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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교회 연구

시골농군 2009. 6. 25. 16:16

   제   목:  [서머나 교회] 부요관(富饒觀)


 엔터를 치시면 내용이 갈무리되어 적은

        비용으로 본 계시 물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대한연구


  ■ 본  문 ■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 2 :  8-11

 

서 론


처음 시작은 생명관(生命觀)으로 하여 환난관(患難觀) 안고관(安苦觀)을 거쳐 이제 부요관에 이르렀습니다.  성경 어느 것 하나 연관된 부분이 없을까만은 부요관을 정리하려고 하니 이것 저것 연관된 것이 많아 무엇부터 쓸까 혼동이 옵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나는 부요관(가치 기준을 보는 눈)을 무엇에 정하느냐 하는 면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바른 부요관(富饒觀-넉넉함을 보는 기준-)을 갖기 위해서는 바른 생명관이 필수적입니다.  생명관(生命觀) 자체가 삐뚤어져 있으면 부요관이 바로설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4대관(생명관-生命觀, 환난관-患難觀, 안고관-安苦觀, 부요관-富饒觀)은 신앙의 주춧돌과 같은 사상적 개념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생명관은 비행기의 동체와 같습니다.  환난관과 안고관은 양 날개에 해당하며 부요관은 꼬리 부분입니다.  전체적 구도는 생명관 안에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잘못되면 비행기는 정상적 비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혹여 뜰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날지는 못합니다.



1 . 물질이란  무엇이냐?


여러분은 우리 인간이 왜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 존재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그 대답이 틀리다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무엇이냐 하`는 면에서는 각자 말이 달라집니다. 

왜 말이 달라지느냐 하면 영광이라는 기준적 가치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만 성경 구절을 갖다 붙여도 자기 기준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지만 그 영광을 돌리기 위한 구체적 수단이라는 것이 어떤 행위적 신앙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 나를 창조한 창조의 목적을 인간 내가 깨달아 알아서 그 목적에 부응(副應-상대의 목적에 따른다는 뜻)하여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창조함을 받은 인간 나의 본분입니다. 

그 창조 목적이란 무엇이냐 하는 면을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은 외형상의 껍데기가 아닌 신앙 인격의 성장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아적인 신앙 인격이 삶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장을 함으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보아야 부모 심정을 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철없이 부모 속만 썩이던 자식도 제 자식을 낳아 길러 봄으로서 철이 들어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철이 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자식이 철이 든 것이 아니라 인격이 성장을 했기 때문에 철이 든다는 말입니다.

자식 낳는 게 철드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자식 철들이기 위해 초등 학교 5학년 짜리 아이를 장가보내어서 아비로 만들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 5학년짜리 아이는 아직 인격적인 성장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를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추어 주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하여야 하고 교육도 시켜야 하고 또한 캠핑도 보내어 단체생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극기 훈련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도 다녀와야 합니다.  그다음 사회에 나가 제 밥벌이를 할수 있는 경제적 실력과 수수관계적(授受關係的) 인격의 성장을 이루게 하고 가정을 꾸미게 합니다.


부모는 이를 위해 돈(물질-物質-)을 투자 합니다.(장래에 성장한 자식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런데 자식이 생각하기를 “아! 내가 밥을 잘 먹는 것이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구나-말은 맞지만 목적 면에서는 전혀 틀립니다.-” 라고 생각하고 냉장고도 뒤져 먹고 밥통도 훑어 먹고 슈퍼에서 외상(부모님 이름 대고) 있는 대로 가져다 먹고 원수의 집안에서 파는 것도 사다 먹고 그래서 비대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자식이 밥을 잘 먹고 건강한 것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목적면에서는 각자입니다. 영광 면에서 틀리고 의사적(意思的)인 면에서 이질적(異質的)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영광(榮光-영화요 자랑-)이 아니라 수치(羞恥-부끄러움과 치욕-)입니다. (내가 저를 부끄러워하리라..)



2 .  물질위에 영원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질이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 관계(人格的 授受 關係)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광 자를 이루고자 물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것입니다.


생명관에서 언급하였던 바 인간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든지 구원받지 못하든지 영원적 존재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정과 예지와 창조 섭리가 논의되어야 바른 이해와 설명이 되겠지만 본문은 부요에 관한 것이므로 부요관적 입장에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신격체(神格體)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함께 천국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수수관계적 사랑의 대상자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인간)에게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처럼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신의 인격을 덧입혀 주기 위해서는 성장이라는 수단이 필요했고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있기 이전에 주변 환경이 필요했고 주변 환경(세상)이 있은 후에 인간(아담)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두게 함으로 하여 빗어질 여러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모르신 것이 아니라 그것 마저도 성도 구원에 도구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성도의 구원에 이용되는 방편이고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라는 것 위에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3 .  영원자가 무엇을 욕심내야

하는가?

인생은 영원의 시작이다.

우선 우리는 시간적인 개념에서

100년(인생 100년)과 , 영원(수억만년....)을 상대 비교를 하여 보고 시간적인 면에서, 가치(활용성)적인 면에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느냐 계산을 하여 보아야 합니다.

