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락 대 아바카
1270년, 차가타이 가의 바락이 훌레그-울루스를 흡수한다고 하자 중앙아시아 각지의 유목세력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란의 부가 그들에게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바락은 이들을 이끌고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였다. 당시 훌레그-울루스를 이끄는 사람은 훌레그의 큰아들 아바카였다. 훌레그-울루스의 군대는 본대 3만에, 옛 아제르바이잔이나 아프가니스탄 주둔부대를 합친 것이 전부였다. 바락군은 이보다 2배의 대 군단이었다.
아바카는 맞아 싸우기로 하고 서북 이란의 본거지에서 동방 코라산으로 향하였다. 헤라트 부근에 도착한 그는 군대가 무너져 도망했다고 생각하도록 진영을 부수고 천막, 식량, 병기구 귀중품 등을 널려 놓았다. 바락군 장병들은 흩어져 나뒹구는 귀중품, 군수물자를 보고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며, 미리부터 승리의 잔치를 벌였다. 다음날 이들은 술에 취한채로 제각기 아바카군의 추격에 나섰다. 헤라트에서 이틀거리의 평원에 카라수(검은물) 강이 있는 평원에서 아바카는 바락군을 기다렸다.
돌연 아바카군을 만난 바락군은 서둘러 대열을 정비하였다. 바락군의 잘라이르타이는 휘하의 몽골병을 이끌고 아바카군의 좌익에 배치된 약한 이란병 혼성부대를 쳤다. 무너진 좌익에 아바카는 동생인 요쉬무드가 이끄는 정예를 보내 잘라이르타이의 맹공을 막아냈다. 이때 아바카군 장병들은 손에 든 활, 화살을 칼과 창으로 바꾸어들고 전군을 공격대형으로 바꾸었다. 세 차례에 걸쳐 정면전을 반복한 뒤 바락군은 부대별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한 훌레그-울루스는 이제 확고해졌다.
바락은 간신히 부하라에 다다랐으나 차가타이가의 왕족, 제장은 그를 버리고 오고데이 가의 카이두에게 가버렸으며 카이두는 그를 살해함으로서 차가타이가는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서로 싸웠다. 이들은 무바락샤, 아루그의 아들 카반, 추베이형제, 그리고 바락의 아들 벡테무르, 두아, 부즈마, 프라다이 등이었다. 카이두는 차가타이가에 세력을 확립하여 차가타이가의 칸을 임명함과 함께 동맹노선을 강화시켰다. 중앙아시아는 카이두의 오고데이 일문과 그 아래에서 협력하는 두아의 차가다이가가 성립하였다. 이 두 세력의 연대는 이후 거의 20년간 계속되었다. 1251년 몽케 등극으로 양가에 대한 대 탄압 이후 실로 30여년 만에 중앙아시아는 안정을 찾게 된 것이다.
카이두-울루스
한편 1271년 쿠빌라이는 넷째아들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중앙아시아개입을 지시하였다. 노무간은 최강의 몽골기병을 이끌고 차가타이가의 본거지인 알마릭에 진주하여 복잡하게 뒤섞인 오고데이, 차가타이 등 여러 파를 위압하였다. 이란의 코라산에는 아바카가 쿠빌라이와 공동보조를 취하였다. 그러나 남송을 접수한 1276년 노무간 진영에 있던 몽케의 아들 시리기, 아릭부케의 아들 요부쿠르와 멜릭테무르가 진중 쿠데타를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아 주치가의 뭉케테무르한테 보내고, 부장인 잘라이르 국왕가의 안톤은 카이두에게 보냈다. 이로서 중앙아시아를 제압하고있던 노무간의 대원-울루스군은 무너졌다.
안톤은 책사 바아토르의 유복자로 어머니 쪽으로 쿠빌라이의 조카이며 노무간에게는 사촌이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적자 3명의 기용과 동시에 이 안톤을 신료가운데 최고인 우승상으로 중앙정부의 수반에 앉힌 후 이 사변의 전년에 노무간의 부장으로 합류하게 하였었다. 반란군들은 쿠빌라이를 뺀 톨루이가 만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카이두도 뭉케테무르도 정세의 흐름만을 지켜보았다. 이렇다할 통솔자가 없는 톨루이의 여러 파벌에 장래가 불투명하였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 후 급히 상도에 온 장군 바얀(바아린씨족)을 즉각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그 휘하의 주력부대도 북으로 급파했다. 그 결과 강남에는 부대가 거의 없었지만 강남은 스스로 안정되었다. 바얀은 요충지인 카라코룸 확보를 위하여 여러 군대를 같은 방면으로 진군시켜 서쪽에서 온 시리기 등 반란군을 오르콘 강변에서 차례로 격파하였다. 몽골고원 제압에 실패한 시리기 등은 저절로 무너졌다. 그러나 아릭부케의 아들들이나 시리기의 아들 우루스부카 등 잔당들이 카이두측에 합류해버려 카이두의 세력은 알타이 방면으로 더욱 확대되었으며 대원-울루스에 의한 중앙아시아 지배는 끝나게 되었다.
