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모의 시대
제국은 통일 쿠릴타이가 열리면 오고데이 타계로 시작된 장기간의 혼란과 대립, 분란을 거쳐, 다시 의논에 의한 몽골공동체의 운영과 안녕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제국 서반의 3인이 1년 사이에 모두 죽었다. 먼저 1265년 훌레그가 돌연 타계하였다. 베르케는 훌레그-울루스의 혼란을 틈타려 급히 남하하여 훌레그의 서장자 아바카와 대치하던 중 병사하였다. 아루그 또한 병사하였다.
차가타이, 주치, 그리고 훌레그-울루스가 새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제국의 동서를 연결하는 중앙아시아가 소란해졌다. 중앙아시아의 혼란으로 쿠빌라이의 지령하에 제국전체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훌레그-울루스와 주치-울루스 간의 대립을 조정할 수 없게 되었다. 훌레그 휘하의 주치가 군대는 서쪽으로 도망쳐 맘룩조에 몸을 의탁하였다. 술탄 바이바르스는 해상루트로 주치-울루스와 교섭하였다. 이 해상루트란 지중해에서 에게해, 다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마르마라해로 들어가, 거기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뚫고 흑해로 그리고 아조브해를 향하는 것이었다. 이 바다로부터 육지로 거슬러 올라가 동쪽으로 가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볼가 유역에 도달하였다.
바이바르스와 맘룩전사의 대부분은 원래 킵착초원 출신이었다. 그 땅의 젊은이들은 중동에 팔려 거기서 맘룩(노예군)으로 되었다. 급속하게 투르크화, 킵착화한 주치울루스와 이집트의 맘룩조는 형제 국이라 할만하였다. 여기서 훌레그-울루스를 적으로 하는 볼가와 나일의 남북동맹이 성립되었다. 이제 몽골이 힘으로 밀어부쳐 지배하는 공포의 시대는 끝나고 정치, 통상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제국
지금까지 몽골의 권력 중추는 몽골고원 중앙부에 있었으며 좌우 양익에 일족 울루스 천호군이 균형을 유지하였다. 몽골연합체의 핵심은 칭기스칸이래 고원에 전개한 몽골 천호집단으로 쿠빌라이도 이를 장악함으로서 대칸이 될 수 있었으나 권력기반은 동방 3왕가와 5투하의 좌익군으로 쿠빌라이 정권은 동방으로 기운 정권이었다. 더욱이 서북유라시아의 주치-울루스, 서아시아의 훌레그-울루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었으며 이외에도 여러 인종, 사람들로 된 크고 작은 지역정권, 재래왕조, 재지세력이 섞여 몽골제국은 국가연합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칭기스칸 시대와같은 모습은 희미해져 갔으며 오고데이 시대와같이 몽골고원에서 제국의 동서를 도맡아 처리하기에도 내용이나 체질이 크게 바뀌었다.
칭기스칸의 금나라 출병이래 반세기정도 계속된 몽골에 의한 경이의 군사확대는 1260년을 고비로 큰 국가 틀을 이루었으며 몽골고원과 북중국은 쿠빌라이에 의하여 해양까지 뻗게 되었으며 이슬람 중동세계는 몽골의 이란과 맘룩의 아라비아로 고정되었다. 카간 쿠빌라이는 몽골 기마 군단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몽골의 이름아래 재편성하여 군사를 체계화한 후 당시 최대의 부와 생산력을 간직한 중화 경제력을 손에 넣어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물류 체계를 만들려 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근거지인 개평부를 상도로 고쳐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상도로 옮기고 화북경영의 거점도시인 중도를 또 하나의 도읍으로 삼았다. 이 두개의 도읍주변의 영역을 수도권으로 하여 여름과 겨울에 계절 이동하는 권력이 되었다. 군사와 통치와 경제 등을 동시에 겸비한 다기능의 수도권을 만든 것이다. 쿠빌라이는 이러한 유목민의 계절이동 생활양식과 통치를 위한 정치체제를 동시에 조직한 방식을 크고작은 왕가집단과 귀족집단에게도 채용하게 하여 몽골고원과 만주지역, 화북평원, 그리고 일부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지대 전체가 계절 이동하는 작은 정부들로 채워졌다.
이와 병행해서 쿠빌라이는 이미 성년이 되어 있던 자식들을 군사적 지배를 위하여 부왕으로 기용하였다. 쿠빌라이는 12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그중 4명은 콩기라트씨족출신의 차부이-카툰이 낳았다. 4명의 적자가운데 장자인 도르지는 일찍 죽었으므로 사실상의 장자가 되어 있던 칭김은 처음에는 연왕으로 봉하여 중서성과 추밀원의 감독권을 주고 이어서 1273년에는 차부이-카툰에게 황후의 칭호를 칭김에게는 황태자의 칭호를 주어 화북지역의 서정을 위임받았다. 칭김은 쿠빌라이의 품안에서 황제권의 일부를 보좌하는 형태가 되었다.