물론 영원한 것이라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영원한 생명(구원을 받든지 받지 못하든지 간에.....)을 가진 자가 임시적인 것에 욕심을 낼 것이냐 영원한 것에 욕심을 낼 것이냐 하는 손익 계산을 따져 볼 때 당연히 영원한 것을 욕심 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제 영원한 것에 욕심을 낸 한 신앙인 을 예로 들겠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대 부족장이라 현재의 사람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부분이 난해하여 설명하기 곤란한 곳이 있지만 대략적인 삶을 열거함으로서 무엇이 부유함이고 무엇이 궁핍함인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흔히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100% 잘 믿었기 때문에 신앙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이............

 신본주의적 믿음의 자세 혹은 본받지 말아야 될 인본주의적 믿음의 자세가 다 들어 있음으로 하여 그것을 보고 나 자신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비교 분석 판단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신앙)인가 깨닫게 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데라는 본래 갈대아 우르의 사람이 아닙니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 데라인데 이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갈대아 우르라는 그곳에 주질러 앉아 정착을 하였고 그곳에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오순도순 인간 재미 느끼며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를 두고 데라 가 우상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여호수아 24장)

그래서 성경에 본토 친척(本土 親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랑의 인생 길에서 -인생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한 여정과 같다.- 그 가던 길을 멈추고 정착을 해 버리면 그곳이 본토가 되고 친척이 됩니다.  어디에 살던 어떻게 살던 데라는 노아의 신앙을 이어온 신앙계대입니다.  명목상이 되었던 형식상이 되었던 데라는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후손이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심심하셔 가지고 어중이떠중이를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불러 낸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불러 내셨단 말입니다.


외형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방랑자의 인생에서 안정되고 안전한 정착민의 인생으로 바꿈으로서 가축과 노비와 일가를 번성 시켰습니다.  데라의 인생은 임시 세상의 물질적 관점으로 그 일생은 성공한 인생(人生)이다 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였던 구원의지(이를 의사적 단일-意思的 單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영생의 소망은 있으나 영생의 생명은 보지 못한 근시안적 관점입니다.



멈추었던 길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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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반대의 방향으로 가던 자신의 삶-부모라는 고정된 주위 환경으로부터의 불려 나오는 것-에서 단호하게 나왔습니다. (여기서 나왔다 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자체의 개념을 임시 세상적 개념이 아닌 영원 세계의 개념으로 바꾸고자 하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결코 어떤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포기하였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었습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은 가나안을 이상적 신민(神民)의 나라로 언급하였습니다. 계시 사상으로 보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나라요 ,  하나님의 약속 받음에 있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 할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장가를 갔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사라는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허무맹랑한 약속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소망)을 주고 그 자식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입니다.(나는 이를 천국의 무한성(無限性)과 확장성(擴張性)을 말하는 믿음의 능력이라고 본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좀더 많이 의사적 단일(구원 성장)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근이라는 주위환경을 변화시켜 연단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시험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한번 양보 두번 양보 세번 양보(점점 남방으로 갔더라..........) 하더니 결국은 애굽으로 도망을 갑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도망을 하며 아내 사라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어여쁘니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 하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까 염려가 되니 나를 오빠라 부르시오.”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는 4촌남매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혼을 하였으니 4촌남매의 법은 사라지고 부부 지간의 법이 새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사라진 법을 다시금 들고 나온 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으로 거짓말을 해서라도 먹고 살자는 (생명을 부지해 보자는)발상입니다.  논리적으로는 거짓말이 아닌데 사실적으로는 임시 생명 유지하고 키워 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거짓입니다.



생명가치관의 상실 그리고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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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발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땅을 벗어남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먹고 살기가 막막하여 어찌하여 보든지 살아 보자.  우리가 살아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볼 것이 아니냐 하는 합리주의가 아브라함을 지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아는바와 같이 예나 지금이나 힘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미인을 아내로 맞고 싶습니까?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싶습니까?  그러면 동물적 본능의 힘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황 설명과 동떨어진 말이 될지 모르지만 얼굴 예쁜 여자는 술집에 가면 많고 몸매 예쁜 여자는 클럽에 가면 많고 팔등신 미인은 연예계에 가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쁜 여자는 돈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차지를 하기에 마련입니다.  솔직히 일용직 근로자가 이런 여자를 얻기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드라마 소제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능력 없는 남자가 사랑하나 믿고 예쁜 여자를 얻으려는 불행한??? 사건을 줄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사라가 얼마나 예뻣는지 모르지만 애굽땅에 들어서자 마자 소문이 났습니다.  힘있는 자는 미인을 밝히는 법.... 그 소문은 곧 왕에게 전하여 졌습니다.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사라는 왕에게 불려 가고 오라비로 전락한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값으로 가축과 노비를 선물 받습니다.  말이 선물이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팔아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라가 몸을 더럽히고 더럽히지 않고를 떠나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이 하나님의 약속(가나안 땅)을 떠남으로 하여 맞게 되는 수치입니다.  이때 사라의 나이는 70세가 가까웠습니다.

여자나이 70세가 가까우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기 마련이건만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육체의 아름다움은 여자의 자랑이다.  이 자랑 거리를 영광으로 만들것인가 수치로 만들 것인가? 여기서 사라의 입장을 생각하여 보자.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진정으로 사랑 하는 방법이 남편의 말에 순종해서 남편을 오빠라 부르며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는 것이었을까? 

