통 서열에 끼워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지배를 위한 불교적 정교일체론을 만들어 라마불교를 대원-울루스의 국교로 만들었다. 이후 쿠빌라이를 비롯한 역대 황제 및 왕족들은 사원의 건축 또는 대법회에 많은 재물을 바쳤다. 팍파는 문자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위구르 문자를 쓰는 몽골인들에게 이 문자는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그는 방대한 티베트 세속정부의 통치자로서도 일하여 1260년대의 인구조사와 징세도 대신 행하였으며 얌치도 세웠다.


운남의 풍토병 페스트

몽골제국이 지배하는 유라시아에서 인구를 격감시킨 돌림병이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본래 운남지방의 고유한 풍토병이었다. 운남 지방을 지배한 몽골인들의 말안장에 페스트균을 보유한 벼룩이 기어 들어가 초원 지대로 나오게 되었고, 14세기 전반에 몽골제국의 대교역망을 통해 중국, 동유럽, 이집트, 서유럽에 퍼져 급격한 인구감소와 사회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이집트 맘룩왕조에서는 1347년 페스트가 번져 전인구의 1/3이 사망한 결과 이집트 경제가 한꺼번에 쇠퇴하였다. 서유럽에서는 1348년 이탈리아 반도에서 인구가 밀집하고 위생상태가 나쁜 도시를 중심으로 크게 번졌다. 당시 피렌체의 인구가 11만 명에서 4만 5000명으로, 취리히의 인구가 1만 2375명에서 5500명으로 감소했다. 페스트는 도시에서 도시로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쥐가 꼬이기 쉬운 물방앗간을 중심으로 주변 농촌으로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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