셋째아들 망갈라는 안서왕이 되어 쿠빌라이 즉위 이전의 옛 영지였던 섬서의 경조-육반산지역을 받았다. 그는 경조를 겨울수도, 육반산고원 위에 새로 조영한 개성을 여름수도로 하여 섬서, 감숙, 청해, 사천 등 서쪽방면 전체의 총괄인물이 되었다. 또 넷째 아들 노무간은 북평왕의 왕호를 받아 몽골본토에 해당하는 고비 이북의 고원과 그 곳에 산재한 전통 천호군의 장이 되었다. 그는 옛 수도 카라코룸과 그 주변지역을 자신의 주유지로 하여 이전의 오고데이처럼 계절이동을 하였다.
각 담당지역 안에 있는 기존세력은 이들 3명의 조직아래 편입되고 재편되어 쿠빌라이 왕조의 기본골격이 되었다. 그밖에 쿠빌라이의 서자인 오크룩치는 서평왕으로서 티베트방면을 전적으로 관리하고 마찬가지로 서자인 후게치는 운남왕이 되어 운남, 대리방면을 담당하였다. 3대왕국을 보조하는 2소왕 이었다. 카간 쿠빌라이는 이러한 군사대권의 분할화, 계통화위에 행정, 경제운영의 중앙화로 제국을 통제하였다.
대도
금나라가 만든 중도는 세계제국 몽골의 수도로는 좁았으며 1221년 큰 화재를 입어 이전의 모습마저 잃고 있었다. 1266년말 쿠빌라이는 중도 동북쪽 교외에 거대한 수도를 만들기로 하였다. 대도는 유병충이 설계한 것으로 이상적인 중화식 도성이 되었다. 대도의 남쪽 정문인 여정문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대궐 안의 여러 궁전의 큰 지붕과 기와가 황금색으로 비쳐져 일직선으로 겹쳐진다. 시각상의 배려 이외에 갖가지 신기술을 이용하여 대도는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도성 중앙에 있는 2개의 교차점 위에는 처음으로 고루와 종루가 세워졌으며 힌두, 티베트양식의 사원과 고루가 하늘을 뚫고 서 있었다. 대도는 쿠빌라이의 지배와 제위를 상징하는 기념물이었다.
대도는 바다와 연결된 항구가 있는 도시로 설계되었다. 도시내항은 커다란 호수 적수담으로 통혜하를 통하여 통주에 이르고 통주부터는 백하를 따라 바다쪽 항구인 직고에 이른다. 직고부터는 남중국의 여러 도시, 나아가서는 해상항로와도 연결되었다. 적수담의 동북안 일대는 관영 바자르 (시장) 혹은 경제관계 관청이 늘어선 경제특구였다. 까마득히 먼 파도를 헤치고 직고에 이른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상품, 물자는 하선에 옮겨 실려져 운하를 거슬러 올라 적수담에서 육지로 옮겨졌다.
거대한 인공도시 대도에서는 제국 전토를 향하여 방사상으로 뻗은 역전망(얌)을 정비하였다. 여름수도인 상도와의 사이에는 4개의 간선도로가 부설되고, 그 상도에는 이미 카라코룸에 집중되었던 내륙의 역전망이 연결되어 내륙교통망의 기점이 되었다. 육로를 통한 물자는 여기에 모였다. 화북의 운하체제도 통주에 모여지도록 다시 다듬어지고, 남송을 합한 후에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부활되었다. 대도는 내륙교통에서는 상도와 카라코룸을, 수운체계에서는 통주를 그리고 해운체계에서는 직고(천진)를 각각 외항으로 활용하였다.
쿠빌라이는 국가건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1271년 11월, 새 제국을 대원 즉 위대한 텡그리의 나라로 이름 지었다. 쿠빌라이는 친히 제국을 위대한 하늘의 나라로서 그 하늘이 덮은 땅의 중심을 대도로 하고 하늘이 관리하는 시간의 운행을 지원이라 하였다. 역대의 중화왕조는 그 이름을 모두 그 왕조의 발상지나 지명에서 채용하였으나 대원의 경우 지명이 아닌 추상적 개념이었다.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기 위해 몽골고원을 장악하여 카간이 되었지만 무한한 부의 생산지 중국의 관료체제를 따라 황제가 되었다. 대원-울루스는 중국왕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정복왕조도 아니었다.