나는 사라가 바로 왕에게 불려 간 것이 꼭 아브라함 때문 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사라는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말을 따른 것은 아브라함은 물론 사라 자신에게도 인생이라는 가치관(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이주하던 인생관)에 심각한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가치관의 혼동 그것은 수치를 불러온다는 교훈을 우리는 얻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해 혼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 사라 모두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 하는 부활 신앙이 없었습니다.  왜 없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아브라함의 의지요 아브라함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가 되는 신인의지단일(神人意志 單一)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뜻은 동쪽, 아브라함 뜻은 서쪽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이라는 곳으로 불러 낸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생각하는 것, 목적 하는것, 즐기는 것, 사랑하는 것, 모두가 단일이 되는 상태를 원하셨기 때문인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버리고 남방으로 남방으로 내려갔던 것이고 그 결과가 이 치욕입니다.


생명에 대한 가치 혼동은 이와같은 불행과 고통을 예견(??혹은 예비)하고 있었습니다.(사건의 종말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

아브라함이 “우리가 먹고살기 힘드니 애굽으로 가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남방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다가 애굽까지 가계 된 것입니다. 


자!

조금씩 정리해 봅시다.   남방으로 갔다는 말은 가나안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인데 가나안은 이상적 신민의 땅이요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바로 알아 그 의지에 따라 수행(遂行-맡은바 본분을 끝까지 이루어 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임시 생명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바로 보지 못하면 신앙의 심각한 훼손이 오고 신앙의 훼손(毁損)은 가치관의 혼동을 가져오고 가치관의 혼동은 생명을 바로 볼 줄 모르게 되고 생명을 바로볼 줄 모르면 육신에 연연하게 됩니다. 


육신에 연연하게 되면 성도의 삶(신앙)과 하나님의 구원의지와(救援意志)와 무관하게 되고 구원의지와 무관한 성도의 삶(신앙)은 수치의 삶(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신앙공식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초 자연적 개입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수치를 하나님은 비상수단(초 자연적 현상)을 써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물질)을 주어 애굽을 떠나게 합니다.(그래 실컷 먹고 살아라............)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있어 이것이 자랑 거리고 영광 꺼리이겠습니까?  조카 롯의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조카 롯아. 내가 먹고살기 힘이 들어 너의 숙모 사라를 바로 왕에게 주었더니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사 숙모도 돌려보내 주고 이렇게 많은 재물도 얻었구나.  우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자...”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하였다면 하나님의 초 자연적 구원과 많은 물질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자랑꺼리가 아니라 수치 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짓 해 놓고 신앙 간증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육체의 미모를 팔아 세상에 빌붙고자 했던 아브라함, 사라 이들과 똑같은 짓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그 치욕의 세상에서 구원받으면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으되 가치관의 회복이 없으면 이짓을 계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이 짓을 참고 보셔야 하겠습니까?



가치관의 회복과 하나님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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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바로 왕에게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부의 번영을 누립니다.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가치관 회복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이것을 단순히 물질적 축복으로 보게 되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수치를 당한 아브라함의 정신 사상과 똑같이 됩니다. 신앙 성숙으로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이 세상을 정복하고 누리고 다스릴 실력이 된 것입니다.  도시국가의 왕도 이기지 못하였던 외침을 개인적으로 기르고 양성한 군대로 조카 롯을 구원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되어서 은혜가 아니라 이러한 세상을 누리고 다스리며 정복할 수 있는 여호와 신앙의 실력자가 되었다는 말이고 우리는 또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에 돌출된 사건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롯 이라는 인물의 등장입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롯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단지 아브라함과 동행한 롯 정도로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아브라함의 신앙에 들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동거동락 함은 여호와 신앙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호와 신앙인이 아니라면 롯이 아브라함과 동거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다니며 무엇을 배웠을까요?  신앙의 교훈을 배우고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 처세술을 배웠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수단을 익힌 것입니다. 

영생의 신앙이 아닌 육신의 안위를 목적한 신앙이 롯의 신앙입니다.  염치도 없고 도덕도 없습니다.  인간 군상의 욕심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롯의 일생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고 그의 수치는 우리가 입에 담지 못합니다.

이러한 원인은 모두가 신앙 교훈을 육신으로 받아 들여 임시적인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에게서 딸이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그 아버지에게서 벧엘 소망(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비에게 술을 먹이고 아비의 씨를 받자고 생각한 것이 딸의 잘못입니까? 

그릇된 생명 가치관을 가진 롯의 책임입니다. 롯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인생을 하나님의 구원 목적대로 살지를 않고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본주의가 이질 생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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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여자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순수한 남자의 입장에서 다른 여자 얻기를 아내가 권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여호와 신앙안에서는 용납되는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것이 가계를 잇기 위한 수단일 때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때에 적절한 수단과 방법으로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라와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 먹음을 걱정하였습니다.

