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자살한 사람을 공개비난하면 안 되는 이유

시골농군 2009. 7. 3. 18:01

자살한 사람을 공개비난하면 안 되는 이유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사회적 자살(social suicide)은 사회적 상황과 관련돼 있다. 개인 심리 상태가 사회적 상황에 의해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다. 불황의 장기화와 양극화, 실업률 증가, 물가 불안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되어 일어나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 자살은 개인의 차원으로만 볼 수 없기에 대개 사회 병리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회의 중심축이 되는 정치나 경제 등이 위기와 혼란에 있을 때 자살 경향이 높아진다. 실제로 사회의 위기, 특히 경제적 위기에 자살 경향이 악화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자살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갖는다.

1) 아노미성 자살(anomic suicide)

아노미성 자살은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뒤르켐은 이 붕괴를 무법 상태를 의미하는 집단 무질서(anomie)라 불렀다. 사회적 통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때 개인은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부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때 개인은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에 의해 서로 조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충족돼야 할 감정들과 어우러지거나 연합되지 못한다. 이런 감정은 가장 고통스러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대개 환멸과 실망의 길로 인도되는 편이다. 이때 개인은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 개인은 위험해질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지위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자신의 지배 밖으로 벗어날 때 분노의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노는 자신을 파멸시킨 현실이나 상상의 원인에 의해 반감을 갖게 만든다. 이런 특성 때문에 뒤르켐은 아노미성 자살은 일반적 도덕성이 와해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는 정도의 급속한 변화는 개인의 적응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인은 사회에 대한 적응이 갑자기 차단되거나 와해되는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

경제적 파산, 사회경제적 공황상태 또는 갑작스런 벼락 부자가 되는 등의 상황은 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분노가 폭발되는 상황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분노는 개인에게 사회적 상황이 자극되어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개인이 분노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분노해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나 운전 중 화가 나서 가족을 태운 채 물 속에 뛰어드는 등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분노는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위험성을 증가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아노미성 자살은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다. 사회적 상황이 개인의 무력감을 자극하고 좌절하게 만들어 자살로 유도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도 한 가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질서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이 자살에 이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전체적인 사회적인 분위기와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상황에 반응하는 심리적 반응의 개인차를 간과하고 있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행동이란 개인의 성향과 매우 관련돼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상대적 박탈감으로서의 자살

상대적 박탈감으로서의 자살은 비교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힘을 잃어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현상이다. 개인은 상대적 박탈감이 작용해 무력감을 경험하면 자살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이 자살을 포함한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다. 개인은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살면 힘든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늘 고생을 견디면 내일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을 가지면 고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 고생은 오히려 희망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개인을 힘들게 만드는 고생이란 대개 “지금의 고생을 견디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좌절된 경우다.

상대적 박탈감이 자살을 유발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특정한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의 분노를 자극하면 이 분노가 다시 부정성이 팽배하게 돼 일어나기에, 일종의 폭발 현상과도 같다. 이런 현상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거나 축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갑자기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쌓이게 된 결과로, 자신도 겉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는 스스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거나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을 맞는다. 더욱이 상대적 박탈감에 의해 유발되는 분노는 개인의 사사로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분노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사회적인 원망과 함께 좌절을 동반하므로 개인의 인격을 순간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경우라도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할 때는 자신에게 분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이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쉼 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언론에서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은 동반 자살이었다. 물론 동반이라는 말이 맞느냐를 두고 논란이 없지 않지만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조카가 강원도에서 동반 자살했다는 사람을 상담한 일이 있다. 그는 조카가 상대적 박탈감에 의해 자살했다고 했다. 그의 조카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의 힘든 삶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심리적 고통은 가중되기 마련이다. 마음을 어둡게 색칠하면 한숨이나 좌절 밖에는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카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노력해서 살아야할 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분노와 공격적인 특성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 상황이 개인 상황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 개인은 악화된 상황을 사회적으로 돌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분노하고, 그 분노는 다시 공격성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때 개인은 전에 다른 사람을 공격했든 안 했든 분노하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익숙한 습관들이 전복되면 개인은 심한 흥분 상태에 빠지며, 불가피하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위안을 구하려 든다. 격앙된 감정을 분출하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3) 욕망에의 분노로서의 자살