이단의 반란
1262년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을 회복하고, 일리계곡으로 물러난 아릭부케군을 추격하려 하고 있었는데 익도 출신의 한인군벌 이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는 아릭부케 전선 쪽에 주력인 몽골 기마군단을 향하게 한 상태에서, 이단작전의 전선총사령관으로 카프추가 임명되었으며 부장에는 우량카다이의 아들 아주를 배속시킨 후 독전부대로서 기병 1천으로 작전본부를 구성하였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단군대만을 고립시켜 한인 재지세력의 호응을 막으면 이단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이단은 함선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8년전의 고향인 북쪽의 익도로 돌아와 현지병사들을 모으려 하였다. 그런데 주민들은 산으로 도망가 버리거나 성곽을 굳게 닫은 채 호응하려 하지 않았다. 지지자가 없자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의 이단은 요충지인 한인군벌 장굉의 제남을 급습하여 그곳에 틀어박혔다. 쿠빌라이군은 제남성 주위에 목책과 참호를 1개월 여 만에 완성하여 이단군을 봉쇄해 버렸다. 더욱 산동전역에 널찍이 몇 겹이나 방어선과 경계선을 벌이고, 요충지에는 반드시 대부대를 배치하였다. 남송은 양회제치사의 대부대를 북진시켰으나 쿠빌라이 측의 포진이 강력하자 군사를 되돌리고 말았다. 이러자 농성군은 차례차례 제남성 밖으로 도망치고 이단은 포박되어 참형 당하였다.
쿠빌라이는 오고데이 이래 약 30년, 화북을 직접 지배해온 한인군벌들을 옮기려 하였다. 우선 군벌이 맡고있던 군사권과 행정권을 나누어 행정권을 쿠빌라이에게 반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벌일족에게 각각 군직, 민직, 또는 쿠빌라이 측근의 케식텐(친위대)을 원하는지 물어 다른 곳에서 복무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군사집단을 유지하려 한 자들은 남송전선에 해당하는 황하 이남의 하남, 회북, 혹은 사천으로 이전시켜 전선주둔군으로 배치하였다. 지위는 세습되었으므로 개인수준의 불만은 적었다. 이 조치로 대량의 세습 군관, 세습 문관이 생기고 토착군벌은 없어졌다. 원주지에는 옛 군벌에서 행정직을 희망한 자가 부임하였다. 쿠빌라이는 봉건 토착제후의 할거상태를 중앙집권체제로 크게 바꾼 것이다. 이로서 화북은 몽골 본토화 하였다.
몽한 혼성군
아릭부케의 투항과 이단의 자멸 후인 1267년 두개의 과제, 중앙아시아와 남송이 떠올랐다. 중앙아시아 전장은 대개 초원으로서 쿠빌라이는 초원의 전투에는 초원을 뿌리로 한 군대를 동원하였다. 쿠빌라이는 중앙아시아에 북평왕 노무간을 총 사령관으로 하여 각 왕족, 족장, 그리고 몽골본토에서 전개한 전통의 천호집단으로 된 몽골기마군을 투입했다. 또 킵착, 아스, 캉글리, 탕구트 등의 여러 군단도 동원하였다. 이들은 쿠빌라이가 병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대칸 직속 친위군으로 만든 자들로 지위는 낮았지만, 전투의욕과 충성심으로 가득찬 기동부대였다. 이에 덧붙여 군사거점이나 병참기지 등 요지의 방어, 확보를 위하여 북중국의 한인부대도 이용하였다. 그 중에는 축성, 둔전을 위한 부대도 있었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지도 이미 30년 이상 되었다. 그 동안 남송 작전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유라시아에서 최대의 부를 가진 남송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싶었다. 그런데 강남은 양자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과 호수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몽골이 지금까지 공략에 성공한 건조지대와는 달리 물과 습기와 무더위가 심한 곳이었다. 남송은 몽골로서는 가장 공략하고 싶은 지역이면서도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원래 말은 추위에는 강하지만 더위에는 약했다. 대칸 몽케처럼 몽골기병군단만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쿠빌라이는 몽골기병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화북 각지의 군벌들이 전부터 양성해 온 사병들을 쿠빌라이 정권의 통제아래 조직화하려 하였다. 여기에 몽골한군이라는 특수군단을 덧붙였다. 이 군단은 원래 무칼리왕국의 화북경영 때 편성되어 화북과 그 주변지역에 주둔하던 군사였다. 몽골한군은 극히 소수의 몽골기병이 중심이 되어 키타이, 여진, 한족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 혼성부대로서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대는 창설된 지 30년에서 50년이 지나 몽골군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 주위에 옛 한인군벌들의 보병군단을 더하여 삼중구조의 복합군단을 만들었다. 강남의 자연조건을 명목으로 순수 몽골세력의 참전을 회피하면 그들에게 영지를 분배할 필요도 없었다. 쿠빌라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과 인구를 가진 남송을 통째로 가지려 하였다.
