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다극화 시대 - 티무르

시골농군 2009. 5. 19. 17:11


차가타이-울루스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차가타이칸의 오르도는 일리강 부근에 있었다. 차가타이가의 제10대칸 두아는 카이두와 동맹하여 대원의 쿠빌라이와 싸웠으나 카이두의 사후에는 대원의 테무르와 화해하여 쿠빌라이가를 몽골제국의 종주국으로 인정하여 전 몽골은 안정되었다. 그런데 1326년 달마시린이 차가타이칸에 즉위하였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알라웃딘이라 이름을 바꾸고 비옥한 오아시스가 있는 서투르키스탄에만 머물러 동쪽의 천산유목지방에는 무관심하였다. 1334년 달마시린의 처남인 부산은 칭기스칸의 야사존중, 즉 유목존중을 주장하며 달마시린을 살해하였다. 부산칸 자신도 그해에 사망하여 종제인 젱쿠시가 칸의 자리를 이었으나 자신의 동생인 에순테무르에게 살해되었다.

에순테무르칸도 오고데이가의 아리술탄으로 교체되었으며 아리술탄칸의 뒤는 다시 차가타이가의 카잔칸이 즉위하였다. 카잔칸은 1347년 카자간이란 아미르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렇게 달마시린칸이 즉위한 1326년부터 카잔칸이 죽은 1347년까지의 21년간 6명의 칸이 잇달아 교체 된데다가 1338년부터는 본거지 일리계곡과 그 일대를 전염병이 휩쓸어 정정이 어지러웠다.

1343년 동쪽의 차가타이가령에 토글룩테무르란 18세의 소년이 악스에서 칸에 올랐다. 투글룩테무르는 두아칸의 아들 이밀호자의 유복자였다. 토글룩테무르칸은 동방의 몽골귀족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서투르키스탄의 정복에는 성공하지 못한 채로 1363년에 사망하였다. 동방의 칸들은 이때부터 모굴리스탄칸이라 불렸다. 모굴리스탄이란 몽골인의 나라란 의미로 천산산맥 남북의 유목지대를 말한다. 모굴리스탄에 사는 유목민들은 서트루키스탄(트란속시아나) 주민을 카라우나스(혼혈아)라 멸시하였다. 이 반목은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차가타이칸들과 자립을 지향하는 부족장 아미르 들과의 대립으로 복잡하게 엉켜 차가타이칸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그뒤 서투르키스탄에는 몽골전통 바룰라스부의 티무르가 나타났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는 투글룩테무르의 혈통을 이어받은 동쪽의 모굴리스탄 왕국과 서쪽의 티무르제국이 나란히 서게 되었다. 토글룩테무르의 자손은 17세기까지 모굴리스탄을 지배하였으나 1680년 오이라트 준가르 부의 갈단보쇽트칸에게 멸망되었다.


몽골제국의 해체

중국을 지배하였던 대원-울루스의 몽골인 들은 1368년 명나라에 의해 중국에서 쫓겨나 몽골고원으로 돌아갔다. 그후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서로 싸웠다.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울루스도 1340년에는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란의 일칸국도 1330년 이후 정국이 혼란에 빠져 몇 개의 지방정권으로 분열되었다. 남 러시아의 킵착칸국도 14세기의 후반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몽골제국연합체가 부스러져 해체된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황금씨족의 칸위 쟁탈전을 들 수 있다. 칭기스칸 일족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정복지역을 일족의 공유재산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광대한 정복지역에 일족이 분산 파견되었으며 이들의 현지 독립화 경향은 피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유목국가에서 볼 수 있는 실력주의 계승법이 이어져, 제국에 흩어진 황금씨족 중 유력한 자들은 칸이 사망함과 함께 자신들의 계승권을 경쟁적으로 주장하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의 사후에는 몽골제국을 세운 칸의 권위로 제2대의 오고데이 만은 수월하게 즉위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제3대 구육, 제4대 몽케, 제5대 쿠빌라이는 일족간의 내란을 거쳐 칸으로 되었다. 이와 같은 싸움으로 제국내부의 통일은 약화되고 무너지기 쉽게 되었다. 여기에다 몽골은 어디까지나 유목민적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 초원생활을 해야한다는 논리와 새로이 획득한 중국, 이란 등 정착사회를 아우르는 새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대립하였다. 결국 이러한 대립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몽골제국은 지역별로 해체되어 갔다.




티무르

칭기스칸의 정복으로부터 이미 1세기 가까이 지난 때에 중앙아시아 서부의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땅 트란속시아나에 살고있던 몽골인들은 투르크계, 이란계 이슬람교도 선주민의 이슬람 오아시스정착문화로 녹아들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으로는 카슈가리아 계곡의 바룰라스족, 페르가나 지방의 잘라이르족, 발흐 지방의 스르도스족 등 오랜 부족 외에 새로이 형성된 몇 개의 부계 혈연집단이 있었다 1336년 4월 사마르칸드 남방 카슈가리아 계곡에서 티무르가 태어났다. 아버지 타라가이는 몽골 바룰라스족의 아미르 가계로 선조 대대로 차가타이가의 신하였다.

