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군 2009. 9. 24. 13:00

프랑스의 혁명사

1. 당시 프랑스의 계층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서, 그 깊은 원인은 앙시앵 레짐,즉

혁명전의 프랑스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구제도하의 프랑스에는

과거의 유물인 신분제가 아직도 남아 있었으며, 제 1 신분인 성직자와 제 2

신분인 귀족은 특권계급이었다. 성직자는 총인구의 1% 도 미치지 못했으

며, 독자적인 성직자회의와 특수한 법정을 가지는 조직체였다.

성직자는 면세의 특권대신 정기적으로 자발적으로 내는 공납금이 있었다.

또한 전국토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교

육과 구빈사업을 독점하고, 모든 출판물의 검열에도 참가하였다. 그렇지

만, 사회적으로는 주교나 수도원장 등 고위성직자는 귀족이나 다름없었고,

사제나 대다수의 수도사와 같은 하위성직자는 평민이었다. 이러한 성직자

의 계급적인 분화는 3부회에서 뚜렷하게 표면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로 인

하여 하위성직자대표들은 평민편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실

질적으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두 계급이 존재할 뿐이었다.

18세기의 프랑스귀족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출생에 의한 혈

족귀족으로서 대검귀족이라고 불리워졌고, 다른 하나는 부유한 부르즈와 출

신으로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 된 자들로서 특히 법관직이 많았고, 또한

세력이 컸기 때문에 이들 신흥귀족은 법복귀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졌다.

두 귀족의 차이는 법복귀족은 재산관리에 능하였고, 대검귀족은 이에 반해

토지등의 관리에 소홀리하였다. 위의 특권계급과 성직자로서의 신분을 제외

한 나머지 국민은 대다수가 제 3 신분으로서 남아있다. 이 남아 있는 신분

에는 부유한 자에서 걸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 금융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모든 종류의 법률가, 의

사, 문필가 등 자유업에 종사하는, 시민계급의 계층이 중요한 계층이다.

이들로 인해 지리상의 발견 이래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

을 하게 되어, 그들의 재산과 재능은 국가나 사회발전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민으로서 귀족계급보다 하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1,2 신분과는 달리 배제 되어 있었다. 그

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봉건적인 의식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발달이 저해되

고 있었다. 프랑스의 제 3 시민 계급에는 농민이라는 커다란 계층이 있다.

그들은 시민계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민층 - 대규모

의 토지를 빌어 경영하는 자본가적인 농업경영가 - 과 중산층인 자영농, 소

작농, 영세농, 그리고 토지가 없는 농업노동자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들의 토지로서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고, 18세기의 급격한 인구증

가와 분할상속제는 농민의 영세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2.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분위기

봉건적인 의식으로 싸여 있는 제 1,2 신분으로 인해 자본주의적인 사회형

성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에서 시민계급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그들

에게 적합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계몽사상은 이러한

시민계급에게 사상적 무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부와 사상에 있어서는 시

민계급에 있어서도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상층부르즈와는 귀족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였고, 귀족이 되고 싶어 하였

다.(그러나 그 문은 좁았다.) 다른 한편 도시의 수공업자와 소상점주 등 소

시민층은 생활이 어려웠고, 특히 수공업자는 자본주의의 발달에 압력을 받

고, 임금노동자로 전락할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자본주의의에 대한 반

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생활조건이 다른 시민계급 사이에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어떻

게 연결되었는가는 그들의 귀족에 대한 반감의 정도에서 알 수 있다. 그들

은 귀족에 대한 증오로 인해 견고한 하나의 결합의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

다.

임금노동자는 수적으로는 적은편은 아니었고,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만 한 단결력이 없었다. 그리고 계급

의식 또한 부재하였다.

한편 소시민을 모두 합한다고 하여도 제 3 신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의 수에 비하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8세기의 농민은 일찌기 농노신분

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국 농민의 농업노동자로 전락하는 것과는 달리 농민대

다수가 토지소유자였다. 다시 말하면 농민소유토지는 평균해서 30%정도이

고, 시민계급의 토지소유는 20%였다.

이처럼 농민이 차지한 토지가 많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가 부유하지 않다

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바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교회에 10분

의 1세를 바치고, 국가가 부과하는 직접세와 간접세 , 부역, 봉건적 공납을

영주에게 바치고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영주권의 착취가 있었고,

농민의 공동체적인 권리에 대한 영주들의 침해도 생겨났다. 이로 인해 소

농과 영세농은 대농경영이나 농업의 자본주의화에 반감을 가졌고, 귀족계급

에 대하여는 도시주민들보다 더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3. 프랑스 혁명의 원인

프랑스혁명의 깊은 원인은 앙시앵 레짐의 모순에 있었지마는, 직접적인 원

인은 왕실의 재정위기였고, 이를 통해 절대왕정에 최초의 타격을 가한 것은

귀족계급이었다. 이 재정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지만 오히

려 면세의 특권을 침해하고, 궁정경비의 삭감을 포함한 개혁이었으므로 귀

족과 왕비의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칼론느(Calonne, 1734 - 1802)는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재정위기를 타개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방면에 걸쳐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무엇보다도 앙시앵

레짐하에서는 모든 국민이 세금의 부과에 있어 고루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토지소유자는 신분의 차별이나 면세의 특권 없이 일률적으로 현물로 납부하

는 것을 개혁안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

였고 새로운 세금부과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는 3부회의 소집을 요구하였

다. 이는 귀족들의 절대왕권에 대한 반항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농민은 상승한 물가로 인해 생활이 어려웠다. 그리고 영국의 싼 섬

유제품과 금속제품이 프랑스시장의 침투로 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농사

마저도 흉작이 겹쳤다.(1786,1788년) 1년 후에는 경제위기의 현상마저 나타

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3부회의 모집에 있어 대표의 선출문제로 인해 앙시앵 레

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평민대표를 중심으로한 국민의회가 3부회의

뒤를 이어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국왕과 귀족이 진심으

로 양보하거나 새로운 프랑스의 창조에 협력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 당

시 국왕인 루이는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이 소식은 파리시민을

긴장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로인해 평민대표를 선출한 파리의 선거인단은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군대를 조직하였다.(후에 국민방위군) 이들의 무장을 위해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7월 14일 바스티유 (Bastille)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

다. 민중의 눈에 압제와 전제의 상징으로 보였던 바스티유(Bastille)의 함

락은 혁명에의 민중과 폭력의 개입을 뜻하는 동시에 민중의 첫 승리이기도

하였다.