포위작전
쿠빌라이의 일차 목표는 한수 중류의 요충 양양과 번성이었다. 개봉을 병참기지로 하여 보급망이 조성되었다.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경제부문은 이란계 무슬림을 장으로, 유대교도나 네스토리안이 담당했다. 1268년 9월, 아주를 주장으로 하고, 한인부대 총괄의 사천택을 부장으로하는 원정부대 10만이 출발하였다. 이 몽골군은 우선 한수좌안의 번성을 포위했다. 남송측도 이 두도시를 국토방어의 전선거점으로 중요시하여 방비를 충분히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강 중류유역과 한수유역을 관할지로 하는 경호제치사인 대군벌 여문덕은 동생인 여문환에게 최정예 부대를 주어 방대한 군량, 장비와 함께 입성시켰다. 몽골군의 진공을 여기서 저지하려 하였다.
양양, 번성은 초전이면서도 결전의 양상을 띠고있었다. 몽골군은 처음부터 지구전을 할 계획이었다. 전투는 햇수로 6년에 걸쳐 몽골군 10만은 전선에 도착하자 곳곳에 땅을 파 뒤집었다. 해자를 파고, 그 흙으로 성채를 쌓아 올렸다. 곳곳에는 파수용 누대가 지어졌다. 개전에 대비해 용기충천해 있던 여문환의 수비병은 손을 놓고 지켜보다가 정신이 든 때는 양양, 번성 두 도시를 둘러싼 장대한 환성의 흙벽이 생겼다. 게다가 환성은 나날이 강화되었다. 양양 남쪽 면에는 이중포위선이 조성되었다. 주위 몇 개의 높은 산 구릉에는 사령부나 각 부대의 본부를 세워 그것을 연결한 포위선의 총 연장은 1백 km를 넘었다. 더욱이 군사, 교통상의 요소에는 보루나 보조 성이 구축되어 합계가 40군데나 되었다. 한수 강바닥에도 보대가 지어져 양안의 요새와 요새 사이 강 수면에는 저지용 항목이 박혀진 위에 철책이 둘러쳐졌다. 이렇게 쌍둥이 성시는 완벽하게 바깥세상과 차단되었다.
초 무장지대가 된 포위망 부근일대나 그 바깥에는 몽골 각 부대의 둔영진지가 펼쳐지고 그 곳에서 병사들은 생활을 시작했다. 공격자세가 없자 공격한 쪽은 오히려 남송 수비측이었다. 번성 수비대장인 장한영이나 양양을 수비한 여문환의 직속군부대가 초조에 못 이겨 출격해 오자 몽골측은 벽에 몸을 숨기고 소뇌나 화살, 여러 화포나 화기 류를 난사하였다. 결코 몸을 드러내어 치르는 백병전에는 응하지 않았다. 농성측은 병사를 보람없이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여문환 측은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반대로 성밖 사정은 달랐다. 오랫동안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을 상대로 각종 상인이 찾아왔다. 양번 근교는 일종의 전시경기가 성립되었다.
금나라와의 약 150년에 걸친 남북대립 결과 남송 최대의 방위선으로 의지하던 양자강과 이에 유입되는 여러 하천을 순항하며 감시하는 남송 수군은 강하였다. 쿠빌라이도 이에 대응하여 몽골수군을 만들었다. 토목작업을 했던 화북병력이 수군으로 변신하여 5천 척의 배와 7만 명의 수군이 포위선 상류와 하류에서 해상훈련을 하였다. 1271년 6월 남송은 수군10만을 북상시켰다. 순기병, 보기혼합, 순보병 등 육전대와 새로 편성된 수전대로 몽골군은 요새, 보루 등 거대한 작전진지를 만들고 기다렸다. 쿠빌라이는 전투만이 아니라 작전입안에서 편성, 보급의 모든 방면에 걸쳐 전쟁을 체계화하여 늘 이기도록 정비된 뒤에 전쟁을 치루었다. 남송수군은 스스로 들어와 분쇄되었다. 남송 측은 단번에 열세가 되었다.
