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외국인교회/요한복음 설교자료실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의 사랑 - 독생자

시골농군 2010. 2. 20. 16:49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의 사랑 - 독생자

 

보통 자녀들은 부모님을 닮습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면 부모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청조하셨습니다.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실 수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창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라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했고, 싫어 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다라 살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리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대로, 욕심대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을 탕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싶어서 세상으로 나간 탕자이야기처럼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괴로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나중에 사랑하지 않게 되어 헤어질 때에도 많은 아픔과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자기는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일방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경우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보다도 더 나쁜 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그 고통과 아픔을 드린 것입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제 멋대로 살고싶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부모를 떠나 살면서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탕자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부모를 버리고 나와서 사는 아이들 중에 건전하게 바른 삶을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술과 담배와 마약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문란한 이성교제로 인하여 삶이 완전히 파괴되어 집니다.
회복 불능의 상태까지 떨어지는 모습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다른 사람까지도 파괴하며 삽니다.
어떤 경우는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그 탕자의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자신의 욕심을 따라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나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과거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 멋대로 살아왔던 전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없이 제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점잖은 것 같고, 고상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거리의불량배와 똑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으며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인전해야 합니다.
(시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이사야 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우리가 자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교만하고 고상한척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거듭나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지렁이 같고 벌레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되면 고통과 함께 그에 비례하는 미움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배신한 그 사랑을 다시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과 상처로 인하여 우리를 미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하니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기 우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가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과 상처를 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잘못된 사람을 바르게 합니다.
삭개오는 비난과 웃음속에서도 자신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서 보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 한마디에 모든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삭개오를 변화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에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 중에 삶이 힘들고 어렵고 하루 하루가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분들이 있습니까?
그 고통과 어려움만 보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줄 수 없는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불량자 같은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앞에서 솔직히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