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패너
1. 스페너의 생애와 활동
스페너는 ‘루터파 경견주의’의 설립자로서, 경건주의의 성립을 위한 몇가지 중요한 영햐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취하였다.
그는 1635년 1월 13일 알사스의 랍풀츠. 바일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성장과정에서 종교적 영향을 준 사람으론 그의 어머니와 대모였던 라폴스타인가의 여인과 그의 누이와 결혼한 요하힘 스톨(Joachim Stoll, 1615-1678)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요아힘 스톨은 그의 존경받은 조언자 역할을 해주었고 그의 저서 “경건한 소원”의 두번째 부록을 써주기도 했다.
스페너는 청년시적을 요한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와 청교도적 경건서적들과 더불어 성장했으며, 그후 1651년 그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에 있어서 엄격한 루터 교인이었던 단 하우어, 슈미트, 오한 스미트 아래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스페너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루터파 정통주의 신학을 전공한 후 제네바에서 연구 여행중 네덜란드에서 경건주의적 운동을 일으킨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e)의 영향을 입게 되었다. 여행 후 스페너는 잠시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하였으나, 1666년 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이 ㄴ교회 수석 성직자로 부임했으며 그는 그곳에서의 목회 생활을 통하여 진정한 회개와 경건에 대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교회들을 바라보며 교회 갱신의 프로그램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스페너가 설교한 ‘진정한 기독교’,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은 연설하면서, ‘줄어버린 가식의 신앙’을 톨로 할 때, 1669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분열을 경험해야만 했으나, 경건한 성도들을 남아서 1670년부터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콜레기움 피에타티스’(Collegium Pietatis, 경건의 모임)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한 성도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른 유사한 모임들의 모체가 되었다.
1675년 봄 스페너는, 요한 아른트의 설교집의 새판을 위한 서문으로서 자신의 “교회개혁 프로그램”을 펴났다. 이 서문에 실린 스페너의 교회 개혁안을 같은 해 제목을 ‘피아 테시데리아 또는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복음적 교회의 개혁을 향한 간절한 요망’으로 하여 별책으로 발간 되었다. 이 책으로 인하여 그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으며, 경건 운동 곧 교회의 영적 갱신운동의 중심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20년간 사역한 후, 1686년 삭소니에 있는 드레스텐의 교구로 임명되어 갔다. 여기서 그는 아이들의 종교교육은 계속하였지만 ‘경건의 모임’은 만들지 않았다. 그의 과제는 설교, 목회적 일, 교회법정의 의장이 되는 것, 루터교 경건주의에 대한 변명 등을 포함하는 것이 었다. 작센왕가와의 관계가 악화된 후, 그는 베를린의 성 니코라스 교회의 목사직 초청에 응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의 마지막 역서, 네 권으로 된 [신학적 성찰](Theological Reflections, 1700-1702)을 저술하였따. 그후 이 칸슈타인(C. H. von Canstein)의 편집으로 앞의 작품에 덧붙여 졌다. 1705년 2우러 5일 그는 그가 살았던 대로 고요하게 죽었다.
1. 스페너의 영성에 입각한 교회론
1. 교회관
스페너의 교회관은 철저하게 초대교회 회복이었다. 그는 이 지상교회가 모든 타락과 범죄로부터 회개를 통해서 선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개혁을 위해 교인 각자의 성화된 삶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스테너는 말하기를 “우리는 온전함을 구하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니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권면을 받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이룰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기독교인의 신앙이 발전할수록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함에 이르려고 애쓸때에 오히려 다 이루었다는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첨가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어느정도의 온전함을 이루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성도들이 온전함을 이루어야 할 의무와 모든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는 초대교인들의 사라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내에서의 사랑의 회복에 대해 말하였다. 초대교회와 같은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하며 둘째, 영적제사장직의 확립과 부지런한 실행에 있다고 하였다.
2. 성경관
스페너는 다른 모든 외적 표준들 보다 성경을 높였다.
스페너는 성경은 구체적 교리의 원천이며 규범이라는 루터교 정통주의에 동의 하였다. 그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따르며 개인 성경연구를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실천과 성경해석에 있어 ‘성령의 내증’을 강조하였다.
3. 구원관
독일 경건주의의 구원관을 언급하면 그것은 신앙과 칭의의 교리보다는 중생과 성화의 교리를 강조함이 그 특징이다. 스페너는 정통신학의 선포적인 칭의관(declaration Justifcatioins)에서 벗어나서 “칭의된 상태”를 강조하는 칭의관으로 전향함으로써 칭의의 개념에 성화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반드시 경건하고 거룩한 삶 곧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성회시키기 위해서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스페너는 절대적 의미의 완전이란 이 세상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완전을 추구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완전한 실현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셨다.
4. 성례전
스페너는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추도적인 식사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의 심령을 살찌게 하는 “영적인 잔치”로 인식하였다.
스페너는 합당치 못한 자도 성찬에 참여토록 허용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스페너는 모든 전통적인 논거를 가지고 유아세례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스페너는 원죄의 교리에 있어 매우 급진적 이탈을 하였는데 이는 워죄에 관한 조항이 단지 죄의 결과만을 말하고 있을 뿌니고 하나님의 긍휼이 일반적 종교의식 밖에서 어떤 효과를 미칠 수 있느지는 설명하고 있지 안하고 생각하여 세례받지 못한 그리스도인 어린이들뿐 아니라 유대인과 터어키 어린이들까지 원죄의 저주로 부터 제외시킨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고 나서 새 생명을 잃어버릴 가능성과 세례가 요구하는 새로운 복종에 대한 스페너의 강조는 전통적인 세례관을 심각하게 변화시킨 것이었다.
5. 교회의 직제
경건주의자들에 의하면, 바람직한 개혁이 수행되려면 교회에는 한 사람의 중생한 목사로는 부족했다. 그들은 만인제사장설이라는 루터의 기본교리의 대선언을 요구하였다. 스페너는 그의 경건한 소원에서 “영적 제사장”직을 더욱 강조하였는데 그는 영적 제사장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피흘렸고, 또 그것을 위하여 그가 성령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기름부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와 그들 자신들과 타인들을 위한 기도를 들리 수 있고 또 드려야 하는, 그리고 각자가 자신들과 그의 이웃들의 덕성을 함양해야 한는 권리”로 규정하였다.
이와같은 정신에서 초기 경건주의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시키고 있는 커다란 간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스페너는 “제사장”이란 칭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페너는 퀘이커교도의 입장을 피하고 성직자의 평신도간의 직능적 구분을 주장하였다. 공적사역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소명이 있어야 하나, 그것은 일반적인 영적 제사장직의 직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지 방해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스페너는 주장하였다. 특히 평신도들은 세례는 베풀 수 있으나 성찬을 집례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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