여문환
여문환은 두 성의 병사와 시민들을 독려하여 이후로도 2년 동안 버텼다. 쿠빌라이는 훌레그-울루스의 아바카가 보낸 거대한 투석기(만자니크)를 교착상태에 빠진 양번공격에 사용하였다. 1273년 1월, 투석기에서 던진 거대한 돌덩어리는 성벽을 깼고, 그곳으로 몽골군이 쇄도해 들어갔다. 번성수비대는 항복하였다. 이어 만자니크는 양양으로 향하였다. 한수는 폭이 7백m에서 8백m정도나 되는데 이 드넓은 한수도 간단히 날아넘는 거대한 돌덩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활이나 쇠뇌, 화포와는 달리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신병기의 맹위에 여문환도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군, 전주민의 구명을 조건으로 다음달에 드디어 성문을 열었다. 쿠빌라이 정부는 약속을 지켰으며 여문환에게는 한수유역 군사권을 모두 위임하였다.
여문환과 그 장수들은 감격하였다. 가족, 주민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쿠빌라이 정권에서는 수많은 한족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능력주의, 실적주의는 인종이나 문명의 차이를 뛰어넘었다. 남송처럼 당쟁은 없었으며 신선하였다. 여문환과 그 군단은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남송작전의 첨병이 되었다.
여문환은 양자강 중류유역의 여씨기반과 인맥을 살려 교란공작을 펼쳤다. 남송의 방어태세는 크게 흔들렸다. 1274년 남송과 맞서고 있던 모든 몽골군은 일제히 공세에 나섰다. 전선은 회동에서 사천까지 전역에 걸쳤다. 총사령관인 바얀은 화북의 모든 병사를 긁어모은 본대 20만을 이끌고 한수를 따라 내려갔다. 여문환의 선대는 뱃길 안내인으로서, 아주의 직속기병은 육상선봉대로서 앞서고 있었다. 도중에 영주와 악주 2개소에서 남송함대가 한수를 차단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리에 익숙한 여문환의 안내로 그들을 피하여 지류를 통해 나누어 들어가 무사히 통과하였다.
남송 접수
양자강에 온 아주의 육전대는 하귀가 이끈 남송함대를 남안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수륙 두 곳에서 협공을 받게된 하귀의 선대는 점차 양자강 하류로 도망하였다. 바얀 본대는 무사히 양자강 남안에 상륙했다. 1274년 1월 양자강중류의 최대요충지인 악주는 전투도 없이 성문을 열었다. 젊은 총사령관 바얀은 악주 일대를 조용히 접수하였다. 악주의 무혈입성은 남송측 장병 전체에게 큰 충격이었다. 주변의 성곽도시들이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악주 부근일대가 항복하자, 그 소식이 양자강 중류의 여러 도시에 전해지고, 강남 전 지역으로까지 파급되었다. 남송 정부는 악주라는 작은 구멍이 뚫림으로써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바얀은 원정군의 규율, 통제된 행동과 투항자의 환영, 우대 원칙을 지켰다. 바얀군은 수륙을 아우르며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며 그 땅의 주둔부대를 편입하였다. 남송이라는 조직은 바얀군의 몽골로 재편되어 갔다.
1275년 3월, 남송 재상 가사도는 군사를 이끌고 무호까지 나섰다. 바얀은 몽골기병들에게 양안을 먼저 접수하고, 그 뒤 함상에서 거포를 일제히 발사시켰다. 남송군의 진은 무너져 내렸다. 악주를 출발한 이래 이렇다 할 전투도 하지 않은채 바얀군은 수도 임안에 이르렀다. 1276년 정월, 임안은 무혈 점령되었다. 남송 성립에서부터 150년, 북송건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316년에 이르는 왕조는 사라졌다. 임안 입성과 동시에 강남 전체가 신속하게 몽골령으로 안정되어 갔다. 쿠빌라이는 남송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남부지역 토호들의 토지소유를 인정하며, 교역상들이 향유하던 기존 이권의 유지를 보장, 후원하였다. 남송 궁정과 중앙정부의 무조건항복 이후, 어린 왕자 2명을 데리고 항복에 반대한 탈주세력 선단이 동남 연안부로 도망갔다. 그들은 3년 뒤인 1278년 2월 광주만안의 애산에서 전멸하였다.
몽골은 습윤과 열대계절풍이부는 무더운 바다를 보게되었다. 남송을 접수한 결과 남송의 해상함대 대부분이 대원-울루스로 넘어왔다. 8, 9세기 무렵부터 중국은 아랍, 이란 상선이 빈번히 내항하여 해상통상과 해양문화에 눈을 떠 중국 배도 남쪽바다로 나가게 되었으며 큰 강과 바다에 둘러싸인 남송은 국방을 위하여 해상함선을 보유하였었다. 원래 몽골은 사막과 오아시스를 오가는 육상의 이란계 무슬림 상인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중국의 해항을 중심으로 무슬림 해상들과도 연결되었다. 이미 훌레그-울루스의 몽골은 서아시아 동반부를 제압하고 있었으므로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끼고 동서의 무슬림 해상세력은 몽골의 손에 들어왔다. 이로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내륙과 해양이 이어졌다.