사라의 입장에서 “이 양반(남편)이 밤에 나를 찾는 회수가 줄어드는 것이 나이 먹어 감에 기력이 딸려서인 듯한데....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 혹여 하나님이 아들을 주셔도 내가 낳지를 못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이 아이 낳을 능력(남자의 생식력)이 다하기 전에 첩이라도 들여서 후손을 보자...”라는 생각을 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야 가능한 일이고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더욱이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가진 족장 시대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라나 아브라함이나 일반 사람들(이하 자연인)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먹고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한 후손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여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건설 이전에 아브라함이라는 인관과 하나님 자신과의 인격적 단일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대(아담) 이후 계속되어 온 신앙입니다.  아브라함, 사라는 이것을 목적으로 가나안을 지키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가나안을 열심히 지키고 살았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후손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소위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꼴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동안 아브라함의 여호와 신앙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그 약속의 이행을 인간 자신의 수단으로 받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人本主義的)적 발상이며 하나님과는 이질적인 사상입니다.   결과를 보면 알수 있지 않습니까?  껍데기는 아브라함의 씨지만 알맹이는 여호와 신앙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예수님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껍데기는 신앙적으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알맹이는 이방 사상입니다.  피는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바라고 소망하고 이루어 놓은 것은 인본주의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고 바라고 소망하였던 그 본질이신 하나님이 와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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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줄다리기는 계속됩니다.

인간 육신의 생명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이스마엘을 낳고 그 아이가 장성 하였을 때의 아브라함 나이는 100세가 가까오고 있었다.) 하나님은 약속한 후손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약속 불이행(아브라함의 입장에서)이 왜 계속되는가?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주셨던 약속과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비교하여 보면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는 이 점을 아브라함의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자꾸만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구원의지를 좀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을 함으로서 구원 의지에서 멀어지는 아브라함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으로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신앙 단계가 이삭을 낳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오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노력이 거듭되는 약속에 담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겉으로 보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만 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약속의 때가 되지를 않아 아브라함의 애간장만 태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서 빨리 주고자 하는 약속의 상징 이삭을 주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인본주의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주장함으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바로 보고 이룰 수 없습니다.  말세에는 믿는 자는 많아도 믿음을 보지 못하겠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녁에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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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삭을 키울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허락한 구원 계보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는 이미 인본주의 산물인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있었습니다.  설마 설마 하던 가계(家系)를 이을 후손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은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장자 이삭을 핍박합니다.  여기서 핍박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아이로 자라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분명 이를 목적으로 이삭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인본주의란 항상 신본주의를 억압하고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 카인과 아벨 때에부터 이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인본주의는 영생을 보지 못함으로 하여 육신의 소유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고 신본주의가 보는 영생을 값어치 없게 여김으로 하여 영생을 가로막고 임시적인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보호하고 신본주의 신앙 계승을 이루어야 하셨음으로 하여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필요하다고 여기셨습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하나님에 의해 육신의 아버지의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 이스마엘은 구원 계보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와는 상관없는 인본주의의 산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신본주의의 위대한 부활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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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주의의 절정은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일회성이 아니라 영원한 영생적 생명이라는 부활 신앙은 모든 사물로부터 초월하게 만듭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자체적 신앙이 되기가 힘이 든다는 것 외에는 의심할 바 없는 만고진리(萬古眞理)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에 걸쳐 바라왔던 언약의 상징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소망이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쉰둥이로 얻은 자식도 애지중지(야곱이 요셉을 사랑하였던 그 사랑과 같이) 하건만 하물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만백성의 조상이 되며 기름진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소망의 뿌리라면(이것은 표현 상일 뿐 실상적 소망은 여호와 신앙-하나님의 나라 - 이다.) 더이상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이 이루어 낸 신앙의 실체를 들어내어 만민 앞에 보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삭의 제물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알고 믿고 있었나 하는 신앙의 상태를 조금은 집고 넘어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 시다.

2)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에게 결코 해될 일을 하실 분이 아니다.

이하 세 가지 면에서는 아브라함 자신이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100살이 넘어 얻은 아들을 [[길보아 산에서 제물로  바쳐라]]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부모의 심정이 아니라 상황판단-사건 판단-)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뭇 백성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는데 한점의 의혹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린 소년입니다.  이삭이 장가를 가서 아내가 있고 그 태중에 아이가 있다면 혹시 모르지만 이삭이 아직 어린 만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삭이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능의 능력자가 기껏 약속하고 주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데는 그만한 까닭과 원인이 있을 것이다.”라는 어떤 신뢰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만백성의 조상이 될 이삭은 죽어도 살 것이다. ” 하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조상님 한 사람도 살다가 하늘 나라로 들리어 올라갔다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구체적 단어인 부활 신앙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죽어도 살리라 하는 확신이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따르겠다는 맹목적 신앙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율법이 되어 행위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이삭입니다.

이삭의 나이가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나이이고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고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의도를 몰랐을리 없건만 아버지로부터 도망치려 했다거나 반항을 하였다거나 하는 구절이 없이 순순히 묶였던 점으로 보아 이삭 역시 자신의 부활(죽어도 죽지 않는다)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신앙의 근거와 확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 : 18-19”

