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외국인교회/요한복음 설교자료실

요한복읔 2:1-11 / 새로운 시대의 시작

시골농군 2009. 12. 26. 11:38

본 문 : 요한복음 2:1-11
제 목 : 새로운 시대의 시작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신앙의 단계가 있다.
1. 기적 신앙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아이의 눈에 엄마 아빠가 보여야 안심하고 잘 놀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혼자서 잘 놀다가도 엄마가 있나 없나를 확인 한다.
엄마가 안보이면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좋아하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엄마만을 찾는다.
이런 것처럼 기적을 체험하고 느껴야만 안심한다.
"하나님이 어디 안가시고 나와 함께 하는구나"

2. 표적 신앙=> 성숙한 신앙의 단계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비로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을 보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예수의 영광을 보는 하나의 표적 즉 사인이라는 것이다.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도 기적 신앙이 아니라 표적의 신앙이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미 마리아는 에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신앙도 기적신앙이 아니었다.
백부장은 이미 예수에 대한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미 하늘로서 오신 분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눅 7:6-7)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기적의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다.
무언가 눈에 보여야 하고, 기적을 체험해야 하고, 은사가 눈에 나타나야만 안심을 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신아이 약해진다.
불안해 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를 돌보고 있지 않으신다고 하는 마음이 들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오늘 우리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와 상징을 알아야 한다.
과연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가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반대로 생각을 하면 유대교의 낡은 관습과 율법주의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는 단순한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댕니의 정결예법은 유대인의 모든 삶을 좌우했다.
철저하게 거룩한 율법에 순종하고자 노력을 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과연 하나님의 엄청난 은총을 계속적으로 받았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에 그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고 도리어 죄만 더 짓게 된다는 사실이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다.
거룩한 것을 지킬려고 하면 그에 따르는 예법이 있어야 하고, 그 예법은 철저하게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거룩 또는 정결이라는 말의 의미는 중요하다.
거룩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 분리라는 뜻이 있다.
나누이다라는 뜻도 있다.
구분되다라는 의미도 있다.
세상 더러운 것으로부터의 구분이요, 분리요, 나누임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철저하게 이방인을 멀리했다.

오늘 말씀 6절에 보면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정결예법의 관습에 젖어있는 유대인을 말한다.
결례를 따른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손과 발을 씻는 의식을 말하낟.
세상의 더러운 것들 즉, 이방인, 세상적인 것들이다.
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흥겹고 교제를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자리이다.
그런데 결례를 따른다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과연 잔치가 그렇게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가?
세상의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옛날의 혼인잔치를 생각해 보라.
혼인잔치는 그야말로 온 동네의 잔치요 경사가 아닌가?
잔치자리에는 웬만한 죄는 용서가 되고, 함께 어울릴 수가 있게 된다.
심지어는 거지가 오면 그 거지에게도 푸짐한 상을 차려 대접을 한다.
거지가 왔다고 해서 무지막지하게 쫓아내지 않는다.
이것이 잔치이다. 얼마나 흥겹고 기쁘고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잔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정결예법만을 중시하고 사람을 얻압하고 굴레쒸우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암시해주고 있다.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당시의 유대교, 즉 낡은 정결예법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다,
돌 항아리 여섯이 의마하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의 의미르 생각해보면 1. 3이나 7은 완전수이다.
그러나 6은 불완전 숫자이다.
돌 항아리 여섯은 결국 유대교의 정결례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해도 그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에 결국은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돌 항아리 여섯에다 물을 채우고 그 물을 손이나 발을 씻는 것이 아닌 사람이 즐겁게 마시는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은 불완전한 유대교에 대한 커다란 도전인 것이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한마디로 위선과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눅 18:11-12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마태 23:25-27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못하는 유대교의 정결예법이나 율법주의 시대가 물러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익서은 아무 맛도 없는 물이 모든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에게 형식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마치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전도자 바울이 돤 것처럼 말이다.
고기 잡는 어부가 변하여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사도가 된 베드로처럼 말이다.
여전히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예수안에서 낡은 것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이제 죄악의 세상은 끝이나고 예수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우리 앞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안에서 새로운 인생의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삶이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용기를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