고려의 왕정복고
1246년 몽골에 대칸 구육이 즉위하자 앞서 고려에게 요구했던 개경환도와 국왕 친조가 되지 않은 것을 구실로 아무간이 침략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이듬해에 구육이 죽자 몽골군은 서둘러 철수하였다. 1251년 몽골에 대칸 몽케가 즉위하자 고려에 대해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응하지 않자 1253년 여름 예꾸의 몽골군이 강화도에 있는 국왕의 출륙을 촉구하며 공격해왔다. 고려정부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충실도감을 두고 각 영의 군력을 보충하여 수전을 연습시키고, 대륙의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옮기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각지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려는 결국 개전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사자를 접견하고 안경공 창이 몽골로 가자 1254년 정월에 몽골군도 철수했다.
그러나 1254년 자랄타이(차라대)가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몽골군은 내륙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여 강화도정부의 굴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강화도정부는 경상, 전라의 별초군을 뽑아 올려 도읍의 경비를 강화했고, 각지에서도 백성들과 별초군이 몽골군에 대항하였지만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만 20만이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1257년 6월 몽골은 국왕의 친조 대신에 태자가 입조하여도 좋다고 하자 고려도 이 조건에 응하였으나 약속과 달리 태자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3윌 유경, 김준 등이 집권자 최의를 제거하였다. 이때 자랄타이가 다시 침입하여 고려가 약속을 어긴 사실을 추궁하고 국왕의 출륙과 태자의 입조를 거듭 촉구하며, 강화도 맞은 편에 군사를 집결시켜 강화도를 위협하는 한편 각지를 노략질하자 고려는 1258년 12월 박희실을 보내 출륙 환도와 태자 입조를 약속하고 1259년 태자 왕전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을 헐고 굴복하였다.
사절로서 몽골로 향한 고려의 태자 왕전은 고종의 대리인으로 몽골입조의 길에 올랐으나 사천에 있던 대칸 몽케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올 때, 악주에서 북향하던 쿠빌라이의 기병대와 북경의 교외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말못할 내부사정이 있는 쿠빌라이와 왕전은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1260년, 고려 고종이 죽자 쿠빌라이는 왕전에게 유지를 내려 환국과 책봉을 정식으로 확인하였다. 이로서 왕전은 몽골의 무력과 쿠빌라이의 권위를 배경으로 왕위에 올랐다.
섬에서 나올 것을 약속한 왕전(원종)은 김준 등 무인정권의 반대에 부딪혀 개경환도가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왕전(원종)은 쿠빌라이 정권에 의탁하는 것이 자신과 고려왕실 그리고 고려의 살길로 생각하였다.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자 왕전(원종)의 발언권과 권위는 높아졌다. 그는 빈번하게 쿠빌라이에게 입조하는 한편 온건파 신하들을 끌어들였다. 고려는 오랜 기간의 항전으로 피폐하였다. 고려에서는 남송처럼 군인들만 항전한 것이 아니라 민중 모두를 끌어넣은 싸움이었다. 덕분에 민중은 희생되고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1268년에는 권신 김준이 같은 무장인 임연에게 죽음을 당하고 새로운 집권자인 임연은 강화를 더욱 노골적으로 반대하여 왕전(원종)을 폐하고 동생인 왕창을 세웠다. 쿠빌라이는 이를 반란으로 보고 입조한 세자 왕심에게 병사 3천을 주어 이에 대항하게 하고 몽골부장 뭉게두 휘하 2천을 따로 급파하였다. 또 잘라이르왕가의 지도자 쿠룸시의 대부대를 고려국경으로 이동시켜 무력시위를 하였다. 몽골의 압력으로 왕전(원종)은 복위되고, 임연은 등창으로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임유무가 그 뒤를 이었는데, 고려의 시랑 홍문계 등이 궁정 쿠데타로 임유무 등을 살해함으로서 무인정권은 몰락하였다.
고려인
이때 임연파인 배중손 등은 무인 잔존세력을 모아 고려왕실의 방류인 왕온을 왕으로 세운 뒤 강화도를 탈출하여 고려 서남부의 진도에 근거하여 고려정부라 칭하였다. 한편 왕전(원종)은 1270년 강화도를 나와 개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삼별초라는 수도경비군단 등 주전세력은 반발하여 거의 1천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진도정권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진도, 제주도 등을 거점으로 남방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상당한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지속된 몽골의 침입으로 많은 고려인이 만주로 끌려갔다. 오고데이 칸은 그들을 요하 델타의 요양과 심양에 정주 시켰다. 이 취락은 점차 발전하여 고려, 여진, 키타이 등이 섞인 국제도시의 성격을 띠었는데 1266년, 여기에 홍복원 일족이 정착하였다.