이 말씀의 약속을 받은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90세 되던 해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이 태어나자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무릅에 앉히고 바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겠습니까?  아세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자신의 신분(전능자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삭 자신은 아들(신앙을 이어줄 계대)을 낳을때 까지는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엇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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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적으로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예측한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이 자신의 자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자 하였던 그 신앙은 만천하에 공개되어 자랑꺼리(榮光)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이 신앙 행위 자체를 자랑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하시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의사성(意思性)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여서 자신의 신앙으로 믿어 버리는 그 차원의 단계에까지 오른 아브라함을 자랑하신 것이고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그 차원으로 올라선 이삭의 신앙을 자랑하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보니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의사적 단일이 이러한 자랑 꺼리를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100세 되던 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때로 하여 약속의 상징 아들을 얻기까지 25년,  이 시간을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던지 자신의 구원 의지를 아브라함에게 인식시켜 그로 하여금 그 구원의지와 단일이 되게 하려 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원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약속의 상징 이삭만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줄 다리기는 아브라함의 전적패배(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를 함으로서 인간자신의 타락적 기존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이 굴복이 전제로 되어야 부활 신앙(죽어도 죽지 않으리라....)이 성장하고 그래야 만이 자신의 아들마저도 하나님께 제물로 내어 줄 수 있는 의사적단일(意思的 單一)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임시 세상에의 생명과 영원의 생명과 분리하여 영원의 생명을 취하고 키울 수 있는 신앙)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한번 기도해 본다던가 하나님을 원망 한다던가 여호와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였다던가 하며 미적 거린 것이 아니라 칼로 무 자르듯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결단력 있는 신앙(하나님 안에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이............)이었다는 말입니다.



4 . 진정한 부요를 이루기 까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상당히 많은 양을 할애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조명하여 보고 아브라함이 지키고 이루어야 했던 것,  버리지 못하고 두 손에 쥐고 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철저한 부활 신앙이 되기까지 아브라함의 의와 불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과연 우리가 진정 영원한 부요를 소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후 이삭(의사적 단일)을 얻기까지 25년 기쁨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까지 십수년 도합 35-6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의사적단일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 자신의 일생 가운데 35-6년을 소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향년 175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지 100년 가운데(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던 75년 제외) 35-6년을 하나님과 줄 다리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어쩌면 이 기간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단시간인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여러분 중의 누구 하나가 아브라함과 똑같은 입장이 되었다고 칩시다.(사실 똑같은 입장에 서 있지만....)  그러면 여러분은 몇 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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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정 부자이며 넉넉한 인생인가 ???

                                       ??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의사적단일을 이루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물질을 많이 가진 것이 부요가 아니고 아브라함 같은 신앙, 즉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가진 것이 영원한 참 부요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물질을 보고 ‘당신 참 부자군요’ 한다면 아브라함은 ‘아니요, 이것은 모두 자타의 구원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라고 할 것이다. 위에서 물질관에 대해 잠시 언급한 까닭은 우리가 성경을 봄에 있어 자칫 물질적인 개념으로 복이라는 것을 부요라는 것을 보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물질이란 성도가 자타(自身과 他人)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활용하는 방편적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부자라 하는 것은 영원세계에서 누릴 그 세계가 부자라는 말이고 그 세계를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느만큼 의사적 단일을 이루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룰구원 혹은 성화 구원이라 하며 좀더 포괄적인 면에서는 영화라 한다.)


그러면 의사적단일이란 무엇이냐???

                                ??자신의 소중한 아들마저도(여기서 소중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연연하였던 물질 세상을 말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어 달라는 사건이 와도 그 사건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단번에 알아보고 죽어도 살리라 하는 단계의 신앙입니다. (임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영원 세상에서 누릴 것과 상대 비교를 하여 보라)


왜 이러한 신앙의 단계에까지 올라야 하느냐 ? ??

                                              ??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순전히 인간 나를 위한 것인데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 그 세계를 누리고 즐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세계를 누리고 즐기기 위해 위해서는 ....


첫째☞ 하나님과 의사적단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하나님과 같이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사적단일을 이룸에 있어 자연적으로 실력이 수반합니다.

       실력이라 하면 현실 세계에서 세상 정복을 말함이고 내세 세계에

       서 누림을 누릴 수 있는 실력을 말합니다.


셋째☞ 실력은 곧 인격적 성장을 말합니다.  자유적 의사를 나눌 수 있

       는 신앙 실력의 인격 성장입니다.


이러한 세가지 기능과 지능이 성장함으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부합(符合-본래 하나이었던 것을 둘로 나누었다가 다시 붙여서 신분상의 확인을 하였던 데에서 유래한 말)하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이나 저나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의 인생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이나 섬기며 살면 아예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모르니 속이나 편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연고로 나로 하여금 세상과 분리(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다는 뜻) 하여 하나님 자신의 나라에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만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로 약속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목적이 보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셨던 바 하나님과 인간 나와 의사적단일(意思的 單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바는 서두에 말씀 드렸던 바 우리 인생이 임시적 생명으로 끊나 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생의 생명으로 연장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임시 잠깐 쓰고 누리고 활용할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느냐 영원한 세계에서 쓰고 누리고 활용할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는 선택의 결단을 우리 인생이 내려야 하고 그 결단에 대해 하나님은 평가를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를 보니 서머나 교회는 그 결단을 바로 하여 주님 앞에 칭찬을 받은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생명을 보는 눈이 임시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적 생명이니 그 생명을 욕심 내게 되고 그 생명을 욕심 내다보니 임시 생명으로부터 핍박이 오고 핍박이 오니 환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고통이지 영원한 고통이 아닙니다.   임시적으로는 고통이나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고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니 임시 세상 물질로는 궁핍하나 그것이 궁핍으로 보여 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임시세상에서 사건을 보고 사건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자신의 신앙 인격은 성장을 하고 성장을 하면 성장을 한 만큼 하늘의 상(여기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어 다시 언급하거니와 상이라 하는 것은 어느 만큼 주님과 즐거워하느냐 하는 기쁨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지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이 크고 따라서 임시 세상에서 궁핍할 지라도 영원세상서는 참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서머나 교회는 무엇을 취하였겠습니까?

