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이해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이해
정 연 락 (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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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과학 이론에 대한 기독교회의 반응을 비꼬아 나타내는 말이 있다. 새로운 이론이 발표되는 첫 세대의 교회는 그 과학 이론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다음 세대에 가면 교회는 그 이론을 아디아포라의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에 무관한 것이라고 무시한다. 그러다가 그 다음 세대의 교회는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된다(Krister Stendahl, “Immortality Is Too Much and Too Little,” Meanings:The Bible as Document and as Guide[Philadelphia:Fortress, 1984], 194). 그 대표적인 예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변화이다. 요즘 간간이 흘러나오는 인간복제에 대한 문제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지금 교계를 비롯 사회적인 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간 복제 실험, 아니 이미 성공한 듯한 기술이 과연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대한 도전인가? 두 세대가 지나면, 이 문제에 대한 교계의 태도는 어떻게 변할까?
다음 세대가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는 인간복제에 대한 의문을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신체를 복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복제한다는 말인가? 혹은 새로운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말인가? 아니면, 신체만 복제할 뿐, 인간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생명까지는 복제한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인가? 여하튼 유전공학적인 측면과는 달리, 인간복제와 관계하여 생명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그만한 의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여기서 제기하는 “생명”은 현재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의 생명을 뜻하지, 죽음 후의 생명이나 이른바 “영생(永生)”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복제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현재 문제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만의 혹은 죽은 후의 생명을 복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단어의 용례들을 고찰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이해를 밝혀 보되, 공관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이해로 제한하기로 한다.
나. 문제를 풀어가면서
1. 조에(ZWH)와 프쉬케(YUCH)
신약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는 zwhv(조에)와 yuchv(프쉬케)를 들 수 있다. zwhv의 주된 용례는 신자들이 다가오는 세대에서 받게 되거나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초자연적인 생명, 혹은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몇 번 죽음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육체적인 생명을 나타내기도 한다. 복음서들에서는 누가복음만이 두 번 정도 그렇게 사용할 뿐이다. zwhv가 예수님의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12:15)는 말씀 중에 사용되나, 그 후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현재의 생명은 yuchv로 설명이 된다(12:19, 20). 다른 경우는 음부에서 고통 하는 부자의 지상 생활 때를 지칭한다 (16:25). 누가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생명을 가리키는 경향이나, 구약 70인역을 인용하면서 지상에서 취해질 현재의 생명을 나타내고(행 8:33), 하늘과 땅의 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zwhVn kaiV pnohvn)”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사용한다(17:25). 이 마지막 경우는 의미 있는 용례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 외에는 zwhv의 용례 고찰은 우리가 추구하는 현재적인 생명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yuchv는, 비록 ‘영’, ‘영혼’, 혹은 ‘마음’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현재 지상에서의 생명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단어의 용례를 중심으로 생명의 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프쉬케(YUCH)의 용례 개관
기본적으로 단어 yuchv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생명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죽음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며(마 26:38∕막 14:34; 마 10:28; 막 3:4∕눅 6:9), 몸이 의복을 필요하듯 음식을 필요로 하는 생명으로 이해된다(마 6:25∕눅 12:22-23; 눅 12:19). “목숨[생명]을 찾다”(마 2:20), “목숨을 잃다”(마 10:39; 16:25-26∕막 8:35-36∕눅 9:24; 눅 17:33), “목숨을 주다”(마 20:28∕막 10:45), “목숨을 다하다”(마 22:37∕막 12:30∕눅 10:27), “영혼[생명]을 도로 찾다”(눅 12:20) 등은 ‘죽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yuchv는 감정을 지니는 인격체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내 마음(yuchv)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마 26:38)라고 하심은 이 단어 yuchv는 슬픔을 경험하는 주체라는 것을 보여준다(참고, 눅 2:35). 누가복음 1:46에서 마리아는 “내 영혼(yuchv)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pneu'ma)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표현에서 두 단어는 동격으로 사용되어 찬양하고 기뻐하는 마리아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마음(yuchv)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에서 단어 yuchv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그 사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지칭한다. 그리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yuchv)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마 22:37∕눅 10:27)는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구분하기보다 전 인격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열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목숨’도 마음과 뜻과 힘이나 다를 바 없이 혹은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사람의 인격체를 지칭한다. 곧 뒤이어 막 12:33에서는 다른 것들은 그대로 언급하면서 ‘목숨(yuchv)’을 빠뜨리고 그 말씀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 차이는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목숨’이 가리키는 것이 이미 다른 것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즉, ‘목숨’은 다른 것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비친다. 이렇듯이 ‘목숨’ 혹은 ‘생명’은 단순히 죽음에 반대되고 사람∕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개념일 뿐만이 아니라, ‘생명(yuchv)’은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고,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총체적인 인격체를 나타낸다. 여기에 이른바 감정적인 삶의 좌소와 종교적인 삶의 좌소 사이의 구분은 없다. 그러면 생명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해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
3. 누가복음 12:13-34
누가복음 12:13-34에서 예수께서 자기 형제로부터 유업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한 제자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후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에서 생명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zwhv와 yuchv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생명”(yuchv, 한글개역은 ‘영혼’으로 번역)을 도로 찾아가실 것으로 말씀하신다(12:20). 이 표현에서 생명은 하나님께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바이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가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뒤이어,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명과 몸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에서 이 둘의 보호자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친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더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 때를 위하여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을 예비할 것을 교훈한다(눅 12:33).
