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와 선교

인간의 죽음과 자기결정권

시골농군 2009. 6. 12. 16:57

인간의 죽음에 자기 결정권이 있는가?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명연애인의 자살과 함께 사회지도층의 자살은 모방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은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안락사, 뇌사 판정을 받은 이들에 대한 존엄사의 긍정적인 시각은 기독교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죽을 권리 있다”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모 일간지의 헤드라인 제목이다. 이 제목만을 두고 보면 여러 가지를 유추하게 된다. 자살을 할 권리가 있다는 말도 되고, 안락사도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위한 자극적 제목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무책임한 언론플레이다.

존엄사 판결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기류가 점점 인간의 생명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경제적 가치와 현실적 문제, 그리고 상황이론이 존엄사 판단의 기준이 돼가고 있다.

대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존엄하게 죽을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이 같은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판결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무의미한 환자를 의료적인 장치로 연장하는 것은 환자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 당사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데서 나온 발상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모든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이고 주권적으로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결정권은 더 나아가 안락사와 자살을 정당화시킬 수 있게 만든다. 삶이 의미가 없고 살고 싶지 않을 때 누구든지 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존엄사 인정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데 자칫 이번 판결이 인간 죽음의 시점을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가져 올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또 경제적인 이유를 비롯해 여러 부담으로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를 당연히 여기는 풍조를 가져 올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연명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자기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아직까지 사회적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며 시기상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존엄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교회협의회의 시각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절대적 가치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보다 생명을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에 대한 세계관의 문제일 수 있다.

사회는 점점 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하거나 과학적 테이터회된 정보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선 구분해야 할 것은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이 절대 다르다는 점이다. 생명의 상태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루면 인간이 생명이나 동물의 생명이 같을 수 있다. 살아 있다는 차원에서 물질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생명은 죽으면 그것으로 소멸되지만,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죽을 권리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존엄사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지금은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 과거에는 불치병이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보다 견고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선물이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실용적인 효용성이나 경제적 고려에 의해 생명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환자의 말기 상태에서 존엄사에 대한 법안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 개념에서 안락사를 포함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언론이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제목으로 ‘죽을 권리 있다’라는 헤드라인을 잡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 구성원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책상머리에서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상황적인 문제가 전체 사회의 용인과 묵인으로 간다면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게 된다. 상황적 윤리와 논리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충분하고 성숙된 제도가 세워져야 한다.

흑백논리나 사회적 효용성, 경제적 이유 중심으로 생명을 다뤄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생명공학을 다루면서 인간의 생명을 더 연장하려는 시도가 있는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존엄을 이유로 단절하려는 시도가 있다.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생명을 영원토록 유지하려는 것이든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 것이든 양편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인간 스스로 취하겠다는 태도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거나 존엄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다. 더구나 정신질환자의 경우 삶의 질이 낮다는 이유로 존엄사로 처리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들이 등장할 수 있다.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생명이다. 주어진 생명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마땅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존엄사 문제의 핵심은 가족들의 경제적인 고통과 환자 당사자의 견디기 힘든 고통에 대한 판단을 환자가 아닌 제 3자가 하게 되는 이 같은 결정차제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훼손하는 것이다. 또, 환자의 요구가 있더라도 고통 속에서 하는 호소는 환자의 본심이 아닐 수 있다.

더구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면 우울증 환자의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이들의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 역시 존중해야 한다. 경제적인 문제라면 정부나 기타 기관의 개입을 통해 풀어가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차원의 존엄사나 안락사 인정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를 뛰어 넘을 수 없다.

기독교계의 학계 전문가들은 인간의 품위와 존엄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교회와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처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함께 찾는 것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생명의 관리자이지 생명을 자의적으로 처분할 신분이 아니다. 상황윤리 가운데서 생명연장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 생명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의 주권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생명청지기의 사명일뿐이다.

출처 : 설교신문(http://www.sermon66.com/news_view.html?s=index&no=150975&hd=1&s_id=&ss_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