몽골제국은 농경지대를 지배하는 대원-울루스와 훌레그-울루스 그리고 오고데이, 차가타이, 그리고 킵착칸국이란 초원의 울루스로 양분되었다. 쿠빌라이는 서북은 알타이 산에서 항가이산, 남으로 내려와서는 황하에서 에치나천 그리고 감숙변경에 이르는 반 카이두, 두아, 아릭부케 방위선을 구축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는 카이두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났다. 카이두의 나라는 중앙아시아를 하나로 묶은 최초의 몽골국가였다.
동방3왕가의 반란
1278년 테무게-옷치긴 왕가의 최 전성기를 이룩한 타가찰이 사망하고 그의 손자 나얀이 뒤를 이었다. 시리기의 난 이후 카이두의 세력이 알타이에서 항가이 지방으로 크게 동진하자 쿠빌라이는 자신의 일족 이외의 여러 왕에 대하여 서서히 엄하게 죄었다. 지금까지 일본정벌을 위하여 목재를 벌채하여 조선사업을 하고 여진족을 징용하는 등 동방 3왕가 세력과 요녕방면의 쿠빌라이 파견기관과의 사이에는 분쟁이 많았는데 1285년에는 요양에 동경행성이라는 정식지방관청을 두자 나얀등 동방 3왕가는 흥안령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나얀의 대부대는 자신의 세력권 남쪽경계인 시라무렌까지 진출하였다.
반란군에는 카사르가의 시쿠돌, 카치운가의 싱라카르란 여러 동생가문의 장에다가 쿨겐(칭기스칸의 서자)의 일족인 에프겐, 오고데이의 아들 쿠덴의 일족도 가담하고 있었다. 또 나얀은 서방의 카이두에게 양면에서 공격할 것을 수락 받았다. 나얀의 군사행동을 들은 쿠빌라이는 급거 상도주변의 군단을 소집하여 코끼리를 타고 상도를 출발하였다. 동방 3왕가의 전통유목군단에 대하여 쿠빌라이군은 수도주변군 만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결전은 부이르노르 남쪽에 있는 초원에서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시라무렌에 진영을 설치한 나얀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쿠빌라이군과 나얀군의 무장들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라 말 등에서 인사를 나눌 뿐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코끼리에 타고 돌격하였으나 빗발치는 화살 때문에 뒤로 밀렸다. 이때 킵착, 아스, 그리고 캉글리 등으로 이루어진 특수친위군단이 쿠빌라이의 뒤를 따랐다.
원래 이들은 시베리아 오비강 상류의 알타이산지에서 내려온 투르크어를 말하는 유목민으로 11세기초에 카자흐스탄 초원을 통하여 서방으로 이동하여, 11세기말에는 북 코카서스, 우크라이나를 지나 도나우강에 이르는 넓은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원정군에 참가했던 몽케는 이들 중 한 무리를 몽골고원으로 데려와 대칸의 일상생활에 봉사하는 응장(시바구치), 검은쿠미스만들기(카라치), 발걸음빠른사람(구육치)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유사시에는 기동부대로 되었다. 이들은 이슬람세계의 맘룩(투르크계 노예군인)과 같아서 쿠빌라이의 운남 원정에도 종군하고, 아릭부케와도 용감하게 싸웠다. 이들은 노예신분이었으므로 대칸 이외는 누구에게도 활과 칼을 겨누었던 것이다.
싸움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여 밤까지 계속되었고 양군 모두 막대한 전사자가 생겼다. 마침내 쿠빌라이측이 우세하자 나얀군은 곧 항복하였다. 지도자 나얀은 포박되어 양탄자에 똘똘 말려 살해되었으며 나얀군은 해체되었다. 본군이 궤멸하자 동방3왕가의 반란군은 속속 항복하였으나 카치운가 방류인 카다안 만은 도전을 계속하였다. 카다안은 북만주에서 한반도로 난입하여 4년간 소동을 피웠지만 결국 압록강 부근에서 소멸되었다. 나얀의 반란으로 칭기스칸의 동생 테무게-옷치긴의 만주지방은 요양행성의 관할로 되었다. 나얀과 호응하던 카이두도 다음해 쿠빌라이 자신이 카라코룸 방면으로 진격하자 돌아갔으나 이곳에서는 카이두가 우세하였다.