또 고려의 최탄은 서경(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면 50여개 성을 몽골에 바쳤다. 쿠빌라이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고, 자비령을 고려의 경계로 삼았다. 따라서 만주에서 한반도에 걸쳐 위로부터 홍씨의 고려 식민취락, 최탄 휘하의 서경(동녕부)군벌, 원종을 받드는 개성의 고려, 그리고 왕온을 내세운 진도의 무신정부 등 모두 4개의 집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이들의 통솔기관으로 1269년 10월, 만주의 동경(요동)에 조벽을 수반으로하는 행중서성을 두고, 잘라이르국왕 쿠룸시를 이 행성의 최고지위에 두었다.
1271년, 몽골부장 아카이(아해)의 진도무인정권 공격은 많은 손실을 내고 실패하였다. 그후 힌두(혼도)의 몽골-고려연합군은 한여름 바다를 건너 진도를 공격하여 왕온을 참하였다. 몽골로서는 최초로 해전승리였다. 삼별초의 지도자 김통정 등은 제주도(탐라)로 옮겼다. 1273년 초 힌두의 1만 2천군은 108척의 함대에 나누어 타고 겨울의 파도를 넘어 해상침공을 하여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섬 중앙부가 고원 상으로 융기하여 말의 방목에도 적당한 제주도는 일본열도와 남중국을 바라보는 좋은 위치로 몽골의 해상기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원조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으며, 1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원의 정치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의 힘으로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이후 대부대는 아니었지만 몽골주둔군은 계속 머물게 되었으며 고려는 쿠빌라이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종의 아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황녀 쿠톨그-케르미쉬와 결혼하여 충선왕 이질부카를 낳았다. 충선왕은 진왕 카마라의 딸 부다슈리와 결혼하여 카이샨, 아유르바리바드라 형제와 친하게 되었다. 1307년의 몽골의 쿠데타에서 충선왕은 이 형제에 가담하였다. 대칸 카이샨은 보답으로 만주의 고려인 식민지를 담당하는 심양왕으로 그를 봉하였다.
일본정벌
1266년 쿠빌라이는 흑적과 은홍을 정, 부국신사로 일본에 보냈으나 그들은 거제도에서 뱃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되돌아갔다. 그후로도 쿠빌라이 정부는 끈질기게 여러차례 사절단을 보냈다. 그중 4번은 다자이후(태재부)까지 찾아와 쿠빌라이가 일본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교토조정과 가마쿠라 막부에 전하였으나 회신은 없었다. 1274년 바얀이 주도한 남송 진격의 측면작전으로 남송과 해상교통을 하고있던 일본을 견제하려고 쿠빌라이는 힌두, 홍다구 등에게 몽한 주둔군과 여진족부대 그리고 고려군 5천 6백명을 더하여 총 1만5천으로 일본원정을 명하였다. 몽골에 쫓긴 고려는 백성 3만 5천명을 동원하여 병선 900척을 뽑아냈다. 함선은 지휘관들이 주력과 함께 타는 천료주, 선봉에 서서 싸우는 바아토르 쾌속주, 그리고 급수를 위한 작은 비 전투용 배가 3백척 씩 이었다.
뱃사람도 포함하여 2만 7천의 몽골함대는 합포(마산)를 출항하여 대마도와 이키를 석권한 뒤 음력 10월에 하까다 만에 상륙하였다. 대륙의 여러 부대는 집단전에 익숙하여 일본식 전투방식을 웃돌았다. 또 대륙의 합성 단궁은 일본식의 장궁에 비하여 3-4배정도 사정거리가 길었다. 공격군은 2만으로 1만도 안되는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몽골군은 인해전술과 화약을 터뜨려 쇠와 돌 파편을 날려보내는 석화시의 위력으로 폭음과 굉음에 단련되지 아니한 일본군과 군마를 놀라게 하였다. 일본군은 연안의 하까다, 하코자끼 등을 버리고 본영인 다자이부(태재부)방면으로 후퇴하였다.
공격군도 불의의 야습 등을 피하여 원의 도원수 혼도가 고려장수들의 속전속결 주장을 묵살하고 하까다만의 함선으로 야간 대피를 시켰다. 그런데 이 함선을 태풍이 습격하였다. 태풍이 불어닥치자 수많은 병선들은 암초와 암벽에 부서지고 1만 3천 5백의 목숨이 수장되었다. 돌아오지 못한 자는 대부분 사역된 고려의 사졸 들이었다. 연합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연합군은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니었다.