티무르가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서차가타이칸국에서 칸이 실권을 잃고 아미르들이 패권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었던 1360년 봄, 토글룩테무르칸의 모굴군이 트란속시아나를 점령하고 많은 유력 아미르가 살해된 때였다. 이때 25세의 티무르는 자진하여 모굴군 편에 서서 바룰라스족과 키슈지방의 아미르가 되었다. 사마르칸드를 점령한 모굴리스탄 칸은 맏아들 일리아스-호자를 왕으로 세우고 티무르를 보좌역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이를 발판으로 티무르는 착착 자기 지위를 쌓아가게 되었다. 이윽고 일리아스와 티무르의 관계가 악화되자 티무르는 먼저 카불에 거점을 둔 유력 아미르 후사인에게 복종하여 서차가타이군을 규합하고 그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일리아스의 모굴군을 몰아냈다.

1364년 아미르 후사인은 사마르칸드에서 쿠릴타이(집회)를 열고 차가타이가의 황태자를 칸으로 추대하여 서차가타이(트란속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아미르 후사인의 전횡이 심해지자 1366년 가을 티무르는 후사인과 헤어져 아득히 먼 메르브 근교에서 재기를 꾀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른 자는 2명의 의형등 집안과 청년시대의 친구등 260명 정도였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게릴라적 용병으로 발흐에 들어있는 1만의 아미르 후사인군을 농락하였다. 결국 티무르의 맹공에 적군은 대부분 도망하였다. 이로서 티무르의 실력이 알려지자 아미르 후사인은 평화를 요청하여 맹약을 새롭게 했으나 차가타이 아미르들의 지지는 급속히 티무르 쪽으로 기울었다.

티무르는 다음해인 1369년 칭기스칸가의 칸을 새로이 세우고 자신이 실권자임을 선언하자 차가타이 아미르 들이 속속 이에 합세하였다. 티무르는 이들 병력으로 아미르 후사인의 본성 발흐를 포위하였고 그는 살해되었다. 1370년 4월 차가타이 아미르와 이슬람의 지도자들은 티무르에게 복종서약(바이아)을 하였다. 몽골제국의 전통으로는 칭기스칸의 신성한 피를 아버지쪽으로부터 받지않은 자는 칸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이 칭기스통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아미르들에 대한 그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하여 티무르는 후사인의 후궁가운데 칭기스칸가의 딸 사라이물크하눔을 후비로 맞아들여 칸의 처남(쿨겐)으로서 아미르-티무르-쿨겐이라 칭하였다.




티무르 제국

1370년 티무르는 먼저 심복의 아미르들을 군대와 여러 관청의 요직에 배치하여 신정권의 조직을 굳히고 사마르칸드에 요새와 성곽 및 궁전의 건축을 명령하여 수도에 어울리는 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불온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차가타이 아미르들을 숙청하고 여러 부족군을 해체, 재편하여 심복 아미르들의 지휘하에 집어넣었다. 이러한 내부 정리 후 그때까지 억눌려있던 차가타이인의 왕성한 에너지를 티무르는 외부로 분출시켰다.

티무르는 사마르칸드를 보급기지로 삼아 자신은 오르도를 이끌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정복전을 감행하였다. 티무르는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으며 한번 내린 명령은 결코 취소하는 법이 없는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드를 세계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장엄하고 화려한 왕궁을 비롯하여 모스크와 마두라싸를 차례차례 건립하고 관개망도 정비하였으며 바자르도 크게 확장시켰다.

수도 사마르칸드는 유럽, 중동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서의 교역간선로와 러시아 및 킵착초원과 인도를 연결하는 남북의 교역로가 교차하게 되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란, 시리아, 동투르키스탄, 중국 등에서 온 기술자들은 유리 기기, 도자기, 융단, 자수, 제지, 무구등 각종 공예방면에서 기술을 겨루었고 도로, 시장(바자르), 대상숙박소등을 정비하여 사마르칸드는 모든 내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중추가 되었다.

