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과 선교
제목:교회성장과 선교
저자는, 저자가 참석했던 1980년 5월과 6월에 각각 열린 멜버른 회의와
파타야 회의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논의의 결과들을 비평함에 있어 멜버른
회의에서 표명한 입장을 지지하고 파타야회의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
는 자신의 선교신학적 견해의 정당성을 [라틴아메리카]라는 상황을 들어 예
증하고자 했으며, '상호간의 도전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264)에 대한 해답
을 제시함으로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과 연루되어 있는 기존의 선교정책을
탈피하고 제3세계 민중들의 상황에 적합한 선교를 전개할 것을 도전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는 두 회의에 대해서 "멜버른 회의가 방콕과 나이로비의 흐름들을 배
경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열린 모임이라면, 파타야 회의(태
국,1980)는 복음주의적인 "세계복음화" 전통의 영향 속에서 열린 모임" 이
라고 지적한다. 두 회의의 내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멜버른 회의는, 교회들에게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억눌린 자들의 울부
짖음을 듣고, 인류의 3분의2를 비인간화시키고 황폐화시키는 이 세계의 상
황의 변혁을 위해 일함으로써 이에 응답하라고 촉구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개인적 변화의 필요성도 강조한 반면,
파타야 회의는, 전문화된(준-교회) 선교기관과 미시사회적(micro-
social) 현실에 선교신학적 초점을 맡추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 회의에서도 멜버른 회
의와 마찬가지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그 저변에 흐르고 있었
으며 일단의 참가자들이 작성한 "우리들의 우려를 나타내는 성명서"라는 제
하의 성명서에 대해서 로잔느 대회의 집행위원회(LCWE)는 "복음주의와 사회
적 행동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두가지 모두가 우리가 해야 할
과업임을 기꺼이 재확인한다."고 답변함으로 [로잔협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위 성명서에서 요구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고 또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에 관한 소협의회를 준비하는 것에 관하여 소극적
인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세계 각처에서 복음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상황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각주에서 파타야회의를 옹호하는 와그너(Peter Wagner)의 입장을
반박하는 포먼(Charles W. Forman)의 비판을 인용함으로 자신의 입장을 나
타내고 있다. "파타야 회의에서 천명된 것처럼 복음주의가 최우선적 과제임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중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보고도 아파하지
않는 복음주의는 결코 최우선적 과제일 수 없다. 그것은 제일 뒷전으로 밀
려나야 한다. 자신들의 부에 대한 비판에 귀먹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복음주
의는 설득력이 없다. 자신의 안락한 지지자들을 두려워 하는 나머지 이 세
계의 억압과 착취의 근원에 대결하기를 거부하는 복음주의는 설득력이 없
다. 따라서 진정 설득력이 있는 복음주의는 모든 종류의 복음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의 개인적 사회적 태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복음주의이
다."(274)
저자는 파타야 회의가 나타내보인 회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그 회의가 나
타낸 '인간집단'에 대한 미시적 관심과 교회성장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고
본서 제3장 '다차원적 현상으로서의 교회성장' 반성적 성찰을 촉구하고 있
다.
저자는, "종교는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개인의 삶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있어서도, 다른 측면에서의 성장과 함께 지적인 측면에
서의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타락이다. 정지하는 것은 침체와 죽음을 의미한
다."라고 한 레이몬드 파니카(Raymond Panikkar)의 주장에 동의하여 성장이
라고 하는 범주는 모든 종교 현상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고 인정한다.
또한 그는 선교에 있어 성장의 필요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는 성경에 있
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종교관은 아브라함의 계약 사건에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종족의 신이 아니라 이 세계의 창조주요 유지자
라는 것, 그러므로 구원의 희망은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전파되어야 한
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신약성서 속에서 명료
화되고 구체화된다. 예수는 노예와 포로상태에 빠진 피조 세계의 해방을 선
포하고 인간과 세계가 그 본래적 소명, 즉 새로운 피조세계로 회복되어야
함을 언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장과 확장의 과정을 경험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
한 성장과 확장의 과정은 노력의 결과인 동시에 교회가 대망하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선교의 잠정적 목표인
것이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 선교적 확신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행2:47/ 계7:9,15:2-5).
그런 후에 저자는 "그렇다면, 하느님의 선교와 동일시될 수 있는 성장
유형 그리고 복음화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성장 유형은
어떤 것인가?" 를 물으면서 '성장의 다차원적 속성'의 이해가 중요함을 역
설하면서 '칠레 개신교회의 성장'을 교훈으로 제시한다.