1차 원정 다음해 쿠빌라이가 파견한 두세충, 하문저, 사투르웃딘의 정식사절을 호조 집정부는 도전의 뜻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큐슈(구주)와 서일본을 중심으로 당번과 부역이 조직화되었다. 적군상륙이 예상되는 하까다만 일대에는 분할담당으로 석축지가 건설되었다. 또 호조도쿠소가를 정점으로 하는 군사 망이 만들어졌다. 몽골의 두 번째 일본원정은 처음보다 7년의 세월이 흘러 남송이 사라진 뒤에 이루어졌다. 1281년 항주의 바다관문이라 불리는 경원항(영파)에서 10만명을 태운 3천5백여 척의 강남군이 동중국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거함을 중심으로 옛것과 새것을 섞어 편성하였다.
1백만을 넘는 남송군은 대부분 몽골군에 항복하였다. 그들은 직업군인으로 급여생활자였다. 쿠빌라이는 전투력이 풍부한 우수병사들을 먼저 선발하여 시위친군이나 중앙아시아 전선에 투입하였다. 다음으로 선발된 자들은 광동, 광서 지역의 산악토벌전이나 육상진출이 가능한 베트남, 버마 등으로 출전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실전에는 무익한 병사가 많았다. 쿠빌라이는 이러한 약병들을 제2차 일본원정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합포의 동로군과 합하여 총 14만명의 대 함대가 일본을 향했다.
제2차 원정의 실제전력은 동로군이었다. 동로군은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힌두를 주장으로하고 홍다구도 함께 한 연합군과 김방경 휘하의 고려 병이었다. 실제전력도 1차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물가에서의 싸움이 되었다. 동로군은 쉽게 상륙할 수 없었다. 석축지에 근거한 일본군에 저지되어 고전하였다. 멀리서 온 원정군 부대를 상륙이전에 친다는 일본의 작전은 효과가 있어 동로군은 하까다만 해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6월 방대한 강남군이 기타큐슈 서북부에 도착하였다. 이키에서 양군이 합류한 5천척이 넘는 함대는 배를 안전한 곳에 띄워놓기도 힘든 상태였다. 인마가 뒤엉킨 배에는 불결한 위생상태로 돌림병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급히 히라도만에서 다카시마 해역으로 이동하여 상륙을 위한 탐색전을 펼치는 동안 이번에는 거대한 풍랑이 밀어닥쳐 배가 뒤집어져 열명에 두세명 정도만 살아 남았다. 피해는 강남군에 집중되었다.
제2차 일본원정 뒤에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호조 집정부는 맞받아 칠 태세를 풀지 않았으며 쿠빌라이도 본격적으로 일본원정에 나서려 하였다. 하지만 동방3왕가가 대 반란을 일으켜 동북아시아 전역이 전쟁터가 되자 일본정벌용 예비부대도 여기로 투입되었다. 그 6년후 쿠빌라이는 사망하였다. 그 뒤 중앙아시아의 카이두가 원조에 도전함으로서 일본원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대원-울루스를 중심으로 한 교역권의 일원이었다.
유라시아 대 교역권
제2차 일본원정 이후 강남에 주둔, 전개한 대원-울루스의 여러 부대는 동남아시아로 출병하였다. 옛 남송의 직업군인은 물론이고, 광동, 광서 지역의 비 한족지대나 호남, 강서, 복건등 산악민 부대도 이용되었다. 동남아시아 침공은 육로와 해로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함대를 이용한 해상진공은 현재의 베트남 남부에 있던 참파왕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으로 향하여 해상 무력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다습한 밀림 열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 집요한 현지민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게릴라전술로 운남, 대리(버마)의 육상진출 외에는 실패하였다.
당시 유라시아 세계는, 동쪽에서는 천주, 광주 등, 그리고 서쪽에서는 페르시아만에 있는 호르무즈, 그리고 그사이인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이나 보루네오 섬의 브루네이, 인도남단에 가까운 마라바르나, 마아바르 해안의 여러 항, 그리고 북쪽으로는 흑해연안의 수닥, 아조브해에 면한 타나 등 항구도시가 번영하였다. 이집트의 카리미 상인들에게도 동방무역은 불가결한 요소였으며 지중해의 베네치아, 제노아 등 항구도시국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쿠빌라이 시대에 무역로는 하나의 큰 순환체계로서 연결되었다. 몽골은 육지와 바다의 거대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