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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남 ‘목사’의 자살, 과연 자기 희생적인가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자기를 희생하는 자살이 있다.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을 구하는 자살이 그것이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도저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는 상태로 결론내리고 자기의 소중한 목숨을 던져 상대방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의도를 갖는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여론을 만들어 힘을 가진 단체, 또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요구를 이끌어낸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자신을 희생하는 죽음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희생적 자살은 일단 두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먼저는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상대방, 즉 적(敵)으로 생각되는 대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어야 한다. 생활이 다양해지는 현대에 이르러 목숨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자기 생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곧잘 일어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런 자기 희생적 자살에는 다음 유형이 있다.
1) 애국적 자살
애국적 자살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는 행위다. 자신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숭고한 죽음이기도 하다. 1942년 촬영된 나치의 초대작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주인공이 “나는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자살한다. 이것은 괴벨스가 독일 제국의 위대함을 선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지만, 애국적인 죽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애국적 자살은 너무나 그 명분이 분명해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교과서나 이런저런 보도로 상당히 알고 있다. 물론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모두 애국적 자살로 분류할 수는 없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로 한정해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기 목숨을 던진 대표적인 예로는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를 들 수 있다<①기사 하단 윤봉길·안중근 참조>.
2)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자기 목숨을 던져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이 포함된다. 고(故) 강재구 소령(1937-1965)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6기생으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됐고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에 전속된 뒤 대위로 진급했다.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하기 전 10월 4일 홍천(洪川)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훈련 중 부하 사병이 실수해 수류탄이 중대원이 있는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산화했다. 수류탄이 터지면 모두 죽는 상황에서 자신이 그 수류탄을 껴안고 죽음으로써 여러 부하들의 생명을 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죽음이 자살이냐 자기 희생이냐의 문제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 판단에 의해 구별된다. 그 행위가 사회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행위를 인정할 경우 그러한 자기 파괴를 자살과 동일시하지 않고 승화시켜 ‘자기 희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자기 희생적인 자살이라 해도 그 근본은 다르지 않다. 다만 그 행위에 미치는 감정적·정열적·이성적 성격이 다를 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가치 체계를 결부시켜야 하지만 여기서는 ‘희생적 자살’이라는 특별한 ‘자기 죽음’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
이타적 자살이란 형태도 다양하고 상황도 가지각색이다. 죽은 사례 하나 하나가 특별하고 명확한 목적을 갖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격적 측면에서 일단 자신의 죽음을 통한 상황의 반전이나 반향을 중요시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거나 상황이 변화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결과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보다 나은 상태’를 안겨주려는 목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려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일종의 헌신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타적 자살은 때로 자살자가 기대하는 것과 이후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는 해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특별한 헌신의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과연 이타적인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유서의 서두에서 “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받을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한 점에서 자신 하나만으로 이 모든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던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단순한 기준에서 보면 ‘대통령이 왜 자살하냐?’고 반문하면서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 생각에는 적어도 구차한 삶을 영위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기보다 자신 하나 희생함으로 사건이 종결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녹아있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 분의 깊은 심정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해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다는 것 쯤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살아있는 권력의 압박으로 전에 그가 쌓아놓은 업적까지도 부정부패로 퇴색되고 단죄되는 상황에서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버텨내기 힘들다고 판단된다. 이런 점이 후속책으로 검찰의 지나친 사정의 칼날을 문제삼고, 더 나아가 현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물론 우리는 그의 죽음을 미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지는 말아야 하지만, 그의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만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이미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 특히 권력이 무엇인지 정치적인 측면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극단적 선택의 이면에는 그런 심정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보려는 것이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모로 갈등하고 있기에 후속 조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어떤 면으로든 정리돼 더 이상 불행한 사건으로 많은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온 국민이 바라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3) 단식투쟁적 자살
단식투쟁적 자살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단식하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문제를 두고 단식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다 죽는 것이다. 이는 성격상 사회적 문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에도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현대에 와서는 강력한 위협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는 편이다.
단식투쟁적 자살은 상황 반전을 위해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된다. 정치 권력과 결부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때로 이런 투쟁은 처음에는 죽으려 하지 않았으나 점차 상황의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죽음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를테면 아일랜드 공화국 군대는 항상 단식투쟁을 무기로 삼았다. 수많은 지도자들은 내전 중 투옥되면 단식투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죽어갔다. 그 중 프랑시스 휴즈, 보비 상드, 프라이즈 자매 등이 유명하다.