이제 이글을 읽은 여러분은 못 먹고 못살아도 이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만족하며 누리고 다스리며 그 날의 소망을 꿈꾸시겠습니까? 아니면 임시 세상에 밀려 남방으로 남방으로 이주하다 끝내는 애굽이라는  세상으로 가서 수치를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시고 소망하시며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 영원한 생명의 무한한 성장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한없이 끝없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유하여 외형상으로는 궁핍하여도 사실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 2부-

  ■ 본  문 ■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 2 :  8-11

                                                                   



서  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은 사대관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신앙의 지표를 삼은 서머나 교회를 보고 가슴 철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상황도 형식으로 도표화하자면


누구에게 오는 사건????

                      ?? 예수님을 바르게 옳게 믿고 바라고 소망하며 하나님이 주신 구원 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로부터 오는 사건?????

                         ??다 같이 하나님 믿고 구원받자고 하는 여호와 신앙인들 특히나 세상도 누리고 천국도 가자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건이다.



서머나 교회를 옥에 가두는 자의 실체는 ?????

                                            ??자칭 유대인(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 사탄의 모임(수의 우월 혹은 혹은 기득권에 의한 권리) 이며 여기서 사탄의 회라고 하는 것은 광범위한 의미로 쓰여졌다.  결론 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반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자들은 사탄의 회에 빠진 자들이다.(기본 구원과 연관해서 해석하여서는 안될 세밀한 문제이며 이는 성화구원적-聖火救援的-인 문제다)


그들이 서머나 교회를 옥에 가두는 목적은???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논하면 초점이 흐려질 우려가 있음으로 사건 적인 면만 다루기로 하겠다.  궁극적 목적은 생명의(야훼 하나님) 본질(本質), 본성(本性), 본능(本能)을 서머나 교회(하나님의 구원의지에 피동 되어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성도)로 하여금 성장시킴으로 하여 그 이루고자 하였던 구원 의지를 만족하게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다.

이 훼방은 복음이 전하여지는 지는 때와 동시에 오계 된다.  처음에는 생명 가치관의 혼선(混線)을 주고자 하나 그것이 원할치 못할 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 계시를 이방 철학과 뒤섞는 작업을 한다. 그것 또한 원활하지 못할 때는 외부의 사건과 환경을 조장해서 성도가 바라고 소망하는 구원 의지를 꺾고자 한다.  더 나아가 세상적으로 바라고 소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도록 해서 성도로 하여금 그 소원 목적을 천국이 아닌 세상을 향하도록 한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등대의 불빛을 발견하고 그 불빛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자 하나 곳곳에 암초, 파도, 안개, 기타 등등의 방해물이 있어 배로 하여금 그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배는 생명을 건진 배요, 그 칭찬이 자자하고, 그 항해 기술을 부러워할 것이며 새 삶의 기쁨을 얻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가 세상에서 취하여야 할 바른 자세 ??

                                                ?? 조금은 역설적인 말이 될지 모르지만 서마나 교회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서 춤을 추웠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회가 물리적인 환경 억압을 받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사탄과 싸워서 이기고 사탄이 뒷춤에 감추고 있던 생명에 대한 위협(죽음, 고통)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 자신의 신앙 신력이 예선전에서 맴도는 실력이 아니라 결승전까지 올라설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면류관(영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


환난을 겪고 그 환난이 있음으로 하여 궁핍하건만 실상(實像-실질적인 모습-)은 부요한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 그분이 이제 서머나 교회의 사람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셨으니 그것은 새로운 환경과 여건의 조성이다.

그 동안 서머나 교회가 걸어왔던 신앙의 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험하고 어려운(죽도록 매달려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러한 사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궁극적 목적이 있음으로 하여 사건을 일으키고 조성하시는 예수님도 기쁘고 그 사건 환경을 받아 살아가는 서머나 교회도 기쁘다. 

 


1 .  귀소본능 

                                 

  

인간이 창조된 이후로 줄곧 해답을 얻고자 한 것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이를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아닌 기타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본능적 현상입니다.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동서고금을 털어 사람들은 인간이 흙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시각은 다릅니다.  아담 이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들은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었다는 말을 쓰지 않고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방인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을 부여받은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 하나님 품으로

여러분은 연어가 태어나 바다로 나가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강에 되돌아 와 알을 낳기 위함임을 아십니까?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은 필연적으로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말로 죽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과 사건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 자신이 예정하고 택하신 백성을 살려 두셨습니다. 아니 당신과 나로 그 의미를 압축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요량과 목적으로 환경과 사건을 만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생명이 호흡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결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우리가 이제 그 본성의 본체이신 하나님에게 되돌아가게 된다는 말이고 이 말은 우리가 사는 목적이 뭐냐 그러므로 왜 사느냐 묻는다면 죽기 위해서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뭐냐 하는 질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제목을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 했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아셨을 줄 믿습니다. 