욕망에의 분노로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 분노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다. 때로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목표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목표가 능력 이상의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경우는 잘못 평가받은 경우의 자살이며, 존재의 가치란 측면에서 사회적인 위치가 명확하지 않을 때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는 대개 본능적인 것이어서 피하기 어렵다. 개인의 욕구는 어떤 형태든 정당성을 떠나 언제나 ‘충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욕구가 과도해지면 지나친 욕망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욕심이 합쳐지면 개인을 부정적으로 자극해 극단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욕구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키고 난 후에도 정복할 수 없는 장애를 향해 돌진하다 지나치게 제약이 된 삶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삶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욕망에의 분노는 충족하지 못해 화가 나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평상시 남달리 높은 목표를 갖는다.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집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더 많은 좌절감을 유발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많이 기대하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약하다 해도 좌절감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불만을 품은 상대나 상황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욕망을 달래주기보다 부정적 자극을 받으면서 가망없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칠 수 있다. 그들은 삶 자체에 불만을 품고, 삶이 자신을 속였다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제물로 만들었던 허망한 흥분에서 깨어나면 앞의 경우처럼 좌절된 감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기는 너무 지친 상태가 된다. 이때 그들은 마치 긴 여행을 마친 것처럼 기진맥진해 정력적으로 반응할 수 없다.

욕망에의 분노는 개인의 인내심을 쉽게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욕망에의 분노를 갖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도 참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모든 일에 참을성이 없어진다. 온갖 변화를 추구하다 언제나 같은 느낌으로 돌아올 뿐 새로운 경험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한 자신의 욕망 충족이 개인의 삶에 중요한 이유다.

4) 사회 병리현상으로 인한 자살

사회 병리현상으로 인한 자살에는 해고 및 실직으로 인한 요인이 선두에 선다. 해고·실직으로 생계를 꾸리지 못해 절망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다. 해고나 실직은 사람을 갑자기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최악의 경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 누구든지 생각이 갑자기 부정적으로 되는 것은 물론, 생각의 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고가 꽉 막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갑작스런 해고와 실직이 개인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위험성이 높은 이유다.

경제 위기에는 경영 악화로 해고가 단행된다. 이런 해고는 물론 일단 인원을 줄여 회사를 살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해고는 실직으로 이어지고, 실직자가 도저히 다른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순간적으로 절망감이 밀려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파업을 막아보자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을 들어 외치는 노동자 측과, 용납할 수 없다고 버티는 사용자 측의 장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자살이 ‘자신의 의지’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게 한다. 노력해서 일하고 싶은데 그런 상황이 못될 때 좌절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가장 기초적인 먹고 사는 문제가 위협을 받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이 순전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일어난다면 개인의 인내심은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사회 병리적 현상에는 해고와 실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연령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초등학생은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중고생은 지나친 학습부담으로, 인터넷 사이트의 자살 유혹, 경기 침체, 실직과 직장 스트레스, 그리고 독거노인까지 자살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사회적 측면과 함께 개인적 측면도 상당히 결부되어 있다. 실제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개인의 심리를 압도하게 되면 얼마든지 개인의 문제가 사회 문제라는 핑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측면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대개 부정적인 의지를 작동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들라면 우리 교육 현실을 말해야 한다. 교육 현실이 이를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에서부터 중·고등학생. 재수생에 이르기까지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소식을 우리는 갈수록 접하고 있다. 명문대 입학에 교육 초점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만 들어가면 성공한다는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다양한 능력이 있음에도 성적 하나로 명문대 진학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현 주소다. 마치 ‘인생은 고등학교 성적순’인 것 같다.

대학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나가는 사회로 개선돼야 한다. 대학 졸업 후에도 노력하는 사람, 또는 직장에서 그 능력을 평가받는 사람 등이 성공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 이런 현실은 우리 젊은이들을 열등감으로 몰아넣고, 건강하게 노력하거나 살아나가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라 걱정스럽다. 그래도 이런 사회적 병리 현상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자살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이 될지 모른다.

5) 결론: 다 사회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

사회 병리 현상에 의한 자살이라도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기에는 조심스럽다. 개인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도 사회적 책임으로 전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 병리적인 측면이라 해도 어디까지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있다. 물질 만능주의, 우울증과 스트레스, 생명경시 풍조, 젊은이의 사회 부적응, 인터넷의 부작용, 학교 성적과 대학 입시 실패, 실직과 구조조정, 노인 문제 등이 모두 그런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구조적인 모순을 문제 삼아야 하지만, 개인적인 노력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자살은 개인보다는 사회적인 문제나 영향으로 자살할 수 있는 점을 중요시해 다룬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부정적인 영향에 휩쓸리지 않는 한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사회적 문제는 많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자살할 수만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개인이 그런 문제 상황에 잘 적응하고 극복한다면 더욱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이미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의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의지의 존재다. 인간은 살려는 의지를 가지면서 죽으려는 의지도 함께 갖고 산다. 프로이트는 이를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살려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고, 죽으려는 사람은 파괴를 구하는 셈이다.

개인은 사회적 상황만을 문제삼지 말고 이런 상황을 견뎌내거나 극복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란 개인이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아무도 자살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도와주지 못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다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올때까지 개인은 평상시에 건강한 정신을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 한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출처 : http://www.sermon66.com/news_view.html?s=index&no=151395&hd=1&s_id=&ss_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