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오릴의 메르키트부 공격
당시 몽골고원은 타타트부의 반란이 계속되고, 이와 함께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들도 금나라의 변방을 수시로 침략하였는데 당시 금나라는 키타이(거란)족의 반란과 이에 호응한 변방 규군의 난동으로 군사를 몽골고원으로 투입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198년 금나라의 집요한 공격 끝에 타타르부의 세추가 금나라에 항복하였다. 금나라는 세추의 항복으로 북변이 일시 안정되자, 그 동안 중지돼 왔던 계호 구축을 다시 시작하는 동시에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들을 철저히 예속시키려 하였다. 금나라는 침략의 주역이었던 콩기라트씨족을 먼저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다음, 그 여세를 몰아 또 하나의 세력인 카타긴, 살지우트씨족을 공격하여 대 성공을 거둠에 따라 금나라 북변은 일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 같은 금나라의 케룰렌호 주변부족 토벌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이전의 세력을 거의 회복한 토오릴은 테무진 측과 상의도 없이 메르키트부의 톡토아-베키를 급습하여 톡토아-베키의 큰아들인 터구스-베키를 죽이고, 그의 두딸과 카툰 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코토와 칠라운이라는 그의 두 아들과 백성들까지도 약탈해갔다. 토오릴은 물자조달만이 아니라 메르키트부를 합치려 침공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톡토아-베키는 생존권이 위협받을 정도의 대 타격을 입었다. 토오릴은 막대한 포로, 가축, 전리품을 혼자서 차지하였다. 테무진은 카라-툰 맹약이 적을 공격할 때에는 적용되지 않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토오릴은 이로서 자기가 테무진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테무진과 그의 상대인 자무카의 두 세력을 계속 모두 자기 밑에 두려하였다. 여기서 테무진은 토오릴을 꼭 묶어 놓을 약속을 새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톡토아-베키는 토오릴과 테무진에게 적대적인 세력들과 연합하여 이들과 대항해야만 된다는 위기감으로 1199년 겨울 테무진의 적대세력인 타이치우드 씨족에게 군사를 일으켜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는 몽골고원의 전쟁이 점차 연합부족간의 대규모 전쟁이 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부이룩-칸과의 전투
메르키트부를 약탈한 직후 토오릴은 자신을 쫓아낸 적대세력인 나이만부의 이난차-빌게-부구-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죽기 전 나라를 두 아들 타양과 부이룩에게 나누어주었다. 타양-칸은 카라-이르티쉬 강가의 초원지대 부족들을, 부이룩-칸은 알타이 산맥부근의 산지부족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나이만의 이난차-빌게의 죽음과 나이만의 분할은 토오릴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당시 몽골고원은, 케룰렌호 일대의 씨족이나 타타르부가 금나라의 공세에 눌려 일시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고, 메르키트부도 톡토아-베키의 아들인 코토와 칠라운이 토오릴에게 억류되어 있어 자중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토오릴의 대규모 원정이 가능하였다. 토오릴은 1199년 가을 셍굼 및 자카-감부가 이끄는 우익, 좌익군과 자신의 동맹세력인 테무진, 자무카를 총동원하여, 타양-칸의 암묵적인 승인하에 부이룩-칸이 다스리는 서 나이만부 정벌에 나섰다.
토오릴연합군은 동 나이만부의 북측을 경과하여 서 나이만부의 영지인 흡도지방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부이룩-칸군과 대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부이룩-칸은 자신의 둔영지로 도주하였는데 그곳에서 양군은 재차 싸운 결과 부이룩-칸군은 다시 크게 패배하여 알타이 산맥을 넘어 도망쳤다. 서 나이만부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토오릴의 원정군은, 키실-바시 호에서 자기 본거지로 회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계절은 엄동설한의 겨울철로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눈이 쌓여 통행하기 힘든 항가이 산맥의 북쪽보다 직선코스이면서도 눈이 덜 쌓이는 항가이 산맥의 남쪽을 택하여 회군하였다.
이때 전 나이만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 나이만부의 용장 퀵세우-사브락이 이들을 저지하며 토오릴의 원정군에게 기습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였다. 해가 지자 토오릴과 테무진 연합군과 쾩세우-사브락군은 서로 전열을 갖춘 뒤 그대로 숙영에 들어갔다.
그날 밤 토오릴과의 관계에서 밀리는 자무카가 퀵세우-사브락군을 맞아 신경이 예민해진 토오릴에게 테무진을 고립시켜 제거할 목적으로, "나의 안다인 테무진은, 이전부터 나이만부에 사신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칸이여! 나는 항상 한 곳에만 머무르는 카이로가나 새이다. 나의 안다인 테무진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늘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빌두우르 새이다. 아마 지금 그는 나이만족 주둔지에 갔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나이만에 항복하기 위하여 남았을 것이다" 라고 속삭였다. 토오릴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기 진 내의 봉화 불들을 밝혀 놓은 채 밤을 틈타 테무진의 행동을 잘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동하였다. 토오릴은 비밀리에 군대를 철수시켰던 것이다.
