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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의 부활

시골농군 2009. 9. 24. 12:51

제목:중국교회의부활

저자:토니램버트

주제:교회

서론 : 천안문 사태

역사는 반복되었다. 1970년대에 중국 개혁의 희망이었던 등소평이

1980년대에 와서는 개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고 너무 보수적인

자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등소평 정권하에서의 중국의 모순이었고

또한 비극이었다. 경제 개혁이라는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등

소평은 공산 독재주의적인 당의 정치 노선을 포기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5월의 그날, 학생들과 북경 시민들은 강한 기대감을 가지

고 시위를 계속했다. 민주화 운동은 전국에 걸쳐 80여 개의 도시들

로 번져 갔다. 화물차를 타고 공장의 노동자들이 광장에 도착했고

환호를 하며 시위에 가담했다. 나는 심지어 학생들의 시위를 공공연

히 지지하는 군인들로 가득 찬 몇 대의 화물차도 보았다.

천안문 광장은 단식 투쟁으로 인하여 지쳤거나 또는 일사병으로

쓰러진 학생들을 돌보기 위해 출동하는 앰뷸런스의 경적 소리와 학

생들의 노래 소리로 인하여 매우 시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 와중

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 소리를 들었다. 인민 대회장 앞에 있는 수

많은 깃발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그린 깃발이 높이 들려 있었다.

크고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에는 중국어로 "하나님이 세상

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나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갔다. 모두 그리스도인

인 20여 명의 학생들이 깃발 아래 모여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큰

나무 십자가를 높이 들고 있었다. 그들은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

를 뜨겁게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호기심을 가진 구경꾼들이 이 기

이한 현상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만세 반석 열리니"를 찬송

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불렀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 그

리스도인들이 수도의 중심지인 천안문 광장에서 가두 전도를 할 수

있었다.

그 다음날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탱크들이 도시를 에워싸고,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때 즈음에 나는 북경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2주 후 인민 해방군이 시민들의 희망을 짓밟았다. 믿을 만

한 소식통에 의하면 천안문 광장과 주위 거리는 이삼천 명의 학생들

의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 순간, 정치 개혁을 원하는 모든 희망이 무참하게 땅에 떨어졌

다. 당의 보수 강경파들이 그들의 통치를 견실하게 강화해 갔다. 이

것은 중국 교회가 끊임없이 증거하는 정치 탄압과 사상 재주입으로

의 복귀였다.

오늘날, 중국과 수십만의 중국인 학자들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중 소수는 현국내 상황하에서도 돌아가기를 원한다) 해외에서

중국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기독교 신앙이 중국인들에게 점점 중요

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중국과 해외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지식인들이 주님을 영접했다. 공산당에 대한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

다. 천안문 사태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

고 있던 성선설이 크게 흔들렸다. 공산주의에 상처를 입고 삶의 의

미와 진정한 화평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에 대한 기독교

의 복음은 신선하며,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학생들과 젊은이 사이, 또한 농촌 지역에서의 괄목할 만한 교회의

성장은 공산당 이념에 경종을 울렸다. 중국은 영적 갈림길에 서 있

으며, 앞으로의 10년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이 책은 문화 혁명(1966-1976) 이후 중국 교회의 성장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2장과 3장에서는 극심한 박해와 활발한 영적 성장의

초기 단계였던 문화 혁명 기간을 조사하며, 4, 5장에서는 중앙 정부

나 지방 정부에서 작성된 정확한 문서를 근거로 공산당의 새로운 종

교 정책을 심층 깊게 분석하였다.

6장에서는 모택동 사망 이후에도 계속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

압과 박해를 처음으로 상세히 다루었으며, 또한 내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이나 또는 방문한 교회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7장과 8장에서는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사회학적 상황에

비추어 공산주의 사상의 위기를 조사하였다. 9장과 10장에서는 그리

스도인들의 간증과 공산당의 문서를 통하여 입증된 농촌이나 도시,

또는 농민이나 지식층 누구에게나 영향을 준 "기독교 열기

"(Christianity fever)와 영적 부흥을 다루었다.

