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제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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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열심당원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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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6:12-19)
들어가는 말
1.이름
열 두 사도 가운데는 잘 알려진 시몬 베드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셀롯 시몬 두 사람의 시몬이 있었다. 열광자의 이름은 사도들의 네 가지 명단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마 10:4/막 3:18/눅6:15/행1:15). 어느 전설은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를 좇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전한다. 신약성경에는 셀롯 시몬의 개인적인 역사가 없을 뿐 아니라 열 두 사도의 거의 끝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한 재능 있든 없든 그의 이름은 그가 열광적이며 성급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본 론
1.시몬은 열광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마지막으로 강력한 지파로 등장한 셀롯(열심당)등 예수 시대에는 여러 파가 있었다. 시몬은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한다. 사실상 카나나이오스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인데 이는 누가가 고쳐서 “시몬”이라고 부른 단언이다(눅 6:15). 가나안인이라고 잘못 쓰여진 단어는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옳게 쓰여진 카나나이스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명칭”이다. 시몬은 유대의 극단주의자이다.
1)셀롯(열심당)의 기원
주전 167년예루살렘 근처서 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사움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그후 “대장장이”로 알려진 장남인 유다 막카베오가 지도자로 계승되었으나 로마군의 정복으로 막카베 시대는 막을 내렸다.
2)로마제국시대(해롯 왕)
외교적인 방법으로 준평화 상태를 유지했으나 그러나 헤롯이 죽자 팔레스타인은 중에 갈릴리 태생 유다가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부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 을 무장시켜 유혈폭동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어 유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퀴리노는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유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혈참극 속에서 유다는 살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셀롯이라고 알려진 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3)바라바
외국의 세력에는 단호하게 대항하는 혁명주의자의 이름을 가진 셀롯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때 무모하고도 냉혹하게 모든 이익을 포기해 버렸다. 이들은 살인과 폭동죄로 복역하다가 예수님 대신으로 석방된 셀롯 사람 바라바의 착상이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때 셀롯인들은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면서 실질적인 내란을 일으켰다. 셀롯인들은 포위, 공격하는 로마군에게 장기간 대적하여 그들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4)사해의 서쪽 해변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사다에는 천여 명의 셀롯인들이 최후까지 로마군에 항재하다가 지도자의 불을 뿜는 열변에 호응하여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도 끊었다. 그들은 광적인 애국자이며 자유투사였고 로마제국의 점령에 항거하는 과격파였다. 셀롯 시몬의 종족들은 외국의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투쟁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고무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음모를 꾸미고 종교적인 열성이란 이름을 빌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난폭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시몬은 그와 똑같은 주의, 주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정치적인 모험은 가금 더 큰 위험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2.변화된 시몬
아주 열광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용하게 될 수도 있다.
시몬은 주님에 의하여 변화 되었다.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인가? 유유상종인가?
1)시몬이 온유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 이끌렸을까?
첫째로, 예수님은 대단한 열성을 가진 분이셨다.
자신의 안락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하였다. 너무도 힘겹게 일했기 때문에 어느 날 격노한 폭풍우 속에 있는 배에서 잠이 든 때도 있었다. 예수게서는 생활하면서 최종 목적을 위하여 온 정력을 솓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방해와 역경 속에서도 죄절하지 않았고 꺼지지 않는 정열을 가지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시몬이 꿈꾸고 있는 것보다도 더 신성한 왕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시몬의 새대에는 가난한 자는 마음대로 강도질을 하고 과부는 재산을 사취하고 일꾼들은 낮은 품삯과 불법적인 세금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이상 핍박을 받지 않을 살기 좋은 시대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시몬은 귀를 기울였다.
셋째로, 시몬은 직접 기적을 보았다.
그는 휴머니스트였기에 병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며 죽은자를 사리는 등 예수께서 성취하시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이전에 시몬은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을 본 일이 없다.