"티무르가 즉위한 이후 킵착칸국, 인도, 타타르 등 여러 나라에서 사마르칸드로 가져온 상품은 실로 엄청나서 판매진열장이 동이나 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티무르는 기술관리에게 명하여 사마르칸드 성을 가로지르는 시장 을 건설하여 그곳에 상인을 초치시키도록 하였다. 시장을 건설하는 비용은 사마르칸드의 전 시민이 부담케 하고 공사는 작업반을 2반으로 나누어 주야로 시행했기 때문에 20여일 남짓한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이 바자르는 사마르칸드성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는 대 시장으로 규모는 상당히 크고 천정은 돔으로 덮여 있는데 광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곳곳에 창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티무르와 그의 부하들은 도시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주변의 초원이나 정원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사마르칸드 교외의 목초지에 세워진 티무르의 텐트는 한마디로 성이라고 할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것으로 그 주위에는 4만-5만 정도의 부하 들의 텐트가 가지런히 세워졌다. 이들이 한번 원정에 나서면 일제히 텐트를 접고 가족과 가축 모두 전쟁터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도시주변에 살면서도 정착민으로 동화하지 않고 유목민의 생활양식을 유지함으로서 말을 이용한 기동성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목군단을 능숙하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티무르의 성공은 칭기스칸의 그것과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정착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많은 건축활동을 한 것에 비하여 칭기스칸에게 정착사회는 보호 육성의 대상이 아니고 약탈의 대상으로 파괴가 목표였다. 초원지대에서 자란 칭기스칸은 정착사회의 성질이나 이용가치를 잘 몰랐던 것이다.


대외원정

티무르는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유목국가를 수립한 이상 대외원정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티무르는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섰다. 중앙아시아 통일 후 티무르가 고향 땅에 머문 기간은 전부해서 몇 년 밖에 안되었다. 그는 사마르칸드에 대 바자르(공동시장)를 건설하여 통상활동을 활성화시켜 대외원정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상인을 각지에 파견하여 여러 나라의 지도와 기록을 제공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정세에는 더없이 정통하여 그의 외정은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랐다.

주치가의 푸른오르도에서 톡타미쉬가 망명해 왔을 때 티무르는 톡타미쉬를 도와 울루스칸과 싸워 톡타미쉬를 푸른오르도의 칸으로 세웠다. 톡타미쉬칸은 나아가 본가인 황금오르도에 개입하여 1378년 볼가강변의 아스트라칸과 사라이를 점령하였다. 톡타미쉬칸의 성공과 함께 티무르와의 관계는 차갑게 되었다. 1385년 톡타미쉬칸은 타브리스를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티무르는 먼저 이란 고원으로 진군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잘라이르 왕가를 격파하고 술타냐와 타브리스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티무르는 먼저 이란고원과 카프카즈를 정복하고 북 카프카즈의 테렉강 부근에서 톡타미쉬칸군을 분쇄하고 사라이와 아스트라칸을 불태웠으며 모스크바까지 진군하였다. 이렇게 서방을 석권한 후 티무르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인도원정을 감행하였다. 1398년의 인도원정은 풍부한 인도의 물자와 교역타개가 목적이었다. 펀잡과 갠지스강 상류지역은 간단하게 티무르에게 유린되어 투굴룩 왕조의 수도 델리는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이어서 다음해 1399년 그루지아를 정복하고 잘라이르 왕가로부터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뺏고 시리아에 진격하여 알레포, 다마스커스를 급습하여 맘룩 왕조를 굴복시켰다. 1402년 7월, 티무르는 강적 오스만투르크의 바야지드1세와 앙카라에서 회전하였다. 양군모두 10만을 넘는 대군을 거느린 싸움이었으나 티무르군의 승리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었으며 티무르는 그 여세를 몰아 에게해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서는 소아시아, 시리아로부터 동은 천산산맥, 델리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 티무르의 직접, 간접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대 제국이 성립되었다.

1335년 일칸국의 붕괴후 군소정권이 난립한 이란을 티무르는 탈환한 것이었다. 본래 이란땅은 차가타이가의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침해하는 존재(오스만투르크, 맘룩조, 킵착칸국등)에 대한 공격은 당연하였다. 결국 티무르의 성공은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착민의 경제력이 잘 맞아 들어갈 때 강력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조화가 깨질 때 내륙국가는 망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샤르흐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함으로써 서쪽의 걱정이 사라진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원수이며 이슬람교의 적인 명제국으로의 대원정을 기도하였다. 이 원정이 성공한다면 그는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는 것이었다. 티무르는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드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큰눈이 쌓이고 심한 찬바람이 불었다. 1405년 1월에 결빙한 시르다라아강을 건너 오트랄에 이르른 70세의 티무르는 추위를 녹일 술을 너무마셔 책상에 앉은채 2월 18일 쓰러졌다. 즉시 중국원정은 중단되고 티무르의 유해는 사마르칸드의 구르이미르묘에 매장되었다.