테무진은 그것도 모르고 그날 밤 그곳에서 숙영하고 이튿날 아침에야 토오릴이 밤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갔음을 확인하였다. 테무진 측의 분노는 컸다. "이들이 우리들을 제삿밥으로 만들려한다. 토오릴은 우리들만 재난을 당하라고, 우리들을 불 속에 밀어 넣은 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테무진 군은 단독으로 급히 위험한 철수를 감행하였다. "테무진은 후퇴하여, 에데르와 알타이 양강의 합류점을 건너 급히 이동하여, 사아리-케에르에서 하영하였다." 그곳에서 테무진과 조치-카사르는, 서-나이만군의 정황을 탐지한 후 쾩세우-사브락 군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자 안도하였다.
원정군의 이 같은 적전분열은 쾩세우-사브락 군이 부담없이 케레이트군과 싸우게 만들어 주었다. 케레이트군의 후익인 셍굼과 자카-감부군이 토오릴의 뒤를 쫓아, 강도 있고, 수목도 왜 우거진 지역인 에데르-알타이지방에 도달했을 때, 쾩세우-사브락은 테무진을 공격하지 않고 이들을 기습하여, 셍굼의 처자식 등을 생포하고 토오릴을 따르던 상당수의 부족민과 가축, 그리고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들은 다시 토오릴의 변경지방으로 쳐들어가 그의 부민과 예속민들 그리고 가축까지도 모두 약탈한 뒤 회군하였다.
콜라안-코트맹약
토오릴은 거의 맨몸으로 탈주해온 셍굼과 자카-감부 등으로부터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테무진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나는 나이만군에게 나의 백성들과 처자들을 모두 약탈당하였다. 너의 사준마를 파견하여 나의 백성들을 구해달라." 테무진은 이 기회에 토오릴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재정립하려고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사준마가 미처 도착하기 전, 콜라안-코트에서 셍굼은 이미 나이만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이 교전중 셍굼이 탄 말의 엉덩이가 나이만군이 쏜 화살에 맞아 사로잡힐 위기에 놓여있을 때, 이 사준마가 도착하여 셍굼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케레이트부의 백성과 처자 등을 구해주었다."
테무진 군의 도움으로 쾩세우-사브락 군에 빼앗겼던 백성들을 모두 되찾은 토오릴은 "나의 안다인 에수게이-바아토르가 이전에 나의 흩어졌던 백성들을 한차례 구해 주었다. 이번엔 또 아들인 테무진이 나의 흩어졌던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이들 부자는 흩어졌던 백성들을 나에게 모아주었다. 누구를 위하여 힘들게 모아준 것일까. 나도 이제 늙었다. 늙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의 백성들을 누가 다스릴 것인가. 나의 아우들은 품덕이 없다. 유일한 아들이 셍굼 하나라는 것은, 아들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테무진을 셍굼의 형으로 하면, 두 명의 아들이 되어 나는 안심할 것이다"라고 하며 테무진을 셍굼의 형으로 말한 뒤, 케레이트부의 통치에 테무진의 뜻이 반영될 것임을 비쳤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위기상황이 자무카 때문에 생겼음을 강조하고 "우리 둘은 질투가 심하고 이빨을 가진 독사의 꼬드김을 받더라도 그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들은 반드시 서로 만나 이빨과 입으로 서로 대조한 다음에만 믿는다. 큰 이빨을 가진 독사에 중상을 받더라도 그 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반드시 서로 만나 입과 혀로 서로 대조한 다음에만 믿는다"라고 자무카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콜라안-코트 맹약을 맺었다. 토오릴이 이러한 맹약을 맺게 된 것은 테무진의 강력한 요구와, 케레이트부 내에 상당한 친 테무긴계 세력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부족민들에대한 지배권을 회복한 뒤 곧 테무진과의 약속을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해 버렸다.
하여튼 테무진은 자무카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는 콜라안-코트맹약을 토오릴과 체결함으로써, 13 쿠리엥의 싸움이래 꿈꾸어 왔던 몽골부내 적대세력들을 토오릴과 함께 공격하여 제거시킬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비교적 잠잠하였던 몽골부는 이제부터 대 파란을 맞게 되었다.
타이치우드와의 전쟁
1199년 겨울 콜라안-코트 맹약 후, 테무진은 몽골부내 적대세력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메르키트부의 톡토아-베키는 이들의 맨처음 희생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세력과 연합하려 하였다. 1200년 초 그는 테무진 측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타이치우드 씨족에게 군사연합을 제의하였다. 당시 타이치우드 씨족은 몽골울루스 붕괴후 여러 노얀이 각기 난립하는 내부분열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테무진의 세 확장에 자극을 받아, 1190년대 중반이후 아우추-바아토르를 중심으로 점차 통일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세력은 일부집단이 케레이트부에 더 가깝게 지내는 등 테무진의 키야트씨족 연합정권보다는 결속도가 떨어졌다.
