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군 2009. 10. 19. 10:32

요한복음 1:25-28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성도

1. 오늘은 본문 25절에 있는 말씀부터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어떻게 세례를 또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례는 이방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또 메시야에 의해서만 베풀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면 어렵습니다.

(1) 유대교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함께 이방인들이 개종시에 이방세계의 더러움을 씻는 의미에서 행하였습니다.

이것을 유대교에 들어오는 일종의 입단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세례요한이 이방인들에게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자들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세례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은 세례란 성경에 기록된대로 메시야가 오실 때에 사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한대로 세례는 죄를 깨끗케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며 메시야가 이루실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가 와서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케 하려고 세례를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도 아니라, 엘리야도 아니라, 선지자도 아니라 하니 저들에게는 궁금증이 더해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보게되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 36:25)라고 했습니다.

또 스가랴서에 보게 되면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례를 받음으로 죄가 씻어지고 깨끗하여 질 것에 대하여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을 볼 때에 저들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는 자가 어떠한 권위로 세례를 주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은 26절에서 저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제 세례요한의 대답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1) 첫째로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외형적인 세례를 주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레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3:11).

물세례는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성령과 불을 통한 세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다른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합니다.

불은 성령의 사역적인 측면에서 이해함이 좋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했지만 성도들은 정결케 하는 연단의 불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말 3:2-5).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수 있어도 정말로 인간의 마음과 영혼과 그 인격 전체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새로 지음받는 종교입니다. (새로운 창조, 곧 재창조)

죄인이 회개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에 갈 자가 새사람이 되어 천국에 가며,

비인격적인 사람이 변화를 받아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있을 때에 일어나는 축복입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에 강력하게 역사하셔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속에 역사하실 때에 죄인이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새로 지음 받는 사람이 되어 집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사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사로잡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신의 불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불세례를 받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시기나 질투나 야욕이나 권세같은 허위와 외식이 바뀌어 만민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능력의 전도는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하루에 300명씩 회개하고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성령받은 신자들은 서로 열열히 사랑하여 유무상통 하였고, 매일 모여 떡을 떼면서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성령받은 제자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소망도 하나요, 목적도 하나요, 사업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죄악을 미워했으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들은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랑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을 대할 때나 고아나 과부를 대할 때나 가난한 자를 대할 때나 부자를 대할 때나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영혼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이해타산을 가지고 한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모든 영혼을 불쌍히 여긴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국경이 없고 인종차별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세상 지식입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격이 변하고 영혼이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모든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이 함께 할 때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2) 다음으로 세례요한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를 가리켜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이렇게 단순히 물로 세례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들메란 끈으로 이어진 유대인 특유의 신발입니다.

신들메라고 하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샌달(Sandal)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래가 많은 지역이어서 외출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특히 손님이 왔을 때는 그 집의 가장 천한 종이 손님의 신들메를 벗기고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미천한 종으로 비유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한 분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분명히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같은 마음과 자세입니다.

세례요한같은 존귀한 사람도 예수를 섬기기에는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존귀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권위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 존귀성 앞에 입이 닫혀지고 무한히 그를 높여드리는 자세가 되어지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를 존귀하게 여기며 그를 높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도들의 위대한 역할이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되고 배우게 하고 따르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84:10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낮은 문지기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만 같이 산다고 하면 가장 낮은 신발이나 벗겨주고 발이나 닦아주는 종도 좋고 문지기가 되어 살아도 좋다는 겸손

의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마음이 없이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대제사장들과 바래새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너희들 가운데 계시다"고 요한이 말했는데도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디 계신지를 묻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오로지 목적은 세례요한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에 그 어떠한 교훈도 거절했으며 그리

스도를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있었으나 믿을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에는 누구의 마음속에 든지 하나님을 알고 바디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고 따르게 하고 순종케 하는 마음을 거절하지 마시고 그 마음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려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성령의 체험적 역사가 있고 주님을 따르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축복이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그와 대결하며 수십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을 때 저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걸을 수 없는 홍해였습니다.

이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으나 하나님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면 거의 불가능한 때와 불가능한 일을 놓고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지금 홍해 앞에 있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바다물은 벽이 되어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육지가 된 곳으로 백성을 이끌고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순종했습니다.

수십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낳게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이 이스라엘의 수많은 생명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세의 순종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존경하는 믿음으로 종과 같이 순종한 결과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기적 보기를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명령 앞에 여러분들의 의사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장을 내어 던질 때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을 보게 되는 줄 믿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지고 순종의 사람이 되어져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지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적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