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초원의 영웅 - 나이만

시골농군 2009. 5. 19. 16:57


전운

1203년 가을 자무카 등 반테무진계 몽골부 세력들이 서부 몽골의 강자인 동 나이만부로 귀순해 오자 타양-칸은 동 몽골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전쟁의 여파가 나이만부에도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대 노얀인 코리-수베치를 변경지대인 디디크-사칼 지방의 네쿤강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하고 있을 때, 케레이트의 멸망소식과 함께 아린-타이지등 케레이트부의 나머지 세력들과 테무진에 패한 "메르키트부의 군주 톡토아-베키, 쿠두카-베키가 수령으로 있는 오이라트부, 자지라트부인 자무카 및 되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우드 여러 부가 모두 본능적으로 타양-칸에게 몰려들었다."

타양-칸은 대책회의를 열어 "이 동쪽에 조그만 몽골이 있다고 한다. 그 백성은 늙은 토오릴을 치고 바야흐로 칸이 되려한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두개의 빛으로 있지만 땅위에는 어찌 두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먼저 그들의 화살통을 빼앗자"라고 선제 공격할 것을 결의한 후 음산부근 만리장성 근처에 살고있는 동맹세력인 옹구트부에게 공동협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알라쿠시 부족장은 몽골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 이 사실을 테무진에게 알렸다. "나이만의 타양-칸이 너희들의 화살통을 빼앗으려 한다. 타양-칸은 나를 자기의 오른손이 되라고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조심하라." 테무진은 아브지야-커데게르에 머물면서 사냥을 하고있다가 이 소식을 전해듣고 주요 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많은 지휘관들이 지금은 말이 여위었기 때문에 말이 살찌는 가을철에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테무진의 동생 테무게-옷치긴은 "왜 말이 야위었다는 구실을 붙이는가? 나의 말은 살쪄있다. 이런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는 단 말인가"라고 즉시 공격을 주장하였으며, 벨구테이도 "살아 있으면서 화살통을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인가. 남자인 이상 화살통과 함께 묻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나이만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다고 저렇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 이 같은 큰소리를 듣고서도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가. 나이만부를 공격하여 그들의 화살통을 빼앗아 오자"라고 주장하였다. 테무진은 벨구테이의 말을 좇아 사냥을 중단하고 칼카강변으로 이동한 다음 몽골족의 총수를 점검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중하게 군사적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군대에 엄격한 조직을 도입하여 종래의 씨족질서를 천, 백호제로 개편하고 호위군도 확대 편성하였다. 모든 병사를 천호, 백호, 십호로 나누고 측근들이 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즉 1천의 아일을 한 단위로 묶어 천호라고 부른 뒤, 천호, 백호, 십호의 노얀까지 임명하였다. 또한 이들과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80명의 켑테울(야간경호대)과 70명의 토르카오트(주간경호대) 그리고 조리사(바오르치), 가축사육사(코니치), 조마사(커덜치) 등을 모아 케식텐(윤번병)을 편성한 후 도다이-체르비, 도콜코-체르비, 어겔레-체르비, 톨론-체르비, 보차란-체르비, 수이케투-체르비 등 모두 6명의 체르비(케식텐의 장)을 임명하였다. 이밖에 케레이트부를 본따 전시에는 앞에서 싸우고 평시에는 시위를 서는 정예군 천호를 편성하여 케식텐에 소속시켰다. 나이만부 정벌을 앞두고 이루어진 이러한 조치는 새로운 유목제국의 탄생과 같은 것이었다.