대칸 테무르(성종)
대원-울루스에서 황태자 칭김은 대칸 쿠빌라이를 대신하여 모든 국정을 결재하였으며 1284년에는 몽골군의 최정예 부대인 잘라이르, 우르우트, 망구트 등의 5투하(직할령)를 황태자의 친위군으로 만들었으나 1285년 급사하였다. 그는 코코진-카툰과의 사이에 카마라, 다르마바라, 테무르라는 3명의 아들을 두었었는데 다르마바라는 1292년 죽었으므로 카마라와 테무르만 남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1293년 장군 바얀을 몽골고원에서 소환하고 황손 테무르에게 칭김의 유물인 황태자의 옥새를 주어 몽골고원 방위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바얀이 대도에 도착한 1294년 쿠빌라이는 병이 들어 사망하였으나 대원-울루스는 쿠빌라이 치세 30년동안 탄탄해졌다.
그해 여름 상도에서 칸위의 계승자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다. 후보자는 카마라와 테무르 두 사람이었다. 코코진-카툰은 이렇게 말하였다. "세첸칸(쿠빌라이)은 이미 누구라도 칭기스칸의 빌릭(훈계)을 가장 잘 지키는 자가 즉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각각 빌릭을 암송하여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쪽이 잘 알고있는가를 보여 주십시오.". 테무르는 빌릭을 낭낭하게 암송하였으나 카마라는 매우 더듬거렸다. 몽골고원 방위군 바얀도 테무르의 즉위를 지지하였으므로 코코진-카툰은 옥새를 테무르에게 주었다.
카이두-울루스는 쿠빌라이 체제에 따돌림당한 사람들의 피난장소였는데 이제 쿠빌라이가 없어지자 이들은 유목 생활을 하는 카이두에 싫증을 냈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도 이미 90년 정도 흘러 왕족, 족장, 신료, 장군들이 도시귀족화와 사치생활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칸 테무르(성종)의 즉위 3년 뒤인 1297년, 아릭부케가의 유력자인 요부쿠르, 몽케의 손자인 울루스부카, 그리고 쿠빌라이 제1장관 두르두가가 1만2천의 기병과 함께 대원-울루스로 돌아왔다. 위기를 느낀 카이두는 오고데이가와 차가타이가의 지도자인 두아, 잔류한 아릭부케가의 지도자 멜릭-테무르와 함께 전 병력을 동원하여 몽골고원으로 진격하였다.
카라코룸 방면에는 대칸 테무르의 친형 카말라와 그 맏아들 이순테무르가 북방의 전통 천호군을 이끌고 있었지만 대칸 테무르는 안서왕 아난다와 조카 카이샨에게 중앙군단 중 최고의 정예부대가 된 노예군단을 주어 알타이 방면의 최전선에 배치시켰다. 몽골고원의 서부에서 알타이까지 사상 최대규모의 전투가 펼쳐졌다. 몽골기마 정예들의 싸움이었다. 전선은 크고 넓어 각지에서 격투가 전개되었다. 진왕 카말라와 이순테무르부자의 부대는 카이두군에 둘러싸여 패했으나 카이샨은 진두에 서서 열세를 뒤집었다. 몇 차례의 백병전 뒤 차가타이가의 두아는 무릎에 화살을 맞아 서쪽으로 철수하고, 카이두 자신도 몽골고원의 도시 카라코룸과 타밀강 사이의 전투에서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카이두가 없어지자 오랜동안 카이두 아래에서 2인자로 지내고있던 두아가 카이두의 장례식을 치루고 카이두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한 오로스를 무시하고 인망이 없고 어리석은 서장자 차바르를 우두머리로 삼아 오고데이가의 결속에 쐐기를 박았다. 오고데이 일문은 내분상태에 빠졌다. 두아는 차바르와 상의하여 대칸인 테무르에게 강화를 신청하였다. 대칸 테무르는 이것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전 몽골제국이 대원-울루스의 칸을 대칸으로 받들게 되었다.
1305년, 완전 화평을 알리는 사절단이 대칸 정부에서 파견되었다. 가는 도중 대원-울루스 치하에 있던 추베이의 동방차가다이가나 중앙아시아 두아의 서방차가다이가, 차바르의 서방오고데이가 등의 사자도 합류하여 주치-울루스의 톡타, 훌레그-울루스의 올제이투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제국전체가 이를 환영하였다. 몽케 급서 때부터 그리고 바락의 등장 이후 계속해서 내륙초원을 무대로 한 제국의 소란은 가라앉았다. 원래 이 싸움은 농경지역을 가진 대원-울루스 및 일칸국과 유목지대를 본거지로 전통생활을 꾸려가는 여러 작은 울루스와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화의를 맺게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은 부활되었다.
카이두-울루스는 차가타이의 두아가와 대원-울루스군에 의해 동, 서에서 협공 당하여 사라지고 중앙아시아는 대원-울루스 밑에 두아일족의 차가타이-울루스가 성립되었다. 대원-울루스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이 되었고 킵착칸국, 차가타이-울루스, 일칸국 등 3칸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거의 60년간 유라시아대륙은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