넷째로, 시몬은 예수께서 귀신을 쳐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게서 이방인의 단을 폐하고 환전상을 좇아내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것을 시몬은 목격했다. 시몬은 부패하여 민족에게 도무지 흼아을 줄수 없는어 유대교에 대한 이 조치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의거라고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다섯째로, 시몬은 자신의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임을 밝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요 3:13)
유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의 인자가 이 땅에 내려와 사악한 무리들을 멸하고 신성한 왕국에서 공의를 펴 영원히 다스린다고 예언했다. 시몬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언제인가 로마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혁명을 위한 능력을 가진 개혁자를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 메시야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미 임하였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도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세울 정치적인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음에서도 볼수 있다.
2)예수께서는 왜 시몬을 원하셨을까?
사도 가운데 셀롯인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심을 받는 예수님의 사역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몬을 택하신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여론에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시몬에게 주의를 환기시켜고 격렬한 시몬의 마음을 가라 앉히셨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는 데에 타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무시한것 같다. 예수께서는 조용한 태도를 갖거나 피동적으로 순종하는 무리들을 일률적으로 사도로서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각양각색을 망라한 소규모의 집합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시몬은 위험스러운 것을 맏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3)시몬은 반대자와 화해했다.
마태와 시몬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을까?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다. 마태는 로마제국의 도구였으나 시몬은 압제자의 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대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잡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것이다. 시몬과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능력을 증명해 주었다. 예수게서는 인간과 화해하시고 인간들은 서로 화목하였다.
4)시몬은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열광 그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정열을 좇는 목적에는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열정은 이성을 제약하는 수가 많으며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수도 적지 않다. 때로는 사람의 편견이 열광적인 색채를 띄게 되면 편견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지식이 없는 열광은 그릇된 교리나 이단, 심지어는 종교재판에까지 공격적으로 돌진하게 만든다. 잘못된 열광은 상대편이 진실하게 되는 사이에도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열광적으로 파괴적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를 시몬도 아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시몬의 열광은 자제되고 정화되어 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만일 족쇄를 벗어난 그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되겠는가? 주님은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셨다. 비록 셀롯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도들은 셀롯 시몬의 의견에 동정했을 것이다. 시몬의 열정은 사도들 전체에 불을 당겼다. 그의 열정은 쉽게 옮겨졌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불붙게 한다.
5)시몬의 미움은 사랑으로 변했다.
십자가를 위하여 칼을 포기한 시몬은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십자가의 처형이 있던 전날 밤에 그는 다락방에 주께서 열 명의 제자앞에 나타나신 첫 부활절에도 참석하였다.
주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시몬의 정치적인 야심은 온화한 포부로 바귀어 부드러워졌다. 호전적인 기질은 전도활동의 동기로 변하였다. 왕국에 대한 의견은유대를 위한 편협한 애국심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정열로 성장했다. 생명을 위하여 압제정권과 큰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통하여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깨달았다. 주님을 만나고부터 시몬은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게 하면서 온화하게 변했다. 증오로 시작한 사람이 사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3.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뜨거움이 필요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단한 열성으로 증거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행 17:6)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 열정 때문에 수십 년이 흐르기도 전에 복음은 힘차게 퍼져 나갔고 3세기가지 로마제국의 십분의 일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학생이 학문 속에서 전문지식을 얻기 위하여 한밤중에 기름불을 땠다면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시간을 들였다면 당신은 그와는 좀 “다르다”. 당신이 주일과 똑같이 월요일에도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단히 신앙깊은 사람이다.
이것은 사도의 시대로 되돌아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복음을 말하자 총독 베드로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라고 크게 소리쳤다. 만일 베스도가 무덤에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 바울과 자기의 위치를 바꾸고 싶을 것이다.
마리아는 일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기름을 발라 드리며 주 예수께 아낌없이 많은 것을 바쳤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은 것 모든 것을 진심으로 계산해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이도의선교사 헨리 마틴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했다. 혜린 마틴은 인도의 해변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불태우고 싶다”고 했었다. 스펄젼은 성실함이 영혼을 전도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자질이라고 말했다.“당신의 교회에 어떻게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하는 질문을 받은 스펄젼은 “열성을 가진 열광자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게 하듯 하라”(골 3:23)고 역설했다. 베드로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면했다.