4. 프랑스혁명의 경과

바스티유(Bastille)의 습격은 전국을 혁명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다. 지

방에서는 파리를 모방하여 종래의 행정기구 대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자치

위원회와 민병대를 조직하였으며, 농촌에서는 곳곳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귀족의 혁명저지를 위한 음모와 이것의 앞잡이로 외국군대를 이용하려 한다

는 풍문은 농민들 사이에 알려진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게 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이 농기구 등 무기로 쓸만한 것으로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만들었다. 수상쩍인 사람이 나타나거나 또는기다리던 비적이 출현하지 않

자, 공포속에서 극도로 긴장해 있던 농민들은 인근의 귀족의 성이나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봉건적 권리가 적힌 문서를 찾아 이를 불살

라버렸다.

이런 농민의 폭동소식은 파리의 국민의회의 시민대표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 중에는 봉건적 권리의 소유자가 있었고, 그래서 농민의 행동에 재산권

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지지기반은 농민이었다.

시민혁명은 전국에 확산되고 크게 진적되었다. 이때 국민의회는 혁명의 원

리와 리념을 천명할 필요를 느끼고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하였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주장과 정치, 법, 등에 관한 여러가지의

것을 주장하였다.

루이는 이러한 혁명에 소극적인 저항을 할 뿐, 혁명의 진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의회내에서는 혁명을 주도해오던 애국파에 분열이 생기

고, 파리에서는 민중의 선동이 일어나고, 흉작으로 인한 물가의 상승,실업

자 증가등 이러한 상황에서 기묘한 10월 폭동이 일어났다. 서민층 부녀자

들이 빵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였다. 민중과 국민방위병이 그 뒤를 따랐

다. 이들의 압력에 못이겨 루이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거처를 옮겼고, 애국

파의 온건파는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의 시작일 뿐이

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의 시민병이 잘 훈련된 프로이센군에게 발미에서

뜻깊은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공회는 다음 날 왕정을 정식을 폐비하고 공

화제의 출발을 알렸다. 이와 더불어 주요한 문제는 루이 16세의 재판이다.

성격을 달리하는 두 정파는 이 재판을 통해 대결의 기회를 가졌다. 지롱드

당은 최소한 사형은 면하게 할 작정이었으나, 12월에 시작된 재판은 거의

만장일치로 루이 16세의 유죄를 인정하고, 근소한 표차로 사형이 결정되어,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4. 프랑스혁명의 의의와 이념

프랑스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

대를 열어놓은 혁명이었다. 절대왕정을 타도하여 시민계급의 권력쟁취를

이루었다. 즉 정치적인 권력이 시민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봉건적인 잔재

를 제거함으로 자본주의의 보다 더 순조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사회

적으로는 신분제로인한 불평등, 특권을 타파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시

민사회로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구습에만 얽매였던 종교적이고 전통적이기만 했던 사고,전

시대적인 사상에 대한 계몽사상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시민계급

의 혁명은 어느 한 쪽면에서만 볼 수 있고,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고 본

다. 발생원인과 영향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떨쳐버리기 위해 혁명을 주도하거나, 새로운 사회로의 갈망으로 인

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보기에는, 그 당시의 농민의 의식적인 모습이나, 정

치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따져 볼 때 어렵다.

물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고 배고픔을 참지못해 아녀자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며 혁명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의회

와 계급의 불평등, 납세의 불평등에 대한 의식을 시민계급이 하고는 있었

다.

혁명의 기반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과연 어느정도나 시민계급이 갖고 있

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 혁명의 발생은 우발적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공포에 싸여 있던 농민들의 반항이 혁명의 한

부분에 힘을 가하였다는 것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프랑스혁명은 력사적으로 많은 면에 있어서 도움을, 방향을 제시한것은 사

실이라고 본다. 결과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형성에 큰 기둥으로

서있다. 과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지금 생각하는 프랑스의 혁명사건은 단지

무산계급의 반항이 성공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에게 프랑스혁명은 아주 선명하게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그리고

지금 시대의 불평등과의 비교를 요구하면서 다가선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봉건적인 시대로 인해 나타난 모순과 계층분화가 생

겨났고, 종교적인 전통으로 인해 계급의 분화가 생겼지만, 지금의 시대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가능케 된 자본주의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적

으로 불평등이 만연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전반적인 면에 있어 인간

으로서의 존귀함과 평등한 삶을 추구했던 프랑스혁명의 이념과는 달리 혼란

하고 부로 인한 불평등이 만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프랑스혁명의 평등

은 처음에는 법적인 권리의 평등을 뜻하였으나, 나중에는 빈부의 격차를 축

소한다는 뜻에서의 경제적 평등이었다고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로인해

불평등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의 리념과 의의에 대하여는 우리모두가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상황이며 혁명의 주체가 시민이고 농민이며

봉건적인 체계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로의 발돋움을 위한 노력임

을 지금의 시대에 잘적용하는 것이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역사

로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우리들 역시 새로운 시대로의 발돋움을

위해 노혁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