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1204년 초여름 붉은 해가 중천에 뜨는 날, 테무진은 군기에 제주를 뿌리고 난 다음, 제베와 쿠빌라이를 선봉으로 삼아 나이만부를 정벌하러 진군하여 사아리-케에르에 이르렀다. 몽골의 전군은 투지가 치솟았다. 그러나 나이만은 대적이었다. "우리들은 소수이다. 우리들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 장거리 행군으로 모두 지쳐있으므로 이곳에 일단 쉬자. 군마들이 양껏 풀을 뜯을 때까지 이 사아리-케에르에 널리 흩어져 포진하자." 테무진군은 휴식에 들어갔다. 테무진군이 사아리-케에르에서 진군을 멈추자, 타양칸은 초병들을 통해 이들을 추적하였다. 테무진은 나이만족에게 자신의 군사력을 속이기 위하여 널찍이 퍼져 초원 전체에 진을 쳤고 밤이되자 허수아비들을 세워놓고, 한사람 한사람이 각각 다섯 군데에 횃불을 밝히게 하여 원정군의 규모를 대군으로 보이게 하였다. 이것을 본 나이만의 척후병은 “몽골은 수가 적다고 했지만 별보다 많은 불이 보인다”고 하였다. 예상 밖의 수많은 불빛에 놀란 타양-칸은 겁을 먹고 군대를 알타이 산맥 너머로 후퇴시켜 몽골군을 더 지치게 한 뒤 싸우려 하였다. "우리는 일단 후퇴하여 그들을 불러들이자. 그들이 알타이 산 앞에 이를 때까지 우리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공격할 틈을 노리는 개싸움방식으로 싸우면서 뒤로 물러나자. 그리고 몽골의 군마들을 지치게 한 후 그들을 치자." 그러나 나이만부의 주요 지휘관들은 정면대결을 주장하였다. 장군 코리-수베치는 "당신의 아버지 이난차-빌게-칸이 언제 적에게 등을 돌렸던가"라고 하였으며, 왕자 쿠출룩도 "여자같은 타양이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 말을 한다. 몽골인들의 대부분은 자무카와 함께 여기있는데, 몽골인들이 많을 수 있겠는가, 여자같은 타양!"이라고 분개하였다.
결국 타양-칸은 정면대결을 하기로 결심한 뒤 "타밀강을 따라 내려가 오르콘강을 건너고 나쿠절벽의 동쪽자락을 통과하여 차키르-마우트에 도착하였다." 나이만 측은 톡토아-베키 지휘의 메르키트, 자무카 지휘의 자다라트, 그리고 되르벤, 타타르, 카다긴, 살지우트 등의 부족들이 가담하고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타양-칸은 이들과 함께 알타이에서 항가이로 진군하였다. 차키르-마우트에서 일시 접전을 벌였던 양군은 전장을 나코산으로 옮겨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테무진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나아갔다. 그리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풀숲과 같이 넓게 진격하라. 호수와 같이 넓은 진을 펴고 끌과 같이 날카롭게 싸우라” 나이만 군은 압도당했다. 겁이난 타양칸은 물러나서 산 정상에 진을 쳤다. 몽골군은 산을 포위하였다. 격렬하고 끔찍한 전투였다.