11장은 중국 천주 교회의 상황을 분리하여 조사하였으며, 12, 13

장에서는 천안문 사태 이후로부터 1991년 2월까지의 중국 교회의 실

상을 심층 깊게 조사하였다. 이 책은 우리들이 중국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영적 교훈들을 열거한 14장을 마지막

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중국 교회의 실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는 각주

란에 완벽한 참고 문헌을 제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

라, 대담이나 편지 형식으로 작성된 중국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손수

구입한 생생한 자료들을 실었는데, 이는 이 책에 기록된 중국 교회

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쉽게 이해될 수 있고 또

한 믿을 만한 사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제 1 장

북경의 중심지인 천안문 광장. 쇠퇴한 왕궁의 아른거리는 노란색

처마가 나뭇가지 사이로 제비들이 날아드는 자금성(紫禁城)을 향하

여 북쪽으로 고색 창연하게 뻗어 있었다. 남쪽으로는, 포장용 돌과

콘크리트로 다듬어진 광장이 있고, 그 중심부에는 인민 영웅 기념비

가 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중국 혁명 역사 박물관이,

서쪽으로는 거대한 인민 대회장이 자리잡고 있다. 고대 중국 왕조와

현대 공산주의 중국이 경직된 채로 만나고 있었다.

1976년 봄, 나는 하급 외교관 자격으로 북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고위 관리층은 자주 숙청되었던 지도자 등소평을 따르는

자들과 보수 강경주의자인 악명 높은 4인방을 추종하는 자들 사이에

서 벌어지는 정치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긴장되어 있었다.

그 해 1월에는 문화 혁명기에 광신적으로 날뛰던 홍위병(紅衛兵)들

의 기세를 무마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주은래(周恩來) 수상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례 없이 많은 시민의 조문 행렬이 있었다. 1976년 4월

에는 각양 각지에서 많은 시민들이 그를 조문하기 위하여 조화를 들

고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는데, 이는 곧 보수 강경파에 대한 반

항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4월 4일 주일, 나는 중국 전역을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개신

교회인, 동단로(Dongdan Street)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예배에 참

석했다. 3명의 늙은 중국인 목사들이, 방문중인 몇 명의 기업가와

주재 외교관들을 위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당시에는 중국을

여행할 수 없었다.)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부

활절이나 성탄절에도 사복 경찰들이 황갈색을 띤 단조로운 교회 건

물 반대편 거리의 모퉁이에서, 어느 정신 나간 중국인이 교회에 들

어가지 않나 해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 교회는

모택동주의에 의해서 침식당하였으며, 수많은 목사와 신부들이 노동

수용소에 보내졌다. 북경 시내에는 버려진 많은 교회 건물들이 있었

다.

외교관들이 거주하던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 있는 천주 교회 건물

은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교회의 지붕 위에 있는 십자가

는 홍위병들이 치우지 않은 몇 안 되는 교회 십자가들 중의 하나인

데, 그 십자가를 제거하기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

교회 지붕 위의 십자가는 나에게 있어서 중국 교회의 상황을 암시하

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북경 시내의 좁은 뒷골목을 지나다녔

으며, 여기저기에서 학교나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거나 또는 폐허가

된 채 그대로 내버려진 교회 건물들을 발견하고 중국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아직도 중국에 교회가 존재하는가 ? 모든 길모퉁이에는 모택동 사

상을 찬양하는 붉고 하얀색의 벽보가 붙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공산당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예배를 마친 후 나는 걸어서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광장 가운데

에 있는 인민 영웅 기념비는 수많은 조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스러웠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은 따사로운 봄

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밤, 경찰들이 모든 조화들을 치웠고, 무장한 군인들이 인민

영웅 기념비를 에워쌌다. 시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많은 자동차와 광장의 남쪽에

있던 경찰서가 불에 탔다. 1949년에 공산주의가 설립된 이래, 처음

으로 시민 데모대가 국가 지도층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그러한 저항은 허용될 수 없었다. 4월 5일 저녁, 중무장한 수천

명의 군인들이 광장을 유혈 진압했고, 그로 인하여 적어도 백여 명

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강청(江靑)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이 승리를

거두었고, 등소평은 다시 한번 숙청당하여 그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무서운 공포의 장막이 전국을 휩쓸었다.

얼마 후, 수만 명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옹호론자"인 등

소평을 지지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당의 개혁을 요구하는 각양 각색

의 현수막을 든 데모대들이 지친 걸음으로 천안문 광장을 향하여 행

진해 나갔다. 데모대의 열기는 식어 갔고, 내가 사진을 찍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자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급속도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초대형

지진이 중국 북부의 당산(唐山) 지역을 강타하자, 많은 시민들은 이

사건을 한 시대의 몰락, 즉 모택동의 죽음이 임박한 것이라고 간주

했다. 늙은 모택동이 파킨슨병으로 위독하다는 것과, 그의 부인인

강청이 4인방의 꼭두각시라는 소문이 퍼졌다.