셀롯 시몬은 예수님에게 무조건 감동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장래에 천국이 우리의 집이 된다는 것과 시험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살펴 주시는 구세주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을대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서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진실로 영원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에 더욱 감동한다면 우리도 시몬을 더욱 많이 닮게 될 것이다.
4.시몬의 순교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과 바벨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페르샤에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몬의 상징은 성경에 누운 물고기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오순절 후에 시몬이 그 어떤 제자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철저하게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시몬은 우리의 냉담함과 영적인 불구됨을 꾸짖는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맺는 말
1.자기의 개인적 야먕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다.
보인의 야망은 민족해방이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복음화에 있으을 알았을 때, 그는 과감히 자신을 두렸다. 사람마다 자기의 소원이 있고 자기의 이사이 있고 자기 뜻이 있고 열심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라는 사실이다. 내 야망이 준미의 뜻 보다 커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수가 없다.
2.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과 조화
진리를 절대로 타협할수 없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의 소산은 다양하므로 이를 양심의 자유라하고, 다양할수록 발전한다. ‘모든 것이 다좋으나 저 사람이 있어서 싫다는 사람은 좀더 자라야 한다. 더 성숙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의 생각을 용납해 주는데 있다.
3.성숙한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던 훈련의 배경
H.S의 지배에 자신을 맏겼을때 시몬이 시몬되었고, 복음의 일선지도자가 됨에는 H.S의 도우심이 있었다.(행 1:6) RA. Torry는 “셩령을 얼마나 붙드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붙느시느냐가 문제이다”라고 했다.
「주여! 오늘 성령으로 붙잡힘 받아 주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말하지도 말게 하시고, 시작도 말게 하소서」
열두제자연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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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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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2-4)
들어가는 말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던 천사가 성전완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건물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누가 상을 받을까?”추측을 했습니다. 설계자일까? 아니면 청부업자인가? 조각가? 목수? 구리를 다루는 기공자일까? 건축일을 하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기 때문에 완성된 성전은 걸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시골의 노인이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도데체 이 여인이 무슨 큰일을 했다는 말인가? 이 여인은 石公이 대리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데리고 오는 황소에게 건초를 충실하게 먹였을 뿐이었다. 작은 일과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작은 야고보는 말하고 행한 기록이 없다. 다만 12제자의 일원으로 선택을 받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는 것만 남아있다. 학자들은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한일이 없어서 잊혀진 제자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본 론
1.이름
주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는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3명있다. 교회사에서 이 세사람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자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1)12제자 가운데 중요한 제자
//요한의 형제로서“우뢰의 이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격 급한 사람인데
헤롯대왕에 의하여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한 분이다.(행12:1)
2)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주님 부활하신 후, 율법에 대한 이해를 둘러 싸고 예루살렘에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발언하였다.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한 후,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부각된 사람이다.(행1:14, 15:13)
그는 처음 부터 형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전15:4) 이때 결정적으로 주님은 단순히 육신적인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구세주로 오신 분이심을 신뢰하고 그의 삶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3)12제자 중 9번째로 기록된 작은 야고보(마10:3, 막3:18, 눅6;15, 행1:13)
2.가족관계
1)아버지는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있엇던 마리아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야고보”라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아교보보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불려졌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사회의 어느 회사 같은 데서 일을하다 보면 Miss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흔히 “Miss김”이라고 부를 때, 여러 Miss김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하게 되므로 “작은 Miss김, 또는 큰 Miss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별할 필요에 의해서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이 야고보는 키가 작았던 사람이며, 이 사람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알패오였으며, 요세라는 사람과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에게는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게 되면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는 세관에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레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마태로서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의 다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를 가리켜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가 야고보의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교 훈
1)열심당원이었다.
명단순서 도마(마태)->작은 야고보 ->다데오,시몬로 되어 있다.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다 민족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애국심을 가질때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애국심이 곧 신앙이라는 착각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 보다 더 크다. 이렇게 나라찾기 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민족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민족이라는 것보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더 숭고하고 더 위대한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족을 위한 열심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참으로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세리)친로마-앞잡이
????야고보(열심당)반로마-저격수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이상이 높으셨읍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로마인들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저항 속에서 그들의 청춘을 불사르던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으며, 그런가하면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지지 못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왜? 현실 참여를 안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기독교는 가진 사람에게도 예수가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꼭같이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입니다.