4. 마태복음 10:26-33
이와 같이, 마태복음 10:28은 참으로 두려워 할 자는 “몸(sw'ma)과 영혼∕생명(yuchv)을 [둘 다]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이라고 한다. 본문은 ‘몸’만 죽일 뿐 그 이상 ‘영혼∕생명’을 죽일 수 없는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한다. 몸과 영혼을 구분함으로써 사람이 이렇게 이원화되어있는 듯하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의 생명이 죽음으로써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까지 생명이 존속되어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있을 것이니 예비하라는 뜻이다(32-33절). 인간의 존재 전체를 관장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과 영혼∕생명”을 둘 다 능히 지옥에 멸하신다는 표현은 오히려 이 둘의 구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이 둘이 총체적으로 취급됨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또한 인간이 죽은 후 몸은 소멸되고 영혼∕생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영혼∕생명뿐만 아니라(비록 새로운 형태일지 모르나) 몸도 존재함을 시사한다.
5. 마가복음 8:34-9:1
마가복음 8:34-9:1과 이에 병행하는 마태복음 16:24- 28, 그리고 누가복음 9:23-27은 제자도를 설명하면서 ‘목숨∕생명(yuchv)’을 언급한다(참고, 마 10:38-39; 눅 17:33). 막 8:35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au*thvn)=목숨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au*thvn)=목숨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씀은 자기모순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특히 후반절의 “제 목숨을 잃으면”은 이미 잃어버렸음을 나타내는데, 어떻게 다시 “목숨을 구원하리라”하는가? 여기엔 목숨에 대한 어떤 구분이 있음이 틀림없다. 조건절의 ‘목숨을 잃으면’은 앞 절(34절)이 말한 바를 가리키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한다. ‘목숨∕생명’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지, 자기의 어떤 한 부분이나 다른 어떤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제자도는 현세적인 자아의 희생, 죽음까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귀결절에 대명사로 나타난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별되는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본문은 앞서 언급하였던 ‘목숨’을 대명사로 받음으로써 이 둘의 동등성과 연속성을 나타낸다. 현세의 목숨∕생명은 죽음으로써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구원의 대상이다. 따라서 현세에 있어서 육신의 자연적인 생명과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생명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없다. 또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의 영광을 함께 누릴 자도 바로 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본문에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살게되는 생명, 참된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얻게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본문이 이렇게 구원의 대상인 생명이 단지 미래의 영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생명을 육신과 구별하여 생각할 인간의 그 어떤 한 부분으로만 여기지도 않는다. 그 생명은 육신으로 사는 생명이요, 잃을 수도 있으며, 구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 (막 8:38) 이 현세의 삶∕생명에 따라[참고,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생명은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이다(마 16:27). 이런 맥락 속에서 막 8:36-37은 현세의 목숨∕생명의 고귀함을 역설한다. 우리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6. 마가복음 10:45∕마태복음 20:28
생명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은 마가복음 10:45∕마태복음 20:28이 될 것이다. 예수의 목숨∕생명(yuchv)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은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귀한,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한 그 예수의 생명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셨기에 사람들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
7.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yuchv의 용례를 중심으로 생명에 대한 이해를 검토했다. 정리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인격을 나타내는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생명은 몸과 구분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음식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현실 생활에서 그 생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삶은 끝나지만, 생명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이며 구원의 대상이 된다.
다. 나가면서
우리는 인간복제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보았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서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나타날 인격체이다. 그러기에 복음서에서는 생명을 온 천하보다도 더 고귀한 존재로 규명하며, 예수의 생명까지 희생하여서라도 구원하실 대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복제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까지 복제하여 동일한 인격체의 생명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두 개의 동일한 생명이 나타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명은 복제되어 양산(量産)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고 불러 가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복제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격적인 생명을 부여하시겠는가는 또 다른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만일 인간복제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한데 생명까지 부여받지 못한다면, 인격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적인 존재의 복제는 될지언정, 참 인간복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