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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개관

시골농군 2009. 9. 24. 12:51

중세 교회사 개관

중세는 어거스틴으로 시작해서, 어거스틴을 곡해했다가, 다시금 어거스틴의 기본적인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끝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10년 알라릭족에 의해 서로마가 점령당하자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학문적 발전이 정체되었다. 그리고 529년 오랜지 회에서 반 어거스틴주의를 몰아냈는데 중요한 것은 어거스틴을 잘못 이해한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 교회의 성례전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믿으니까 은총이 왔다로 해석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라고 오해를 한다. 그레고리 1세에 의해서 590년에 중세적인 교회(공로주의), 신착적으로 행적체제면에서 강화시킨다. 서방기독교 권의 축소는 모함메트(회교)의 발흥과 세력확장, 게르만족 침입, 북방 유럽 해양족(바이킹족)의 침입으로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크 왕조는 800년 로마의 교황권과 합세해서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카롤림 문예부흥시대를 여는데 학문적인 면에서 사고백제도를 발전, 은총론, 성찬논쟁이 있었고, 수도원도 베네딕트 수도원 풀타 수도원 등을 세우는 등 교권을 확립시키게 되웠다. 그러나 내부적인 타락을 가져와서 교회의 음란인 니콜라주의 와 성직매매인 시모니 의 부패상을 가져온다. 이러한 부패의 부작용으로 카타리파와 왈도파와 같은 이단이 생겼으며 독일중심의 교황권에서 개혁읭 목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상황의 반동으로 교회측에서는 제도권신학(스콜라스니즘), 수도원(도미니칸, 프란시스칸), 십자군으로 더욱 강경책을 세웠다. 십자군 전쟁인 예루살렘성지 탈환을 기회로 교회측에서는 민중의 불만을 도피하려 하였고, 결과로 교황의 절대권이 확대되었다. 다시 민중쪽에서 반발하여 민중은 미신적 신앙으로 흘렀다. 유물, 유품,유골 숭배, 천기 등의 하나님의 징조와 연결되게 해석하였고, 각종 미신이 조장되어 점성술, 마녀의 탄생이 있었다. 지성인들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사회의 부패 풍자했는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단테 의 신곡, 데카치오의 복카메론이란 작품이 나왔다. 서민문화가 발달 되었고, 내세지향적인 종말신앙이 나왔으며,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드디어 1517년 루터가 95개으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은총론

어거스틴은 은총과 율법의 상관관계를 “율법은 은총를 추구하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강조하였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구원 가능성을 반박하면서 원죄의 유전을 말하였다. 즉,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까지는 죄를 지을 수도 있으며 또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으므로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어지고 오로지 죄를 짓는 데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죄의 노예의지 상태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죄의 상태가 부모들로부터 후손들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기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면서 선행적 은총과 후속적 은총을 구별하였다. 즉,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사람은 죄를 미워하게 되고 교회로 이끌림을 받으며, 후속적 은총으로 말미암아서 죄의 사면을 받게 되며 성도로서의 거푹한 생활을 이끌어 간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죄가 있는데 무모부터 물려받은 원죄가 있으며, 현세상에서 계속적으로 짓는 현세욕이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교회의 성례을 통해서 전달되는데, 세례에서 원죄의 사면을 그리고 성만찬과 여타의 교회생활을 통해서 현세욕이 사면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인들에게는 감독을 중심으로 한 정통교회에서 생활이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원죄로 인해서 죄악상태에 있는데 자신의 구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으 예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라 부드러운 폭력으로써 구원받을 사람의 의지를 작동시켜서 교회로 발걸음이 옮겨지게 하신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므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알아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은총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이다 선택은 곧 구원이며 구원은 곧 예정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고 항상 결과적이다.

보편논쟁과 교권강화

보편이란 참을 추구하려는 철학적 논리학 논쟁의 주안점이었다. 참이 무엇인가? 왜냐하면 중세교회의 권리와 관계된 것이었고 참을 쥐고 있는 자가 힘을 갖기 때문이었다. 감각적인 지식을 통해 습득되는 모든 지식을 부정하고 이데아 적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실재론(realism)- 대표자 플라톤 -이 있고, 물질만이 참이다. 이데아 가짜다. 하고 감각적 사물만 인정하는 주장을 유명론이라한다. 그리고 이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 온건한 실재론이 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 이데아’ 즉 현상계물질은 참인 이데아를 알게해 주는 끈이 된다고 하였다. 초기 중세는 실재론적 신학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보다는 하늘나라에 있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교황의 권위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실재론에 의해서도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구호와 각종 신비나 환상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으로 소유하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교회의 권위는 점점 높아졌고 결국 유명론 신학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하늘나라도 진짜는 눈에보이는 교회이다. 교회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교황이다. 교황의 절대권, 무오설 확립하였으며, 면죄부를 판매하였고, 교황을 위해 화려한 집도 지었다. 이렇게 교권이 강화되자 교권확립을 위한 각종교리가 있었는데 면죄부이론, 성례전 이론, 연옥이론이 있다.