3)겸손한 사람
이 제자에 대한 별명을 “작은 야고보,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았을 뿐아니라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불평하는 무엇인가 말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은 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기 좋아했으면 한 마디 쯤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말이 안 되는 소리 한 마디조차 없었읍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숨어서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의 친구 이야기)
아리스다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 제자는 바울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설교한 일도 없습니다.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또 위대한 어떤 가르침을 교육시킨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어려울 때는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됩니다. 바울이 배에서 파선하고 어려웠을 때에 아리스다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인도인 섬에 도착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이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굉장한 일을 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꼭 있어주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잉 되어 주는지요! 저는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제가 설교 할 때에 그냥 앞에 앉아 있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설교자는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주는 사람, 이 사람은 작지만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정말 필요했던 제자였습니다.
4.순 교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다.”
유세비우스는 이 사람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약대의 무릎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늘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은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이 떠들며 아우성치고 있었을 때에도 말없이 문자 그대로 작은 구석에 들어가서 무릎 끓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작은 야고보가 아닌 야고보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보다는 기도를 더 즐기고, 설치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조용한 자리에서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며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하고 있던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유세비우스는 말을 계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서 이런 재미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제일 미남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에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보실 때 제일 미남을 뽑아내시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는 미남이었고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주님이 넘 좋아서, 떠들면 주님의 영광이 가리울까 봐 조용조용히 평생을 주님 앞에서 숨어서 주를 섬겼던 이 아름다운 제자 작은 야고보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습니다. 역사가 지나간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lstle)라고 바꾸었습니다.
*벼룩-자기 키보다 200배 점프
*파리-성냥개비(비례-사람-6m나무든다)
*1880년에 어느 이름없는 의학도가 학비 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여름에 너무 더워서 냉수 한 잔을 청하여 얻어 먹었다. 가난한 집에 우유를 가져다준 소녀를 눈여겨 보아 둔다. 20년후 병원의 외과주임은 어는 여인이 병원에 실려서 큰 수술을 받게되고 수술비 걱정을 하자 어느 분이 대신 지불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두었다. 눈물이 가득고여 감격어린채 편지를 본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적혀 있었다. “ 우유한잔으로 지불은 끝났습니다. Howad A. Kelly”
맺는 말
1.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
그것은 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하셨습니까? 생각나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씀을! 그런데, 이 세계에서 사실은 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작으면서도 제일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어느 민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구의 휴마라는 유명한 사람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이야기를 해서 현대인들은 다시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것만 생각한 나머지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좇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이어녕(문교장관)씨의 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는 작은 것을 지향하여 성공한 일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작은 것이 귀한 일을 하면 더 귀하게 여겨진다.
2.성실성
*교회 어려운때 꼭 나오는 사람!!
*목사가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되라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처럼 작은 것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큰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큼직한 것에만 관심있고, 작은것에 소홀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요? 이 작은 야고보가 남긴 교훈은, 그는 별로 요란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별로 선전할 만한 것이 없을 지 모르지만 그는 “작지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허하게 자기위채에 서서 종의 직분을 수행하며, 설치지도 않았고, 참견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나 조용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던 아름다운 제자였습니다.
열두제자연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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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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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12-24)
들어가는 말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인 유다라고 불리운 사도가 열 둘 가운데 두 사람 있다. 요한은 유다가 다락방에서 예수께 질문한 때를 기록하면서 배신자와 조심스럽게 구별하느라고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요 14:22)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도 유다라는 오명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의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는 유다를 "레베오, 성을 다대오"(마10:3)라 불렀으며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막 3:18). 그러나 누가는 그를 그대로 유다라고 했다. (눅 6:16/행 1:13) 두 사도의 명단을 비교해 보면 세 가지 이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유다의 가족관계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유명한 학자였다. 제롬은 다대오라는 제자에 관해서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본 론
1.생애
성경에는 열 두 제자의 명단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등장한 예가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면서 "성경에 꼭 한 번만 나타난 제자"라는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롯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씀에서 "가룟유다가 아닌"이라는 부분을 잘못 읽어 "가룟유다가"라고 읽게되면 안됩니다. 가롯인이 아닌 유다는 "예수님이 메시야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안나타내시려 합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내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저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절)
이 말씀에서 예수께 질문을 하는 모습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유다 다대오라는 인물이 출현하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1)성격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어떤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합니까? 대체로 머리가 좋고, 공부에 대한 향학열이 있는 사람만이 질문을 하게되는 것이지, 아예 공부하는 것에 관심도 없는 사람은 질문을 안 합니다.