권력의 핵이 빠진 티무르 제국에서는 자연 정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1409년에 티무르의 4남 샤르흐가 사마르칸드를 점령함으로서 내란이 겨우 진정되었다. 샤르흐 자신은 헤라트(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사마르칸드에는 아들인 울룩-벡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학문, 예술의 보호자여서 사마르칸드나 헤라트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화려한 궁정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들 여러 도시에서는 장려한 모스크, 마드라싸, 공동 숙박시설, 공동 목욕탕, 궁정에 딸린 정원이 만들어져 방문객을 놀라게 하였다. 샤르흐는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오스만투르크와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실크로드를 둘러싼 동서교역은 더욱 번창하였다. 내륙아시아가 하나의 강대한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15세기는 몽골제국의 전성기와 같은 동서교통이 이루어졌다.




무갈제국

동은 몽골고원과 중국, 서는 오스만투르크, 북은 킵착칸국과 우즈벡, 남은 인도 등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대상단(카라반)이 모여들어 더없이 번성한 티무르제국 사마르칸드의 바자르도 15세기 후반이 되면서 점차 시들어가게 되었다. 1447년 샤르흐가 죽자 울룩-벡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아들 압달-라티프에게 살해되고 압달도 그 다음 해에 암살되어 샤르흐의 정통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 뒤를 계승한 백부와 종형제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북방유목민 우즈벡칸의 원조를 요청하여 우즈벡족이 남하하게 되었다. 시반가는 주치의 5남인 시반의 자손으로 이들은 우즈벡이라 불렸다.

시반가의 아불카일칸이 시르다리아강 유역을 빼앗아가고 그의 손자인 무하마드-샤이바니칸은 더욱 남하하여 사마르칸드를 점령함으로서 아무다리아강 이북 땅은 우즈벡령, 이남 땅은 페르시아령이 되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왕인 티무르가의 바부르는 북상하여 사마르칸드를 탈환하였으나 결국 서투르키스탄의 회복을 단념하고 대신 인도로 침입하였다. 바부르는 1526년 파니파트의 싸움에서 이겨 델리에 무갈(몽골)제국을 세웠다.

무갈제국은 인도의 대부분을 통합하였으나 마지막 황제 바하드르-샤 2세는 1858년 영국에 의하여 폐위되고 빅토리아 여왕이 인디아의 황제가 되었다. 영국의 통치하에서 인도 전체는 하나의 총독부 아래 처음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파키스탄 국어의 하나인 우르두어는 무갈제국의 공용어였으며 우르두는 이동궁정 오르도의 사투리이다.

한편 시반가는 1598년까지 서 투르키스탄을 지배한 후 혈통이 단절되었다. 그후 아스트라칸에서 이동하여 온 주치의 장남 올다의 자손인 바키-무하마드가 부하라에서 아스트라칸가를 세우고 우즈벡인들을 지배하였다. 아스트라칸가는 1785년이 되어 망기트가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망기트가는 주치의 8남 보아르의 자손으로 대대로 황금오르도에서 신하로 있었던 가문이었다. 이 왕가는 1920년까지 부하라에 남아있다가 공산당에게 무너졌다. 1924년 우즈벡공화국이 성립되고 다음해 소련에 가입하였다가 1990년 이후에는 우즈벡스탄으로 독립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변모

이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명나라가 감숙지방의 관문인 가욕관을 폐쇄하였고 소아시아와 발칸지방에서는 오스만투르크가 멀리 빈까지 침입하여 유럽인이 아시아로 오고 가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려 실크로드는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진출로 새로운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고 있던 유럽인은 1498년 마침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도달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낙타등에 실려서 조금씩 수출되어 오랫동안 동경해 온 동방의 차, 도자기, 칠기, 견직물, 벽지 등을 배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내륙아시아의 혼란과 분쟁이 겹쳐 실크로드는 해상로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델란드가 인도항로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의 동진이 진행되었다. 16세기 중반 러시아와 영국과의 해상교역이 시작되자 시베리아의 모피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귀중한 상품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무렵 우랄산맥 서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제정러시아 최대의 어용상인 스트로가노프가는 1581년 돈-코사크의 수령 에르마크를 대장으로 한 탐험원정대를 시베리아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우랄산맥을 넘은 에르마크는 오브강, 이리티쉬강 유역에 이르러 쿠춤칸을 격파하고 그 수도인 시비르를 점령하였다. 그는 1584년 이리티쉬 강변으로 역습하여 온 쿠춤칸과의 전투에서 난전 중에 익사했지만, 러시아제국의 동방 진출은 그 후에도 착착 진행되어 광막한 시베리아의 대 삼림지대를 개척하고 여러 차례 아시아의 역사에 폭풍을 일으킨 북아시아의 유목세력을 흡수하였다.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의 존재가 희미하게 되어 버렸으나 실크로드가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카자흐와 코칸드칸국, 혹은 부하라칸국과 같이 동서교역은 변함없이 중세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다 1935년경 연안을 근거지로한 중국공산당은 감숙, 하미, 우르무치, 알마아타를 잇는 이전의 실크로드로 구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교역이 필요하여 철도라도 놓게 된다면 이 길은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