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외국인교회/요한복음 설교자료실

요한복음 5:1-9 /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1)

시골농군 2010. 7. 22. 14:56

요한복음 5:1-9 /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통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곧 가르치는 것과 복음 전파 그리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복음서는 20% 가량 병 고치는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돌보시며, 소외된 자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인간의 본능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영적, 정신적인 문제만 해결하시는 게 아니라,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질병도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깊고 넓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크고 위대한 사랑보다 상처받고,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 긍휼과 치유와 애정을 보이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 즉 예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게 첫 번째 기적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말씀으로 낫게 하신 게 두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적을 살펴 봅니다.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돼 더 이상 희망도 없는 환자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병 고치시는 일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병을 고치는 원리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어떤 죽음이나 절망도 이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에게 전달돼 살아나며, 귀신이 나가고 병을 낫게 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적 권위와 생명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각 복음서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때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마가복음은 “곧”, “바로”, “즉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때가 되어”라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요한복음은 “그 후에”라는 단어를 자주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 7번, 요한계시록에 9번 적용한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에도 “그 후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한 가지 특징은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때는 언제나 명절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큰 명절 세가지는 유월절, 초림절, 오순절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마 세 절기 중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의 문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개 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양의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십니다.

2,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성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구약 종교를 대표하는 그림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중에 양떼들이 드나드는 ‘양의 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양의 문입니다.

양의 문에서 시작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여러 번 양의 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양의 문이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도적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신 말씀으로 양의 문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병자들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는 ‘긍휼’, ‘자비’, ‘솟구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물을 애용했습니다.

연못은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간헐천 같은 것입니다.

가끔 한번씩 물이 솟구쳐 오르는데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물이 솟구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이 오를 때 곧바로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든 사람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설입니다.

왜냐하면 들어가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행각 다섯 개가 있고’라는 기록입니다.

또 행각 다섯은 구약 종교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각 다섯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세오경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이라는 히브리 숫자는 자비, 긍휼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에 특별히 베냐민을 사랑했는데 그에게 음식을 줄 때 다섯 배를 더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보리떡이 다섯 개입니다.

다섯은 사랑과 긍휼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베데스다 못가의 많은 병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종류의 불치병 환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환자들로 인해 주위는 지저분하고 더럽고 악취도 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모여 있을까요?

4절 말씀에 나타난 전설 때문입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병자들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익이 있고 돈이 된다면 아우성을 치고 몰려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종교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치 “율법을 행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것이다, 제사를 통한 예배로 구원받을 것이다.”는 생각으로 종교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