성도가 사는 목적은 ??????????????→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   

하나님이 성도를 살려 두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불러오기 위해



2 .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성

                                                      



귀소본능의 개념이 확실하게 잡히게 되면 죽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까짓거 영생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한 많은 이 세상 바랄게 뭐고 미련 둘께 뭐냐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어서 빨리 죽는 날만 기다리며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라는 복음 송이나 부르고 있게 됩니다(이러한 신앙을 염세주의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저 그냥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나 갔으면 딱 좋겠는데 예수님은 충성할 것을 요구 하신 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충성은 무엇입니까?


충성이란 무엇인가?


군인에게 있어 충성이라 함은 국가가 군인으로 하여금 바라는 바 목적인 외란(外亂) 내란(內亂)으로부터 국가 안위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도로 하여금 죽도록 충성하라 하신 충성이라 함은 외란(外亂) 내란(內亂)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안위를 수호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그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전능자 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심히 깎아 내리는 언사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 나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인가 ? 지난주에 말했던 바 사대관을 도표형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비행기의 모양이 될것이다.


생명관은 동체        ???

환난관??               ?

안고관??양 날개        ???

부요관은 꼬리날개   ???? ?

                         ??와 같다.  이러한 신앙관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바르게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피동 되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충성이라 하며 구원을 이루어 나감에 있어 세상을 보매 사대관(四大觀)적 인생관이 사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세상에 살면서 사건, 환경, 마찰, 충돌, 대립 등이 올 때 그런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나의 이성과 몸이 온전히 영을 쫒아(성령님) 그런 사건, 환경... 등을 맞아 나감으로 해서 내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영능의 능력자가 되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광범위하게 표현하기를 [[주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의지성(神의意志性)을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충실하는 것이 곧 충성입니다.



3 .  하나님의 구원의지(救援意志)

                                                            



성도 내가 충성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피동 되어 그 의지에 죽도록 따르는 것이 충성이라면 그 구원 의지(救援意志)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명확해야만 바른 충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人間을 創造함에 있어

하나님은 인간이 없어도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고독을 느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 좋은 천국을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이웃에서 내 자신 속에서 이러한 속성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 그 사랑의 욕구가 하나님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 창조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입니다. 어떤 대가나 봉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아무것도 줄 수도 할 수도 없는 존재인 나를 하나님은 창조 하시고 그 좋은 천국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목적과 계획과 섭리 속에 인간을 창조하였으니 그 창조에 부응(副應)하는 인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충성하는 것인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


인간이 창조됨에 분명한 원인(천국)과 동기(사랑)와 목적(천국의 한없는 누림) 하였음에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바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창조의 목적(目的)을 이루는데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큰 의미에서 구원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죄인 된 나를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영생이란 무엇인가???하나님과 수수관계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

                            ?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법(진리)으로 통

                            ?치되는 세계를 예수님의 성분과  성질로

                            ?만들어진 단 일체의 구원인격으로 누리고

                            ?다스리며 쾌락적 희락을 즐기는 것을 말

                            ?한다.


이 누림에는 차등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저희 상이 큼이라) 큰 상이라 함은 천국에서의 누림이고 이 상은 현재의 내가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피동 되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충실히  이루었나 하느냐 에 따라 각자의 상급이 다르고 각자의 면류관이 다를 다릅니다.



4 . 생명의 면류관



                               


건국이래 한국인이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는 황영조 선수가 처음입니다.  물론 일제 시대에 손기정 선수가 있었지만 그때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일본 제국의 국민의 자격으로 올림픽에 출전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그의 머리에 월계수 관이 씌워지자 그 머리에 쓰여진 월계수 나무로 만든 관은 면류관이 되었고 그 면류관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의 면류관이 다같은 면류관이 아니듯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고 해서 다같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천국은 다 똑같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경우 하나님의 공의성이 훼손됩니다.  누구는 죽어라 하고 예수 믿고 누구는 세상 즐거움 있는 대로 다 누리고 죽기 전에 예수 믿고 그래서 천국에서의 누림(상)이 똑같다고 한다면 공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하나님


우리가 예수를 믿음에 어떤 대가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이 상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함은 내세에 있을 우리 신앙인의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앎으로 하여 현재의 신앙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욕심이라는 심리 본성이 있습니다.

특이한 심리적 본성입니다. 기타 포유동물에서 볼 수 있는 욕심성은 단지 본능에서 나온 것뿐이지 이성의 발작으로 나온 욕심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성적 욕심 이라는 심리 작용을 인간 속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무엇을 욕심 내라고 이 마음을 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일류가 공동으로 먹고살라고 준 땅과 하늘과 바다에서 나는 모든 생물을 긁어모아 자기의 창고에 쌓으라고????????????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미녀들을 다 앉아 보고자 하는 희대의 발몽이 되라고???????????????

아니면 한 나라의 통치자가 다른 모든 나라의 제왕이 되기 위해 수만 명을 사지로 몰아 넣는 한이 있어도 땅뺏기 경쟁을 하라고???????????

하나님이 이것을 위해 욕심이라는 백해무익한 것을 주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니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라...........』는 대명제 아래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것에 욕심을 내라고 욕심이라는 심리 작용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도리를 욕심 내야 합니다.(이러한 욕심을 갖을 수 있는 길은 신인단일(神人單一)에서 나오는 의사성(意思性)의 단일(單一)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세계를 알아야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천국이라는 영원한 나라


그 나라는

시간적(時間的) 물질적(物質的) 공간적(空間的)으로 무한한 세계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임시 세상 개념으로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불립니다. 