선교의 기형화로서의 교회성장: 칠레 개신교의 경우(1910-1975)
칠레 개신교도의 대다수는 오순절파(Pentecostal)의 사람들이다. 1920년
대 이래로, 교회의 역사는 오순절파 성령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밑바닥에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흐름이 있었다. 1930년 대에 들어와서
토착적 지도세력이 선교사들로 부터 지도력을 이전받게되자 교회는 급성장
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서 1960년에 이르기까지 십년 단위로 신자수가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1920년에 54,800명 이던 것이 1960년에 오면 425,700명
에 달하게 된다(1920-30 1.46% /1930-40 6.45% /1940-52 6.62% /
1952-60 6.60%). 이 묘사는 산술적 증가 뿐만아니라 조직적 성장까지를 포
괄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토착민 중에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고, 자율적 재
정구조, 상황화된 예배의식, 역동적인 공동체 생활, 그리고 힘찬 복음적 증
거 등이 놀랍게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성장은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은 선교의 침체라는 역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적은,
첫째, 통계적 증빙자료의 부정확성이다. 파딜라(Rene Padilla)는,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오는 사람들 뿐아니라 "교회를 떠나는 많
은 사람들"까지도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위에 열거된 통계에는
교회를 포기하고 떠난 사람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숫적 증가는 "교회적 자본주의"라고 규정될 수 있는 공격적이고
분파적인 경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갈베즈(Miguer Galvez)목사는 산티아
고에서의 오지선교 평가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20년 내지 25년
동안 칠레 교회는 추문, 거짓지도자, 경제적 이권쟁탈, 권력투쟁 등등의 악
마적 질환을 겪어왔다.
셋째, 칠레 개신교의 삶과 선교를 특징짓는 도덕적 기형화 문제이다. 칠
레 사회에서 예언자적 역할을(그 사회의 소외된 자드에게 자기 사회에 대한
저항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종교적 컨텍스트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행
해온 교회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하여 야만적, 반사회적 군사독재 세력과 결
탁하고 말았다.
끝으로, 1960년대 동안에 수적 성장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정체현상이 일
어났다. 10년 동안 불과 20.7%의 증가만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1930년-1960
년 간에 100%증가가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현저히 둔화된 것이다. 이 시
기에 칠레에서는 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칠레의 경험이 주는 교훈들: 교회 성장에 관한 몇가지 테제
첫째, 수적.조직적 성장 그 자체가 반드시 진정한 교회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s)의 말에 의하면, 칠레의 교회는
"교회적 비만증" 현상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신앙에 대한 반성 즉 화육의 실천이 없이는, 수적.조직적 성장은
비인간적 현실 상황 속에 매몰되어 버릴 수도 있다.
셋째, 교회성장은 선교의 징표이지 그 수단이 아니다. 선교는 교회 성장
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성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
회에 의해서 성취된다. 교회의 성장은 그 성취를 확증하고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 교회의 성장과 사업의 성장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교회
는 사업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교회의 선교활동은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
의 지평에서 전개되는 신앙의 효과적 활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한 평가기준은 현재의 조직면에 있어서의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미래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장한다 안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진정으
로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이나 방법의 차원을 넘
어선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일대 혁신을 경험할 것이다. 즉 그 구조는 하느님
나라를 섬기기 위한 구조로 바뀔 것이고, 그 선교적 실천은 인간 삶의 깊이
에서, 그리고 그 깊이로부터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포괄적인 노력으로
바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피압박대륙에서의 왜곡된 교
회성장현상은 '왜곡된 선교운동'의 결과로 보고 "제4장 현대 선교운동의 포
로와 해방"에서 비평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설은, 죄 가운데 태어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로 충만하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은 착취의 채찍을 휘두르면서 동시
에 복음의 향고(향고)를 발라주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는, 흑인과 원주
민즐 사이에서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복음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구조와
내용을 담고 있는 혼합주의적 종파와 관행이 출현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
다. 엄격하고 일방적인 이베리아적 카톨릭 교회에 대응하는 "민중종교"와
개신교 내부에 확산되고 있는 "성령운동"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토
착적 교파 안에서 두드러진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세례를 받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는 우상숭배로 타락해버렸다는 것이다. 하느님
을 추방시키고 불의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 다시 말해서 인간의
허영과 교만이 만들어낸 우상이 그 자리에 군림하고 있다. 고문, 재판없는
투옥, 박해등을 자행하고 있는 이곳의 모든 독재자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
백하고 그리스도교적 대의를 옹호한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이곳은 지구상의
어떤 이교적 대륙보다도 더 이교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이와같이 양분된 선교신학적 대립갈등 속에서 자신의 선교신학
적 입장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근원한 '상황화'의 신학적 정당성에서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