나이만

1204년 초여름 붉은 해가 중천에 뜨는 날, 테무진은 군기에 제주를 뿌리고 난 다음, 제베와 쿠빌라이를 선봉으로 삼아 나이만부를 정벌하러 진군하여 사아리-케에르에 이르렀다. 몽골의 전군은 투지가 치솟았다. 그러나 나이만은 대적이었다. "우리들은 소수이다. 우리들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 장거리 행군으로 모두 지쳐있으므로 이곳에 일단 쉬자. 군마들이 양껏 풀을 뜯을 때까지 이 사아리-케에르에 널리 흩어져 포진하자." 테무진군은 휴식에 들어갔다. 테무진군이 사아리-케에르에서 진군을 멈추자, 타양칸은 초병들을 통해 이들을 추적하였다. 테무진은 나이만족에게 자신의 군사력을 속이기 위하여 널찍이 퍼져 초원 전체에 진을 쳤고 밤이되자 허수아비들을 세워놓고, 한사람 한사람이 각각 다섯 군데에 횃불을 밝히게 하여 원정군의 규모를 대군으로 보이게 하였다. 이것을 본 나이만의 척후병은 “몽골은 수가 적다고 했지만 별보다 많은 불이 보인다”고 하였다. 예상 밖의 수많은 불빛에 놀란 타양-칸은 겁을 먹고 군대를 알타이 산맥 너머로 후퇴시켜 몽골군을 더 지치게 한 뒤 싸우려 하였다. "우리는 일단 후퇴하여 그들을 불러들이자. 그들이 알타이 산 앞에 이를 때까지 우리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공격할 틈을 노리는 개싸움방식으로 싸우면서 뒤로 물러나자. 그리고 몽골의 군마들을 지치게 한 후 그들을 치자." 그러나 나이만부의 주요 지휘관들은 정면대결을 주장하였다. 장군 코리-수베치는 "당신의 아버지 이난차-빌게-칸이 언제 적에게 등을 돌렸던가"라고 하였으며, 왕자 쿠출룩도 "여자같은 타양이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 말을 한다. 몽골인들의 대부분은 자무카와 함께 여기있는데, 몽골인들이 많을 수 있겠는가, 여자같은 타양!"이라고 분개하였다.

결국 타양-칸은 정면대결을 하기로 결심한 뒤 "타밀강을 따라 내려가 오르콘강을 건너고 나쿠절벽의 동쪽자락을 통과하여 차키르-마우트에 도착하였다." 나이만 측은 톡토아-베키 지휘의 메르키트, 자무카 지휘의 자다라트, 그리고 되르벤, 타타르, 카다긴, 살지우트 등의 부족들이 가담하고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타양-칸은 이들과 함께 알타이에서 항가이로 진군하였다. 차키르-마우트에서 일시 접전을 벌였던 양군은 전장을 나코산으로 옮겨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테무진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나아갔다. 그리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풀숲과 같이 넓게 진격하라. 호수와 같이 넓은 진을 펴고 끌과 같이 날카롭게 싸우라” 나이만 군은 압도당했다. 겁이난 타양칸은 물러나서 산 정상에 진을 쳤다. 몽골군은 산을 포위하였다. 격렬하고 끔찍한 전투였다.

타양이 "늑대들이 가축의 무리를 쫓듯이 우리를 쫓는 저 자들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저들은 내 형제 테무진의 네 마리 사냥개(사구) 이다. 저들은 사람의 고기를 먹여 기르며, 쇠사슬로 묶여있다. 저들의 두개골은 놋쇠로 만들었으며, 이빨은 바위를 잘라 만들었고, 혀는 칼과 같으며, 심장은 쇠로 만들었다. 저들은 채찍 대신 굽은 군도를 가졌다. 저들은 갈증을 이슬로 달래며 바람과 함께 질주한다. 그들은 전투에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 이제 저들은 사슬에서 풀렸으며, 턱에는 군침이 흐르고 기뻐 날뛰고 있다. 이 네마리 사냥개는 제베, 쿠빌라이, 젤메, 수베테이다"라고 자무카가 대꾸하였다. 그러자 타양이 다시 물었다. "저 후방에서 굶주린 매처럼 급하게 달려드는 자는 누구인가?" 자무카는 대답하기를 "그는 나의 안다 테무진이며 쇠갑옷을 입고 있다. 당신은 몽골군이 오면 양을 먹어치우듯 고깃 조각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밤이 되었다. 승자는 몽골군이었다. 타양칸은 중상을 입고 부하들에 의해 산 위로 운반되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코리-수베치가 그의 정신을 들게 하기 위하여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이끄는 부하들은 다시 산을 내려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 테무진은 "이런 부하들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놀라워하였다. 나이만의 패잔병들은 밤중에 공격을 피하려 가파른 산위로 오르다가 계속 굴러 떨어져 뼈와 머리가 으깨지고 썩은 나무처럼 쌓였다. 타양의 아들 쿠출룩은 이르티쉬로 도망쳤다. 이렇게 적은 수의 도망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나이만 병사들은 테무진에게 항복하였다.

