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9b-18 / 안식일의 참 의미
요한복음 5:9b-18 / 안식일의 참 의미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에도 안식일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신 5:15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에서 다시 한번 안식일 개념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더불어 구원의 은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안식일의 개념은 사람이 죽게 되면 흙으로 돌아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예표라는 사실입니다.
* 유대인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준수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7:21 이하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을 옮기거나 일하지 않는 법을 보다 자세하게 정했습니다.
그런 항목만 39개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세하게 했느냐 하면 안식일에는 바늘을 옷에 낀채라도 옮기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틀니도 끼고 다녀서는 안된 목발도 짚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이 악세사리나 부러치도 차용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들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보기에 안식일에 행하신 주님이 말씀에 따라 고침받은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안식일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게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이 되고 결국에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게되는 과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만큼 안식일의 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안식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키고자 하는 안식일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를 받아 감사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이 언제 생겼습니까?
천지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이것이 첫 안식일입니다.
이 첫날에 쉬면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그 엄청나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주의 은혜를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하나 하나가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습니다.
본문의 38년된 병자가 고침받은 사건은 육체적 질병과 더불어 죄의 문제까지 해결되어졌습니다.
이 환자는 최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날이 바로 안식일인 것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주님의 은총을 받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참 뜻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를 볼 때 그 손을 잡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대신에 그 행위가 안식일 율법에 어긋난다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세운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와 노력을 자랑했습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으로 가게 됩니다.
안식일은 지키는 것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의 시비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태 12:8)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다른 날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안식일은 주님을 위해서 구별된 날이라는 것입니다.
* 안식일은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이 강대상이 학교에 있는 교탁과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별되었기에 성물이라고도 합니다.
커다란 예배당이 다른 건물과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별되었기에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성전밖에 있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별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구별하였기에 성도라 부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도 구별하시고, 사람도 구별하시고, 생명도 구별하십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구별된 날입니다.
주님이 구별한 이 안식일은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안식일을 만드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분명 주님이십니다.
이제 주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 예수님이 이 날에 부활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주의 날, 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지킴으로 안식일을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날은 기쁜 날만이 아니고 승리의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신 날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안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날에 수셨습니다.
일을 끝냈다는 것은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안식일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들어 놓으신 천지만물과 인간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요 5:17)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있습니다.
치료하시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며 병자를 돌보고 죄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일성수는 우리도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바치는 날입니다.
옛날 대원군 시절에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수믿는 청년이 죽지 않으려고 병졸들이 잡으러 왔을 때 도망쳤습니다.
3개월을 피해 있다가 결국에는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3개월을 더 살려고 예수님을 모른체 하고 도망갔습니다.
3개월이면 밥 270끼니입니다.
270끼니를 더먹고 죽은 것입니다.
3개월을 더 살고 죽으나 덜 살고 죽으나 죽음은 매 한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죽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
은혜에 감사하느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사느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느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하는가?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에서 소금의 사명,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가?
어리석은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처럼 사람의 생명보다 율법의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면서 마
음에도 없는 실천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받은바 은혜를 나가서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또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하나님의 은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충만히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헌신하여 남을 섬기고 구원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