어떤 상황에 굉장한 관찰력이 있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라는 점을다데오의 질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질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일종의 선교적관심을 지닌 질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선교적 차원으로서 포용력이 넓은 제자임을 알 수 있다.
2)별명
어떤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은 내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별명에 담겨진 것은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이다. 다대오라는 말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야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혹은 "사랑스러운"그리고 "가슴"이라는 두 별명의 뜻에서 사랑과가슴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어떤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던 이미지를 가진 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이 사람의 인물됨을 초대의 어떤 교부가 기록한 책 가운데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만큼 신빙성 있는 그런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단서로 채택될수는 있는 그 문서에 보면 단편적으로 열 두 제자의 인물 비교를 하는 장면에 이런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롯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롯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롯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소리지르고 흥분할 때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감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가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이름 값을 하지 못했고,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 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문서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주님을 찬양하며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호칭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의사인 누가]를 부를 때 그이름 앞에 애칭을 붙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자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다대오 유다,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유다, 사랑하는 유다여"라고 문서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앞에 나와서 설친 사실도 없고, 여진히 조용하게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이름이 없었지만 고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참 좋으느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벽을 쌓으려고는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벽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래서 벽 뒤에 숨고 상대을 벽 뒤에 물아 붙이려는 그런 세대의 풍조는 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는 조용하지만 열 두제자 가운데서 얼마나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2.순교
시리아로,아라비아로,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정말 놀랍고 눈부실만한 선교 활동을 한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교훈
다데오에게는 특기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닙니다. 또다른 제자를 전도하는 일 가운데 앞장을 섰던 제자도 아닙니다. 많은 제자들에게서 주의를 끌만한 두드러진 인물이나 개성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열 두제자중에 한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인격의 질적인 특성때문에 유다 다대오라는 제자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필요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데오의 삶을보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훈련을 배웁시다. 오늘날 주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신앙을 떠나서 자기 신념을 믿어야 한다는 식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이 수용하기가 곤란하고 난처한 이론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삶을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밝은 면을 바라보는 습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곳을 쳐다보게 되면 불평할 것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불평할 어떤 일들이 우리의 생활 중 없는 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유다 다대오는 늘 밝은 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조용한 섬김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밝은 면만을 바라보는 훈련! 성도들의 교제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방의 밝은 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다.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이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컵의 물이절반 이상이나 찼다고 감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은 똑같은 물이지만, 양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같은 양의 물이지만,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른 반응과 자세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 그 자체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안ㄹ 수가 없습니다.
