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책임은 누구에게로?
기독교 예정론의 교리를 전하다가 보면, 반드시 3 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첫째가 선택과 유기의 문제요, 둘째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요, 세째가 바로 죄의 책임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존 신학에서는 성경의 근본 뿌리가 되는 예정론 교리를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3 가지 난제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결론내지 못하고 영원한 숙제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미 첫째 난제에 대한 해답을 ‘베드로의 부인과 가룟유다의 배반’이라는 제목의 글로써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섭리임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았고, 둘째 난제에 대한 대답을 ‘자유로운 인생’이라는 글로써, 성경적 자유의 개념과 창조인, 자연인(타락인), 중생인, 부활인으로 나누어 각각의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자세히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택자와 불택자를 정해 놓셨다는 성경의 예정 진리를 증거하면, 금방 불택자의 경우 이미 지옥에 갈 것이 정해졌다면 앞으로 착한 일을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며, 또한 그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제기 합니다. 그리고 택자의 경우도 천국에 갈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해도 괜찮지 않겠냐는 우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난제인 죄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가에 대한 정리를 분명히 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죄와 범죄의 정의
흔히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도덕 윤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 나가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밖으로 드러난 범죄 행위’로 이해하고 있으며, 선과 악의 개념 역시도 세상이 기준이 되어 인간 사회에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하며, 반대로 인간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을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그저 도덕 윤리적 교과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들이 착한 일을 하는 경우와 나쁜 일을 하는 경우로 이해하여 죄의 문제를 단순히 도덕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죄의 책임 소재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로마서 14:23하절에서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와 예레미야 2: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악의 참된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악’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적 선과 악의 기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는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아무리 마음 속에 죄된 생각을 많이 품어도, 밖의 행위로 들어나지만 아니하면, 처벌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범죄행위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밖으로 나타나는 범죄행위가 있어야 처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와 범죄와의 차이점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5:22,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음 속으로만 미움을 품어도, 음욕을 품기만 해도, 밖으로 들어난 살인행위와 간음행위와 같은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인간 마음 속에 존재하는 온갖 더러운 욕망의 실재를 의미하며, 이것이 밖으로 들어나 행위로 나타날 때 그것을 ‘범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범죄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 죄인이기에 그 죄가 밖으로 하나씩 드러나 범죄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존 신학에서 아무 죄가 없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불순종이라는 행위를 한 것이 죄라고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 죄와 범죄의 개념을 혼돈하고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나 철학에서는 밖으로 드러난 범죄행위만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유혹을 받는 아담의 마음 속에는 이미(아직 아담 본인 자신은 그 욕망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욕망의 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 속에 있는 욕망(죄)이 하나님의 명령(따먹지 말라: 행위언약)을 어기는 행위를 통하여 밖으로 드러내어 범죄행위로 나타나게 하심으로 아담이 범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섭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아담이 선과 악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은 재판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 앉으려는 무서운 교만의 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담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영광을 깨닫도록 섭리 하실까요?
나. 하나님의 명령(행위언약)의 역할
기존 신학에서는 율법(명령)과 복음(은혜)과의 관계 역시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한채, 오직 하나님의 명령(행위언약,율법)을 인간이 잘 지키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여 율법의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는 율법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잘 지켜서 축복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욕망(죄)을 밖으로 범죄행위로 드러나게 하여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죄인임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공로(힘)으로는 구원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 얻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갈 3: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요?
예를 들어 도로교통법을 어긴 운전자가 범칙금을 내야지, 그 도로교통법을 만든 판사가 범칙금을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죄인임을 깨닫도록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지게 될까요?
다. 죄의 작정섭리
지금까지 누구도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의 작정섭리라고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책임이 혹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존 신학에서는 죄의 근원을 ‘저절로 타락한 사단’에게서 찾으려 하였고, 죄의 책임 역시 사단과 아담이 양분하여 나눠 갖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세 전에 모든 것을 미리 작정하시고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경적 예정론 교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논리이며, 이는 과거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주장한 논리로서 지금까지 아무 검토 비판없이 전래되어져 내려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의 책임이 절대로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되시며, 만물의 주재자가 되십니다. 피조물의 죄가 창조주에게 전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율법을 어긴 당사자인 인간 자신이 범법자가 되어 죄의 책임을 당연히 지게 되는 것이지, 죄를 깨닫게 하여 주는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 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하나님의 작정섭리이므로(참고: 행2:23), 아담의 타락도 당연히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이미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준비된 것으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언약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깨닫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타락과 구원’이라는 섭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인 것입니다.(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러므로 타락과 구원이라는 과정을 지나면서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여 주심도 또한 영원한 천국의 유업이 있음도 오직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만 주어짐을 깨닫게 되어, 영원토록 무궁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만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참고: 엡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