마침내 모택동이 사망했다. 1976년 9월 9일, 그의 사망을 알리는

공식 발표가 있을 때, 나는 상해(上海)의 한 공장을 방문하고 있었

다. 나는 방문을 급히 끝내고 우리 일행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상해를 포함하여 전국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겁에 질

린 4인방은 군대를 급파하여 모든 주요 다리들을 지키기 시작했다.

긴장과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0월 6일, 예견할 수 없었던 기습적인 "측

근 쿠데타"에 의하여 4인방이 갑자기 체포되었다. 2주일 후 북경 시

내는 그들의 몰락을 기뻐하며, 보다 나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는 시

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시민들은 춤을 추었고 젊은이들은 꽹과리와

심벌즈를 두들기며 기뻐했고, 그날 밤 불꽃놀이가 천안문 광장 하늘

을 수놓았다. 이번에는 당 지도층의 기쁨이 시민들의 기쁨과 일치했

다.

그 이듬해, 시민들은 중국 개혁의 희망인 등소평을 지지하는 표현

으로 작은 병을 나무 위에 매달았으며, 문화 혁명기의 악몽은 끝이

났다. 중국인들은 언변을 좋아하는데 중국말로 등소평의 이름인 "소

평"(小平)과 작은 병을 뜻하는 "소병"(小甁)이 발음이 같았던 것이

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 당시에도, 등소평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작은 병을 길거리에서 깨트리며 그의 정책에 반대했다-역자 주.)

등소평은 권좌에 복귀했으며, 지난날 그에게 물러가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이 위대한 지도자 등소평의 복권을 환영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천안문 광장을 향하여 행진했다.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시

민들은 정치와 경제의 변화를 희망했다.

1979년 봄, 나는 북경으로 돌아왔다. 중국은 바깥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색깔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쥐만 잘 잡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등소평의 사상에 입각한

실용주의 경제 정책에 의하여 모택동 사상은 급격히 쇠퇴해 갔다.

새로운 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공산당은 제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의 허락에 따라 중국 전역의 교회, 절, 사

원이 모든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했던 13년간의 극심한 박해기(1966

~1979)를 벗어나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중국 교회의 부활

중국인의 예배 참석이 허용된 1979년 부활절 이후, 나는 동단로에

있던 교회 예배에 연속 3주를 참석했다. 매주 교인의 수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급변하여 갔다. 오랫동안 굴욕 속에서

고통을 당하였던 노인들이 기도에 맞추어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

렐루야" 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성찬 예식 때에 포도주와 떡을 떼며

많은 성도들이 조용히 흐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중국인들이 진정으

로 예배 드리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 10여 년이 훨씬 지났다.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중국 교회는 발전과 성장을 거듭했다. 나는 중국 전역의 20여 개 성

(省)을 여행하면서 목사, 장로, 전도자, 가정 교회 지도자, 성도들

과 폭 넓은 교제를 나누는 특권을 가졌다. 몇 년 동안 나는 북경으

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성을 가기 위해 지나가다가 거의

우연히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1989년 5월로서 학생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천안문 광장은 수십만의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 노동자,

북경 시민들이 광장에 몰려들어 당의 부패를 비난하며 정치 개혁을

요구하였다. 모든 일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왔으며, 마치 공휴일과 같은 즐거운 분위기

였다. 5월 17, 18일 양일에 걸쳐 아마도 2백만이 넘을 시민들이 거

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와 대화를 나눈 많은 학생들은 진지하고 민

감했으며, 정부가 정치 개혁을 위하여 그들과 협상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보수 강경파인 이붕(李鵬) 수상을 비난하고,

등소평의 사임을 요구하는 장난스러운 풍자 만화와 표어가 나붙었으

나, 이 모든 것에는 악의가 없었다.

제 2 장

문화 혁명기의 교회 : 새로운 삶의 태동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해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1966년에

문화 혁명의 착수와 함께 시작된 홍위병들의 진압으로 중화 인민 공

화국에서 기독교는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믿어 왔다. 그 실례로, 홍

콩의 주요 영자 신문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의 상해 지국은 "상해에서의 기독교의 종말"이란 제목

아래 "상해에서의 기독교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는 8월 14일부로 끝

이 났다"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후, 같은 신문은 "사라진 단어 : 중국

에서의 기독교"란 제목 아래, 보스턴으로부터 중국을 방문한 한 천

주교 신부의 기사를 보도했다.