자무카는 양측이 접전을 벌이기 직전, 테무진의 새로운 전투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전쟁터에서 빠져 나왔다. 나이만족과 몽골족간의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였기 때문에 자기휘하의 병사들이 나이만족 편에서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무카는 몽골족의 적이었던 나이만과 연합함으로써 민족을 배신한 셈이었다. 동 나이만이 붕괴하자 타양-칸에 가담했던 이들 반 테무진계 몽골씨족들도 대부분 테무진에게 투항하였다. 나이만 패망 후 타양칸의 금인 보관자인 위구르 사람 타타통가는 몽골인의 포로가 되어 테무진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구르인 관리들로 이루어진 몽골 사무원의 싹이 트게 되었다. 이제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아홉 개의 야크 꼬리털로 만들어진 테무진의 군기는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의 깃발이 되었다.


메르키트 잔당 소탕

이렇게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남쪽에서 나이만군을 무찔렀고 나이만의 연합부족들은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으나 메르키트 만은 도망쳤기 때문에, 1204년 가을 테무진은 톡토아-베키가 이끄는 오도이트-메르키트를 공격하여 격파한 다음 계속 이들을 추격하여 메르키트부를 사실상 해체하였다. 메르키트부의 한 세력이었던 다일-우순의 오아스-메르키트족은 스스로 귀순하여 아름다운 딸 쿨란을 테무진에게 바쳤다. 이후 타양의 동생이며 서 나이만의 칸인 부이룩은 이르티쉬 상류지방 즉 시베리아 알타이, 타르바가타이, 칭기스로 형성된 산지 근처에서 쿠출룩, 톡토아-베키, 자무카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그는 테무진의 특수부대에 의해 기습 살해되었다.

1205년 테무진은 탕구트를 침공한 뒤,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대량의 낙타군을 약탈하였다. 이 탕구트 침공 후, 1206년 가을 테무진은 몽골고원의 나머지 잔당을 처치하기 위하여 직접 나섰다. 도중에 오이라트의 수령 쿠두카-베키는 항복하여 테무진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 쿠출룩과 톡토아는 이르티쉬 하안에서 공격을 받았다. 쿠출룩은 카라키타이로 도망하였으며 톡토아와 메르키트는 격파되었다. 톡토아의 막내아들 쿠툴란-메르겐만은 킵착족 쪽으로 도망쳤으나 주치가 이를 생포하였다. 쿠툴란은 활의 명사수였기 때문에 주치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려 했지만 테무진은 "메르키트처럼 말썽 많은 부족은 없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자주 싸워야 했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그를 살려주어 반란을 다시 일으키게 한다는 말인가. 나라의 적에게는 묘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1207년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자무카의 최후

"나이만과 메르키트족을 토벌할 때 자무카의 백성들(자지라트씨족)이 몽골측에 모두 사로잡혔다. 자지라트의 수령 자무카는 전쟁터에서 빠져 나와 쓸쓸하게 유랑하게 되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흩어졌고 몇명의 너케르만이 그와함께 도망쳐 탕루산맥에 숨었다. 자무카는 모험생활을 하던 끝에 비적이 되었고, 그가 산양을 잡아 구워먹고 있을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의 손을 묶어 테무진에게 끌고 왔다. 테무진은 자무카의 요청에 따라 그를 끌고 온 자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테무진에게 잡혀온 자무카는 "나는 하늘의 천명을 받은 안다에게 패하였다. 안다의 마음이 편하게 나를 빨리 죽여달라. 피가 흘리지 않도록 죽여 나의 유골을 높은 산 위에 묻어달라. 그러면, 나는 영원토록 너에게 축복을 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자무카는 어렸을 때부터 테무진의 친구였고 안다(의형제)였다. 몽골인들의 눈에 안다를 처단하는 것은 친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이 나쁘게 받아들여졌다. 테무진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몽골 울루스 패권경쟁에서 진 자무카는 자청의 형식으로 피를 흘리지 않도록 처형되었다. 자무카의 죽음으로 파란만장했던 두 사람 사이의 대결은 테무진의 승리로 끝났다. 테무진이 케레이트의 하찮은 부하였을 때 자무카는 그를 밀어주었지만, 일단 테무진의 힘과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토오릴과 테무진의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두 사람의 힘을 소모시키려 하였다. 자무카는 영리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민첩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음모적이고 신임할 수 없어 많은 몽골민중들이 테무진을 지지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