어떤 경우든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비극적인 방법으로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고 죽겠다고 위협해 자신들의 이념을 알리는 것, 그리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고위 성직자들의 ‘단식 투쟁에 의한 자살’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프랑스의 유력한 성직자들 대부분과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주교는 “죽음에 이르는 단식투쟁은 폭력이다. 이것을 신의 의지에 부합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교황청 내 일부에서는 단식투쟁에 대해 얼마간의 종교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단식투쟁은 자기 희생적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단식에 의한 자살과 희생은 엄격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희생은 ‘신에게 경의’, ‘영혼의 구제’, ‘동포에 대한 봉사’ 같은 대의를 위해 누군가 목숨을 버리거나 그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단식 투쟁이 정당화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 최후의 유일한 수단일 것, 성공 가능성이 있을 것 등이다. 단식투쟁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야지, 자기를 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로 단식투쟁이 본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단식하는 경우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단식이라는 위협적 수단을 가하고 그 일을 처리하려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실제로 죽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죽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투쟁을 진행하다 신체적인 이상으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자살은 순수성에 있어 이미 문제가 있다. 대개 정치적인 이슈를 걸고 단식투쟁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기에 단식투쟁은 단순히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황을 전환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리려는 각오로 하는 단식투쟁은 최고의 이타주의요, 자기 희생적 자살로 간주할 수 있다.
4) 민주주의와 복지를 위한 자살
복지를 위한 자살은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변하는 행위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려움이 많았던 개발도상국 시절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다. 대개 열사로 불리는 이한열, 박종철, 김주열, 전태일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분신·투신·할복·의문사 등 여러 형태로 목숨을 던졌다.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간곡한 염원은 한결같이 평등한 세상, 통일된 세상, 인권이 존중받는 민주주의가 꽃피우는 세상이었다. 아무리 힘들게 태어났어도 정의가 살아 약동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이들은 대개 군사독재 시절 폭압정치, 공안 탄압에 희생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소박한 서민들의 기본 생존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어린 삶의 개선을 외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추가된다<② 전태일 참조>.
5)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자살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성격의 자살이 있다.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 신에게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일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건을 종결하려는 마음으로 자살하는 경우다. 이런 자살은 자신의 한 목숨을 바쳐 여러 사람들을 구하려는 목적의 자기 희생적인 자살이다.
기원전 4세기 로마의 광장 앞에 커다란 틈새가 생겼다. 마을에서 가장 활력이 되고 있는 것을 꽂지 않으면 닫히지 않는다는 신의 계시가 내렸다. 당시는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인이 마을에서 가장 활력이 되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마르쿠스 쿠르티우스라는 젊은 귀족이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갈라진 틈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광장에 모여있던 로마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갈라진 틈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틈새가 닫혔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있다. 집정관 데시우스 뮤즈의 최후가 그것이다. 역시 기원전 4세기, 뮤즈는 파르테스군과 대결하는 로마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녀(巫女)가 자기는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치라는 계시를 받았다면서 지휘관이 목숨을 바치는 쪽의 군대가 이길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데시우스 뮤즈는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가 자신이 군대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살했다. 뒤에 그의 두 아들도 신의 계시를 받아 한 명은 갈리아로부터 승리를 얻기 위해, 또 한 명은 에피로스의 왕 피루스를 무찌르기 위해 자살했다.
물론 이런 자살은 그다지 효험이 없는 추상적 죽음일 수 있다. 잘못된 계시를 받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일 수 있고, 자기 자신이 팽창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됐을 수도 있다. 프랑스 잔다르크의 경우가 이런 점에서 논의된다<③ 잔다르크 참조>.
6) 자기 희생적 자살은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여러 면에서 양면적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살인가, 진정한 자기 희생적인 죽음인가 등의 질문을 갖게 만든다. 원래 희생적인 것이 아닌데 도중에 잘못해 죽음에 이른 것인지도 의문일 수 있다. 희생을 빙자하여 죽은 것인지, 여러 사람을 위해 죽기로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인지도 분명치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기 희생적 자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기준이나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을 비관해 자살하면서도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 미화할 수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힘든 세상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죽을 힘을 다해 살려는 의지를 상실한 채 명분있게 마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위해 진정으로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음은 물론, 머리숙여 고요히 손을 모아야 한다. 남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치는 고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sermon66.com/news_view.html?s=index&no=151335&hd=1&s_id=&ss_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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