십자군 전쟁과 그 결과(중세교회탈락원인 2가지를 역설)

중세교회 타락의 원인은 시몬주의(성직매매)와 니콜라주의(음란) 이다.로마 교회는 유럽 땅덩어리를 교구로 나뉘었고 각교구마다 주교를 세웠다. 주교청에는 서기가 배치되어서 헌금을 계수하고 로마로 송부하는 일을 하였다. 주교를 누구를 임명하는 냐는 문제는 곧바로 돈의 향방을 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와 교황은 서로 자신의 심복을 주교로 임명을 둘러싸고 대결이 빚어졌고 카노사의 굴욕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교회의 치장과 사치에 빠져서 재정적인 필요를 매꾸지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도입한 추문이 시몬주의 이다. 니콜라주의는 안디옥에서 개종한 헬라 사람 니콜라스가 교회내의 구원의 확실성이란 대전제를 오해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은 무슨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사면해 주신다는 방종적 원론을 가르켜서,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육적으로 짓는 죄는 구원과 무관하다고 함으로써 육체적으로 매우 음란한 혼음 종교를 부르짓는다 그래서 903-963 의 기간동안 세명의 여자가 교황의 치마폭에 놀아났을 정도로 음란한 통치를 하였다 이러한 타락과 더불어 시대적 배경은 사뭄과 기근, 각종 천재지변으로 이단, 미신이 성행하였고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교황은 성지를 회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다”하여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신성불가침이론 (하나님이 지켜주므로 침공받지 않는다)으로 소년소녀, 부녀까지 십자군으로 내보내었을 정도로 악랄하게 사용하였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교황의 절대권이 확보되었고(유명론 신학에 입각), 동양문명이 유럽에 전달되었다.(나침판 , 화약, 안경- 이것으로 동양정복 계기가 됨), 아리스토 텔레스의 발견으로 실재론 신학에서 온건한 실재론을 거쳐 유명론 신학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됨, 미신적 신앙이 성행했으며, 십자군 전쟁 참여하면 완전 면죄부를 줌, 동양의 문명 가져와 유럽에 팔기 시작한다. 이로서 농노제도에 있던 사람이 자본을 축척하게 되어 먹고 살만하니까 강 하구나 바닷가에 모여살았다. 그리고 더욱 자본을 축척하게 되어 가내수공업이 발달되었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성을 지었으며 부르조아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민권운동을 해야했고, 하원의원이 나왔으며 산업혁명을 거쳐 교황청이 무너졌다. 결국 신 중심 부정하는 사람들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면죄부와 관련된 죄사면제도의 남용

초대교회로 부터 프랑크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통용되었던 공고백제도는 개인의 구원과 다른사람의 오염방지라는 목적으로 대중앞에서 죄의 참회를 고백했던 제도였다. 그러나 박해때 배교자가 대량으로 양성되어 한꺼번에 참회시킬 수 없어서 참회탕감 대신 거기 해당 기간 만큼 돈으로 헌금내게하였고 이것으로 교회 보수 건물유지, 구제사업을 했는데 이것이 초기 면죄부 형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영국, 독일, 아일랜드 등 의 나라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죄지은 만큼 동으로 사면했고, 이것을 영국교회가 자기의 전승으로 받아 들였는데 신성로마 제국은 돈에 의한 죄사면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회중에게가 아닌 사제에게 죄의 고백을 하는 참회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고백제도가 확정되게 되었다. 순서는 죄를 찾고, 양심의 가책을 얻는다. 사제앞에 가서 구두로 고백한다. 그리고 사제는 참회의 행위, 보속행위를 부과한다. 참회의 행위를 완수함으로써 죄 사면을 받는다. 참회자는 죄를 뉘우치는 가시적인 일로서 금식, 맨발로 다니기, 주기도문 암송, 채찍질 고행 등을 하게 되는데 부과양의 차이에 의해서 보속행위 부과 일람표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했던 죄를 보속행위를 통해서 100% 찾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되면서 아니다.내가 다 찾았다고 보라. 지은 죄의 해당되는 양심으 가책은 없는가? 신부는 죄의 고백을 듣고 죄에 해당되는 것을 부가 했느냐에 따라 객관적 사실성 문제 못한다. 이러한 사면제도 통해 우리가 다 죄를 사면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양심의 가책 제대로 느껴야 한다. 고하는 합당한 공로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완전한 회개 즉 자기 스스로 고행을 해야 한다. 지옥의 형벌을 연상하면서 죄를 찾고 뉘우치는 것으로 완전한 회개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참회제도가 성례전으로 격상되면서 참회의 순서가 달라지는데 죄를 찾고 불완전한 회계에서 완전한 회계에 이르면 구두로 사제에게 고백하고 그러면 이 때 바로 사면을 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보석행위를 부과하였다. 그런데 보속행위에 대해 더한 요구가 이루어 졌다. 아무리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도 모조리 참회하지 않아서 천국에 갈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연옥이론이었다. 연옥은 사면받지 못한 동안의 기간만큼 불로써 연단 받는 곳이었다. 이러한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벗어나게 해줄수 있는 이론이 성립되었는데 바로 ‘지체이론’이었다. 다른사람의 공로 내것으로 가져오레 하려면 ‘잉여 공로설’이 나옸다. 공로가 많은 사람의 것을 자기가 전가 받을 수 있다. 그 잉여 공로를 누가 관리 하느냐? 천국보물 창고를 가진 베드로에게 열쇠가 있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누구인가 교황이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게 된다. 죽은자를 위한 미시가 가능해졌고 교회는 많은 돈이 들어오게 된다. 좋은 의미의 면죄부가 돈과 결탁하여 양심 사라지고 돈으로서 구원을 사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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