타양이 "늑대들이 가축의 무리를 쫓듯이 우리를 쫓는 저 자들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저들은 내 형제 테무진의 네 마리 사냥개(사구) 이다. 저들은 사람의 고기를 먹여 기르며, 쇠사슬로 묶여있다. 저들의 두개골은 놋쇠로 만들었으며, 이빨은 바위를 잘라 만들었고, 혀는 칼과 같으며, 심장은 쇠로 만들었다. 저들은 채찍 대신 굽은 군도를 가졌다. 저들은 갈증을 이슬로 달래며 바람과 함께 질주한다. 그들은 전투에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 이제 저들은 사슬에서 풀렸으며, 턱에는 군침이 흐르고 기뻐 날뛰고 있다. 이 네마리 사냥개는 제베, 쿠빌라이, 젤메, 수베테이다"라고 자무카가 대꾸하였다. 그러자 타양이 다시 물었다. "저 후방에서 굶주린 매처럼 급하게 달려드는 자는 누구인가?" 자무카는 대답하기를 "그는 나의 안다 테무진이며 쇠갑옷을 입고 있다. 당신은 몽골군이 오면 양을 먹어치우듯 고깃 조각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밤이 되었다. 승자는 몽골군이었다. 타양칸은 중상을 입고 부하들에 의해 산 위로 운반되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코리-수베치가 그의 정신을 들게 하기 위하여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이끄는 부하들은 다시 산을 내려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 테무진은 "이런 부하들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놀라워하였다. 나이만의 패잔병들은 밤중에 공격을 피하려 가파른 산위로 오르다가 계속 굴러 떨어져 뼈와 머리가 으깨지고 썩은 나무처럼 쌓였다. 타양의 아들 쿠출룩은 이르티쉬로 도망쳤다. 이렇게 적은 수의 도망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나이만 병사들은 테무진에게 항복하였다.
자무카는 양측이 접전을 벌이기 직전, 테무진의 새로운 전투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전쟁터에서 빠져 나왔다. 나이만족과 몽골족간의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였기 때문에 자기휘하의 병사들이 나이만족 편에서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무카는 몽골족의 적이었던 나이만과 연합함으로써 민족을 배신한 셈이었다. 동 나이만이 붕괴하자 타양-칸에 가담했던 이들 반 테무진계 몽골씨족들도 대부분 테무진에게 투항하였다. 나이만 패망 후 타양칸의 금인 보관자인 위구르 사람 타타통가는 몽골인의 포로가 되어 테무진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구르인 관리들로 이루어진 몽골 사무원의 싹이 트게 되었다. 이제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아홉 개의 야크 꼬리털로 만들어진 테무진의 군기는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의 깃발이 되었다.
메르키트 잔당 소탕
이렇게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남쪽에서 나이만군을 무찔렀고 나이만의 연합부족들은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으나 메르키트 만은 도망쳤기 때문에, 1204년 가을 테무진은 톡토아-베키가 이끄는 오도이트-메르키트를 공격하여 격파한 다음 계속 이들을 추격하여 메르키트부를 사실상 해체하였다. 메르키트부의 한 세력이었던 다일-우순의 오아스-메르키트족은 스스로 귀순하여 아름다운 딸 쿨란을 테무진에게 바쳤다. 이후 타양의 동생이며 서 나이만의 칸인 부이룩은 이르티쉬 상류지방 즉 시베리아 알타이, 타르바가타이, 칭기스로 형성된 산지 근처에서 쿠출룩, 톡토아-베키, 자무카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그는 테무진의 특수부대에 의해 기습 살해되었다.
1205년 테무진은 탕구트를 침공한 뒤,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대량의 낙타군을 약탈하였다. 이 탕구트 침공 후, 1206년 가을 테무진은 몽골고원의 나머지 잔당을 처치하기 위하여 직접 나섰다. 도중에 오이라트의 수령 쿠두카-베키는 항복하여 테무진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 쿠출룩과 톡토아는 이르티쉬 하안에서 공격을 받았다. 쿠출룩은 카라키타이로 도망하였으며 톡토아와 메르키트는 격파되었다. 톡토아의 막내아들 쿠툴란-메르겐만은 킵착족 쪽으로 도망쳤으나 주치가 이를 생포하였다. 쿠툴란은 활의 명사수였기 때문에 주치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려 했지만 테무진은 "메르키트처럼 말썽 많은 부족은 없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자주 싸워야 했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그를 살려주어 반란을 다시 일으키게 한다는 말인가. 나라의 적에게는 묘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1207년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