2)삶의 동기에 있어 이기적인 욕망보다도 이타적 사명이 얼마 만큼 내 삶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불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얻고 내가 인정을 받는 그런 것이 더 커다란 동기가 아니라, 이타적 사명인 남을 유익하게 만들며 다른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이것이 더 커다란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우리는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면서 살려는 자세가 확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우리가 인생을 긍적적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과 감사를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가장 작은 것에도,가장 사소한 것에도 늘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래서 주님의말씀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 많이 주님을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더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로운 삶의 이 두가지 요소는 성경에 거듭 강조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과 감사입니다. 내 마음속에 얼마 만큼 찬양이 넘치고있는가, 그리고 내 마음속에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들을 향한 감사가있는가라는 것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한 두번, 또는 이따금씩은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어떻게 늘 찬양하고 감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 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기록하면서 항상 감사할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라는 19절의 말씀은 "계속하여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찬양하며 계속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승리로운 삶의 중요한 비밀로서 에베소서 5:18의 말씀을 그 대답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술 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해서 생기는긍정적인 현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면 기분이 좋게 되고 또 노래하는현상이 나타납니다. 술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계속적으로 갖게되는 삶이 찬양과 감사를 강조하는 삶입니다. 계속 노래하고 기분이 좋으려면 술취한 사람들은 계속 마셔야 합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비로소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계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참으로 저를 지배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열망 가운데서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바치고 정말 주 앞에 순종하기를 원할 때, 성령께서는 내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나를 지배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고 내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리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유다 다대오의 삶이 가능할수가 있습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이 제자는
"이름은 없었으나 이름 값을 하고 간 제자,
이름 없이 빛도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
유명하지 않았으나 필요했던 제자"
이러한 이유로 이 제자를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 한 몫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는 베드로같이 될 수 없습니다.나는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유다 다대오는 될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유명한 사람이 안 되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내 이름 값을 다하여 조용히 이름없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이 삶을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더 많은 베드로보다도 더 많은 유다다대오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문화의 가장 심각한 약점 중의 하나는 졸병이 없는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 목사 한 사람이 우리 문화를 가리켜서 "졸병이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어린 아이에게 "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보면 거의 전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다 대통령이 되면 졸병은 누가 합니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행복한 졸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가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는 부목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목사가 없겠습니까? 사실 부목사님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목사를 천직으로 생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머리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도자를 돕는것이 내 직분입니다. 여러가지로 내 천성이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생각할때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위치를 지키면서 일하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래서 겸손히 그 위치에 서서 평생을 그일로늙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말입니다.
미국 교회에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목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분으로평생을 늙어 가면서도 그냥 기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부목사들은 그 직분을 원목이 되기전의 실습과정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리 역할을하려고만 하면 누가 손의 일을 하며, 누가 발의 역할을 하고 누가 심장의 역할을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직분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족합니다. 저는 이 문화 비평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 교인들에게 필요한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졸병이 없는 문화,,발이나 팔의 역할을 안맡으려고 하는 문화" 이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이며 교회의 비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가 필요하지만 더 많은 유다 다대오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하며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주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만 확장될 수있다면 그냥 기브고 그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유다 다대오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도록 기도하십시다.
열두제자연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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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지 못한 제자:가롯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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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3-10)
들어가는 말
1.유다에 얼킨 그림이야기
1)화가 엘 그레코(El Greco)는 교회로부터 사도 개개인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유다는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그리지 않았다. 배신 직전의 순간을 묘사하는 「겟세마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ㄴ에서 오른쪽 구석에 간신히 보일만큼 그려 넣었다.
2)한 화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여 시실리 성당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 아주 적격인 순진무구한 열 두살 짜리 아이를 발견하였다. 몇년 후 그 화가는 고난주간 까지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을 완성했다. 어느 날 오후 화가가 앉아 있는 술집에 만취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화가는 아직 그리지 않은 유다의 모델로 이 알콜 중독자를 선태가히기로 작정했다. 화가는 그 사람을 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비어 있는 벽을 가리키며 유다의 포즈를 취하여 달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부랑자는 흐느껴 울면서 “당신은 나를 기억 하지 못합니까?” 하며 버럭 화를 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그림을 가리키면서 “오래 전에 나는 저 아이의 모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유다에 대한 표현들
1)웝스터 新 學生辭典//“배신자, 특히 우정을 가장하여 배신하는 사람”
2)유다색갈//붉은 머리카락. 유다나무//유다가 목 매여 자살한 나무
3)유다염소//도살장으로 가는 가축을 앞에서 인도하는 동물
4)유다의 키스//비열하게 남의 등을 찌르는 가면을 쓴 친절한 행위
5)유다사제//예수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세속적인 이단자
6)유다 구멍//감방 안에서는 볼 수 없고 밖에서만 들여다 볼 수있는 구멍
3.유다의 저주 받은 이름
저주하는 뜻에서 사도들의 이름 중에 맨 끝 자리에 있다. (마10:4/막 3:19)
주님은 왜 이런 인물을 택하셨을까? 처음부터 배신의 위험을 알고 계셨을까?
운명적으로 배신자로 태어난 사람인가, 배신행위를 하지 않을수 없었던가?