그 나라는

만 왕의 왕이며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조하시고 신들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그 나라를 그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그 나라는

다스리는 법이 진리 법이니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라의 법이며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그 어느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정의(知,情,意)면에서 하나님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단일된 섬품만이 있기 때문에 충돌과 마찰이 없음으로 그 세계는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이상적 평화의 나라를천국과 같다 라고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나라는

강제적 구속 통치가 아니라 자원적 자의 통치의 나라이기 때문에 현재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실력대로 그 나라 그 세계를 누리고 다스리고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서 마찰과 충돌 없이 구원도리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신앙인격을 갖추지도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되면 자원적이요 자의적인 통치의 나라에서 실력이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본질(진리) 본성(사랑) 본능(생명)으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들어갈 수도 없고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 나라 그 세계의 실력자가 되어야 만이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이용할 수 있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일반적인 개념으로도 우리가 외국에 가고자 하여도 그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그 나라를 이용할 수 있는 실력과 인격을 갖추어야 만이 그 나라를 그 세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것과 같습니다.)



현존 세상은 천국의 준비 단계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서론에서 지금까의 글을 써 왔습니다.  너무도 많을 내용을 써서 혹여 라도 초점이 흐려졌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 어떤 이는 전신 마비 장애자로

? 어떤 이는 밥한 끼 먹지 못하는 극빈의 상태로

? 어떤 이는 근근히 먹고사는 영세민으로

? 어떤 이는 안락한 가정과 평한 세상에서

? 어떤 이는 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자리에서

? 어떤 이는 이 나라의 정치를 발전도 퇴보도 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 어떤 이는 과거 주먹의 화제에서 사형수로 

???????????????????????????????????????????????????????????????????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이면 잠이 듭니다. 각자의 다른 모습 각자의 생활 환경을 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계획하신 구원 의지를 완전하게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명이라고 합니다.  혹은 십자가라고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 : 24]]

이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하셨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충성을 하되 죽기까지 충성을 하여야 할 것인데 그 충성의 대상(목적)이 잠시 잠깐 있을 임시 세상의 것이 아니요 영원한 나라의 것인데 명령이 떨어 졌으니 죽으러 가자는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그 심령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자원적 자의적 충성이어야 하며 그 충성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의 면류관을 예비하는 것이니 그 면류관이라 함은 천국에서의 상이고 천국에서의 상은 영원한 세계의 누림입니다. 



결    론

              


사대관(四大觀)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신학적 체계성 이라기 보다는 천국을 소망하고 그 나라를 고대하는 성도가 이 임시적 물질 세상을 살아가는 바른 자세의 관점(觀點)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信仰的) 사상노선(思想路線)으로 예수를 믿으니 육체의 죽음이 두렵지 않고 육체의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환난이 무섭지 않고 환난이 무섭지 안으니 고통이나 즐거움이 붙잡지 못하니 고통이나 즐거움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물질 소유의 개념이 임시적 세상이 아니요 영원 세상에 두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니 사상적 정신적 심리적 개념의 혼란과 혼선을 조장하던 사탄 마귀가 물리적 방법으로 이 신앙 의지를 꺾고자 덤벼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미 언급 하였던 바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알고 나니 우리가 갈곳은 예수님의 품이요 예수님의 품으로 가고자 할진대 예수님이 뜻하신 바 구원 의지가 있어 그 의지에 피동 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이 구원 의지에 전적으로 피동 되어 사는 것을 예수님은 충성스럽다 하시고 어디까지 충성하기를 원하시느냐 하면 임시 세상에서 누리고 즐기고 소유하였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원하십니다.


작게는

식도락(食道樂)가 가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그 옛사람(예수님 믿고 거듭나기 전에 자신이 목적하고 살던 즐김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순교하는 것이요 .

작게는

생일날 남편이 장미 꽃다발 사 들고 들어오는 것을 기대하고 또 그것을 즐거워하는 즐김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요

작게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 은혜를 만방 천하에 알려 만민이 구원받도록 하여야 갰다 라고 하는 종교 영웅심(상당히 세밀한 부분으로 교회 건물을 세우자, 선교회를 조직하자, 사람 숫자를 늘려 보자,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지라도 이러한 가견적인 것을 이루어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종교 영웅심에서 나오는 것이다.)에서 오는 그 즐김성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 따라 주어진 환경 조건을 감사함으로 받아 들여 구원 도리 깨닫고(항상 기뻐하라), 현재적으로 진리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쉬지 말고 기도하라)을 사는 것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충성된 자입니다.


이렇게 사는(구원을 이루는) 성도를 예수님은 의로운 종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생명(여호와 하나님의 본성-우리의 형상을 따라-)의 면류관(누림의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론에서 말하였던 바 서머나 교회의 신앙 수준에 오르고 보면 마귀가 옥에 가둘 것이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쁨의 복음으로 드릴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신앙 수준에 오르지 못함으로 하여 사건과 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 이 수준에서 보면 사건 환경 개선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충성스럽지 못한 종의 기도입니다.  또한 나의 입장에서 보면 손에 들려준 면류관을 집어던지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서머나 교회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찌하던지 서머나 교회처럼 죽기까지 충성하여 갰고 그 면류관을 우리도 받아야 갰습니다.  그것에 욕심을 내고 예수를 믿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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