해외에 있던 학계나 교회의 지도자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

실례로, 워싱턴(Washington) 대학의 도널드 트레드골드(Donald

Treadgold) 교수는 "서방 세계의 개혁 물결과 겨우 명맥을 이어 오

던 중국의 전통이 뒤엉키는 와중에서 소수나마 남아 있던 중국의 복

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고 확언했

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79년에 중국 전역에서 교회들

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1984년에는 공산당의 지령에 의하여

교회를 통치하던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三自愛國運動委員會)의 대

표인 정광훈(丁光訓) 주교가 "1949년 이래 중국의 그리스도인의 수

는 70만 명에서 3백만 명으로 4배나 증가하였다"고 발표했다.

1987년에 그는 미국 목사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는 4천 개가 넘

는 교회와 수만 개소의 "가정 교회 또는 처소"에서 예배 드리는 3백

만에서 4백만 명에 달하는 세례 교인들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는 "중국 교회는 그 본질이나 영적 자질에 있어서 복음주

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덧붙였다.

정광훈 주교와 Ewing W. Carroll 목사와의 인터뷰의 typewritten

report, 16 October 1987. Beijing Review의 기사(n. 5)는 이를 기

초로 한 것이나 유용한 정보는 빠뜨렸다.

명확히 말해서 불과 20여 년의 역사 속에서 해외의 그리스도인들

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 상태에 있다고 믿어졌던 중국의 기독교는 살

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과

장된 일이 아닐 것이다. 역사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는

커녕,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공산당의 지배하에서!

문화 혁명기는 중국인들에게 극심한 박해의 기간이었으나, 그들

자신들이 증언하듯이, 하나님께서 모택동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수

백만 명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또한 불로써 연단된 순수한 교회

를 설립하기 위하여 특별히 사용하신 것이다. 문화 혁명은 제도화된

중국 교회의 마지막 흔적을 사라지게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말해서,

태풍이 지나간 후 중국 사회에 활기 찬 새롭고 비제도화된 교회가

재창출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이 주동한 문화 혁명은 표면상으로는 중국 공산당 내부에

있던 "수정주의자들"의 탄압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표적이 되었다. 물론 이들은 문화 혁명

기간 중에 탄압받고 박해당한 사람들 가운데 불과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66년 8월, 모택동은 보수 강경파 지지자들과 함께, 제11차 중국

공산당 총회를 소집하고, 중국 인민들에게 "4대 구습"(구사상, 구문

화, 구전통, 구습관)을 버릴 것을 촉구하는 16개 항의 지시 사항을

공포했다.

종교 문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홍위병들

은 모든 교회를 폐쇄하였고, 이 과정에서 성전을 모독하기도 했다.

모든 사원을 폐쇄시키고 코란의 연구를 중단하고 이슬람교 사제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낸다는 벽보가 북경 시내에 나붙었으며, 또한

1966년 8월에 중국을 방문중이던 한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자의 목격

에 의하면 "천주교인, 그리스도인, 불교 신자, 이슬람교도"들이 인

민들을 기만하고, 간첩을 숨겨 주며 또한 모택동 주석의 사상에 반

대하고 있다는 벽보가 나붙었었다고 한다.

상해에서는 홍위병들이 교회에 칩입해서, 성경과 신앙 서적들을

거리로 끌어내어 쌓아 놓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북경에서는 예전

YMCA 건물의 벽에 붙여진 1966년 8월 22일자 벽보에 다음과 같은 글

이 적혀 있었다 :

하나님도, 성령도, 예수님도, 성모 마리아도, 요셉도 존재하지 않

는다. 어떻게 어른들이 이런 것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슬

람교나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외국에 그 뿌리와 연관성을

가진, 우리 인민에게는 아편과 같은 반동주의적인 봉건주의 사상이

다......우리는 무신론자다. 우리는 오로지 모택동만 믿는다. 모든

인민들은 성경을 불태우고, 우상을 없애고, 모든 종교 집단을 해체

시킬 것을 촉구한다.