본 론
Ⅰ.타락되기 이전의 유다
1.존경받는 사람
귀족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찬양받는다”는 뜻을 지닌 자랑스런 이름을 가진 유다의 출발을 훌륭했다. 헤브론 남쪽 조그만 성읍 유다 이쉬 케리옷(Judas Ish Kerio -th) 출신으로 갈릴리 출신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제자가 되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성실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2.잠재능력이 있었다.
주님이 택하셨을 때에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암살할 의도를 가지고 기회만 노리는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주님은 12제자를 택하시기 전날 밤, 철야기도를 하시고 신중히 사도들을 선택하셨다.(눈 6:12-12) 유다는 높은 이상을 가졌으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적임자였다.
3. 특권을 누렸다.
다른 사도들 처럼 유다도 예수님을 다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밤 하늘 아래서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유다는 산상수훈을 들었으며, 소경이 다시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폭풍을 잠재우며 귀신을 쫓고 성전에서 강도들을 몰아내고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해 줄 때 유다는 예수님의 앞에 있었다. 유다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도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귀신을 내쫓기도 하였다.(눅 10:17-20)
4.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를 보는 직책을 가졌다.
유다를 열 두 제자의 회계로 택한 것은 동료들이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음을 말해 준다(요 12:6).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돈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의 재정적인 전문지식도 다른 사도들보다 돋보였다. 또 그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들 전원의 동의를 받아서 그는 돈을 가방에 챙기고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다. 제자로 출발할 때에 그는 신중하고 정직했으며 유능하고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Ⅱ.타락하는 유다
1.유다의 타락의 실례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가혹하게 처형하기 전에 예수님의 무죄함을 탄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 온 것은 예수님의 무죄함보다는 자신의 조에 더욱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한 가지 사건 속에 뒤섞일 수 있을까에 대한 표본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말씀하셨다. 유다의 배신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의 하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또 우다가 행한 일은 너무도 극악하기 때문에 유다는 차라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라르치셨다. 그러나 배신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다에게는 배신자의 길을 스스로 택한 책임이 있다. 어떤 사람이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이 어떤 사람이 되글 선택한 사람이 유다이다. 유다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다.
2.타락의 단계
만일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책임을 알았다면 그는 왜 그렇게 악하게 타락했을까? 유다를 타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슬까?
1)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에서 점차 깨어났다.
유다의 사악한 행동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쳤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유다는 자신이 배신자가 되리라고는 꿈엗 생각하지 않았다. 서서히 악의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뮤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여러 차례 경고하신 일이 있으셨다. 유다는 세속의 왕국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통치할 것을 기대했다. 유다는 새로운 왕국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임을 깨달았다. 왼편 빰도 갖다대라는 교훈과 내일을 염려하지 말하는 충고, 이 땅에서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충고와 적을 사랑하라는 충고 등은 유다의 생리와는 상반되는 말씀이었다. 오천 명을 먹인 후 예수께서는 가까운 제자가 아니면 모두 자기로부터 떠나라도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하였다. 이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ㅑ 너희 가룟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직접 경고를 하셨다. 요한은 이에 덧붙여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킴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고 썼다.
2)유다는 탐욕스러웠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하여 고발했다.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12:7)고 말씀 하셨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유다의 그 동기는 악이며 마리아의 동기는 숭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것이다.
탐욕은 죄로 인도하기 때문에 십계명의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웃의 명예를 탐하면 거짓이나 중상을 하게 된다. 이웃의 재산을 탐하면 도둑질을 하게 된다. 유다의 탐욕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유다는 여러 번 들었다. 우리가 신랄하게 유다를 질책하기에 앞서 시간과 재능과 재주와 기회, 혹은 돈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원숭이의 욕심)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에 대한 유다의 환멸이 이 늘어나고 탐욕이 커지면서 배신의 무대는 설치되었다. 주님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절박한 재난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방법을 유다는 찾았다. 배신 행위는 너무도 사악한 일이기 때문에 누가는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눅22:3)고 했다. 요한은 이 끔찍한 짓을 설명하기 위하여 배신 행위에 두 번 사단이 들어갔으며(요 13:2,27) 유다는 사단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고 말하였다.