그 후로 2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박해의 소식들이 중국으

로부터 조금씩 새어 나왔으나, 최근에 와서야 박해의 심각성이 명백

히 드러났다. 많은 교인들의 가정이 가택 수색을 당했고, 성경이나

신앙 서적들은 압수당하거나 불태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매를 맞아

서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으며, 또한 고통으로 인하여 자살까지 하였

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오랜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중국에서의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파괴 행위와 지속적인 박해는

세계 기독교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심한 것이었

다. 구소련도 제 2 차 세계 대전 직전에 거의 모든 교회를 폐쇄시켰

지만, 스탈린은 전체 국민을 동원한 히틀러 침략 반대 대회를 개최

하기 위하여 그리스 정교와 타협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 때문

에 그리스 정교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고 하나의 제도화된 공

식 단체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지 알바니아와 북한

만이 철두 철미한 수법으로 끊임없이 모든 종교를 소멸시키려고 노

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교회가 영적으로, 더 나아가 수적으로 성

장한 것은 결국 문화 혁명이라는 고된 시련을 통한 결과였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동족의 고난에 동참한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외

국에서 유입된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면 중국인의 특성을 멀리하게

되고, 보다 외국화된다는 과거의 그릇된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난을 통한 자기 발견을 통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더욱더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

던,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모택동주의에 대해 크게 환멸을 느

끼게 되었던 소위 "문화 혁명기의 잊혀진 세대들"이 그러했다. 중국

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고난을 연단과 구원에 관한 성경의

긍정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문화 혁명의

실패로 냉소와 좌절에 부딪힌 자들에게 환난 중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증거할 수 있었다. (7장에서는 모택

동주의의 실패가 중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를 좀더 상세하게 논할 것이다.)

1966년부터 1979년 사이에, 제도화된 교회는 중국에서 완전히 소

멸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지하로 숨어 들었

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외적으로 1971년과 1972년에 북경에서는 두

교회가 문을 열었는데, 이 교회들은 외교관들을 위한 교회였다.) 그

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가정밖

에 없었으며, 이 곳마저도 굉장히 위험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강압에 의하여 파생적으로 생겨난 비제도화된 교회는 중국의 기독교

에 커다란 변모를 가져다 주었다.

종교적 의식과 규례는 상실하였지만, 가정을 토대로 한 중국의 기

독교는 1979년 이래 공식적으로 다시 문을 연 교회와 더불어 자의식

강한 독립된 가정 교회의 발전에 그 역동성을 제공했다. 그러므로

중국 교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정 교회의 역사적 기원을 이해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1949년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가정 교회의 역사적 기원

성경 공부나 예배 또는 기도 모임을 가정에서 갖는 것은 특히 농

촌 지역에 사는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1949년 이전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가정 성경 공부 모임은 전도 운동의 결과

로 형성된 초기 개척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의 농촌 지역에서 사역한 David Adeney 선교사

가 쓴 China : the church's long march, pp. 143~144를 보라.

그러나 공산당의 핍박이 교회에 가중되었던 1950년대에 와서부터

많은 신자들이 조용히 가정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 농촌에서는 토지 개혁 운동과 함께 거의 모든 교회를 폐쇄시켰

으므로, 신자들에게는 가정만이 예배와 성도들간의 교제를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는 1950년부터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왔지만, 1954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발족되었다. 삼자 애

국 운동 위원회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지향하며 중국 공산당의 목

표에 동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끌어져 왔다.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는 독립적인 교단들을 서서히 소멸시켰고, 나아가 모든

교회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었다. 1958년에 와서는, 대부분의 도시

교회들이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가 주도하는 "단결"이라는 구호 아

래 폐쇄되었다. 북경에서는 60여 개의 교회가 4개로 줄어들었고, 상

해에서는 200여 개의 교회가 불과 20여 개로 줄었다.

Bush, Religion in Communist China, pp. 231~233. 일반적으로

서방 세계에서는 문화 혁명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1958년경에 삼

자 애국 운동 위원회가 주도한 교회 연합 운동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의 중국 개신 교회가 사라졌음을 모르고 있다. Bush의 저서는 1950

년대말에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의 통제하에서 교회가 어떻게 붕괴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몇 안 되는 남은 교회들도 언제라도 공산당이 원하는 대로 타협할

의사가 있는 목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를 통해서 공산당의 목표인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 아래, 심지어

는 성경이 가르치는 몇몇 주요 주제는 강단에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예를 들어, 섬서성의 Taiyuan시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가 작성한

규정을 보라. Jones, ed., Documents of the Three Self Movement,

pp. 183~184.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의 조종에 의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남은 몇몇 정치

화된 교회들에 출석하는 것도 중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