3.유다에 대한 주님의 경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첫번째 경고를 하셨다. 예수님의 눈이 유다의 발에서부터 굳어진 얼굴로 더듬어 올라갈 때 유다가 ㅈㅎ금은 회개하는 낌새를 느끼셨다. 아무도 유다가 회개하는 것을 알아차라지 못했을 때 분명히 유다는 긴장하고 불안한 가운데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의 두번째 경고는 유월절 식사 때였다. 사복음서는 제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팔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폭탄이 떨어졌다고 기록한다.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 조용해진 제자들은 제각기 ”주여, 내니이까?“라고 여쭈었다. 유다를 가리키면서 ”주여, 이 사람입니까?“하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유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의 무서운 반사적인 행동 때문에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흉악한 죄를 깨닫기를 예수께서는 원하셨다. 그런데 유다는 위선자답게 ”랍니여 내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다(마 26:25). 예수님을 노리는 유다의 시한폭탄의 시계소리는 다른 제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번째 경고는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가 배신자냐고 손짓을 할 때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옆 자리에 앉았으며 유다는 그 맞은 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23-26). 제자들은 귀한 사람에게 첫번째로 찍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찍어주는 의미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귀한 대우를 받으면서 유다의 얼어 붙었던 양심이 녹았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호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두려움과 회개의 기미를 함께 나타내 보이면서 유다는 마귀의 충동을 받아 그 즉시로 자리를 떴다. 유다가 제사장들과의 약속이행을 결심한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고 말씀하셨다. 밖은 칠흑 같은 밤이었으므로 유다의 마음도 깊은 절망의 늪을 헤메고 있었을 것이다.
4.유다의 입맞춤
유다는 제자들이 은밀하게 기도하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 곳은 유다도 예수님과 함께 자주 갔던 곳이다(요 18:2).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은전 30냥을 받으려고 갔다.
그 후, 겟세마네에서 고뇌의 기도를 하고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셨다.(마26:46)
제자들이 선생을 만나면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추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뚯이 통한다는 신호였다. 원래 입맞춤은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입맞춤으로 배신하는 것은 가까운 친구의 찻잔에 독약을 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5.유다의 비극적 종말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회개했으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회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예수께서 체포된 유다는 그 밤을 캄캄한 곳에서 숨어 지냈다. 이튼날 아침 예수께 선고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유다의 마음은 슬펐다. 은전 30냥이 그의 손에서 화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다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회당으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서 비탄에 잠겨 가지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조롱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아 감동했던 죄인 유다는 죄책감음 느끼지 않을 수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다.
유다는 큰 나무가 서 있는 근처의 벼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너머로 뱟줄을 던져 단단하게 잡아매고 밧줄의 한 쪽 끝은 목에 감아 매듭을 지은 후 낭떠러지로 껑충 뛰었다.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말한 유다의 죽음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행 1:18)고 설명하고 있다.
유다의 상징은 은전을 떨어뜨리는 지갑과 교수형 집행인이 갖는 올가미이다. 그의 상징은 완전히 비어 있어서 선을 행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다의 비극에서 얻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더러움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싹이트고 자라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숨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죄는 공개되기 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가리워질수 있다.
Ⅲ.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유다의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엄숙한 교훈을 남깁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각자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1.“가면을 벗고 자신에게 솔직하라”
가룟 유다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이중인격적인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노릇을 하다가 그만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속으로는 도적질하고 훔치는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정의의 투사인양 행동하는 그런 게임을 하지 마시고 우리는 가면을 벗으십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십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하십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자기의 의를 버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가룟 유다가 퍽이나 잘난 척을 하던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소”라고 고함을 치는 이 가룟 유다의 모습에서 얼마나 자기의 의를,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 신앙을 소유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사람, 굉자한 자기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십니다. 내 의를 버리십시다. 내가 주장할 의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중생의 씻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결 론
당신과 나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알고 있다. 우리를 변하게 해주십사고 그리스도께 간구할까? 혹은 직접 그리스도를 찾아 “주여, 주여”하며 부르짖을까?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룟 유다와 함께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 또는 우리만이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유다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을 때 열 한명의 제자들이 남았다. 맛디아가 유다의 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열 두번째의 사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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