아우추-바아토르는 콜라안-코트 맹약 성립후 테무진의 본격적인 몽골부내 개입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톡토아-베키의 제의를 받자 즉각 타이치우드 여러 무리를 소집하는 쿠릴타이를 개최하였다. "타이치우드부의 군장인 아우추-바아토르, 코릴-바아토르, 코도다르-베키와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탈구타이-키릴툭 등과 같은 형제, 씨족원들은 모두 오논강의 몽골초원에 모여 쿠릴타이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 테무진과 토오릴이 있는 곳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들의 움직임을 안 테무진과 토오릴측도 즉각 대응하여 1200년 봄 사아리 강변의 부르칸-에르기 들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한 후 행동에 들어가 타이치우드와 메르키트군이 합류하기 이전에 타이치우드를 오논강에서 기습 격파하였다. 이후 토오릴과 테무진 연합군은 나뉘어, 토오릴은 메르키트군을 맞아 싸우러 떠났고 테무진은 패주하는 타이치우드군을 뒤쫓아갔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씨족의 아우추-바아토르를 쫓아가자 그는 자기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급히 이동시킨 후 오논강의 건너편에서 후퇴하지 않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격렬하였고 전세는 이쪽 저쪽으로 기울면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어, 양군은 서로 대치하면서 밤을 보냈다.
이 싸움은, 테무진도 부상을 입을 만큼 치열하게 전개된 끝에 타이치우드 씨족이 무너졌다. 타이치우드의 전사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고, 장막 뒤에 숨어있던 백성들은 버려졌다. 테무진은 이 전투도중 목에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생명이 위급하게 되자 젤메가 입으로 상처난 곳의 피를 빨아 구해주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테무진은 실신상태에서 깨어났다. 그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자 젤메는 옷을 벗고 적진의 수레에 몰래 올라가 마유주와 한 그릇의 응유를 가져왔다. 테무진은 정신을 차린 뒤 젤메가 상황을 설명하자 "너는 나의 목숨을 세 번 구해 주었다. 네가 한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마"고 하였다.
테무진은 전투가 끝난 다음날 아침, 도망간 사람들을 불러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소르칸-시라의 딸인 카다안이 테무진을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무진은 말을 달려 그녀를 껴안았았으나 그녀가 바란 그녀의 남편은 이미 테무진의 병사가 살해한 뒤였다. 테무진은 그날밤 병사들과 그곳에 머물면서, 카다안을 자기 천막으로 불러 옆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평민들의 인기를 샀다. 그 다음날 소르칸-시라는 아들들과 함께 테무진에게 봉사하러 찾아왔다.
또 테무진의 말에 활을 쏘아 말을 쓰러뜨린 타이치우드의 젊은 전사 예수드가 붙잡혀 처형을 기다렸으나 그의 용맹함을 알아보고 테무진은 그를 사면하여 십부장으로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후 그는 제베 즉 화살촉이란 이름으로 백부장, 천부장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부장으로 임명되어 동료 수베테이와 함께 가장 뛰어난 장군이 되었다. 이렇게 적의 용기와 명예까지도 생각하는 테무진의 태도는 몽골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타이치우드족이 패배한 뒤 테무진의 어린 시절의 박해자인 수령 탈구타이-키릴툭이 간신히 숲속에 몸을 숨겼으나 타이치우드에 종속된 시르귀에튀가 그를 생포하였다. 끌고가는 도중에 탈구타이-키릴툭의 형제와 아들들이 그를 구출하려 다가오자 시르귀에튀는 탈구타이-키릴툭을 그 자리에서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르귀에튀의 아들인 나야아가 주인을 잡아갈 경우 테무진의 태도를 걱정하자, 시르귀에튀는 탈구타이-키릴툭을 풀어주고 테무진에게 "탈구타이-키릴툭을 잡아오는 도중에 주인을 죽일 수 없어 그를 풀어주고, 나는 당신에게 힘을 바치려 왔다"고 하자 테무진은 "너희들의 칸인 탈구타이-키릴툭을 잡아 왔다면, 너의 일족을 참수하였을 것이다. 진정한 칸을 버리지 못한 너의 마음은 올바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탈구타이-키릴툭은 소르칸-시라의 아들 침바이와 격투끝에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테무진은 포로로 한 타이치우드 씨족을 일정한 비율로 몰살시킨 후 생존자들을 그에게 예속시킴으로써 보르지긴 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테무진은 소년시절 자신이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복수를 하였던 것이다.
테무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모두다 알게되었고 이는 부족수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테무진 앞에서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처단될 것을 알았으며, 나이만과 타이치우드가 패배하자 케룰렌호 일대의 카다긴, 살지우드, 되르벤, 타타르, 콩기라트 등의 부족들까지도 모두 테무진의 위세를 두려워하였다. 이들은 자무카와도 거리가 있었으므로 힘의 열세를 보충하기 위해서 테무진과 토오릴 세력과는 적대적인 타타르부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1200년 여름 카다긴, 살지우드 양씨족은 카타긴, 살지우드, 되르벤, 콩기라트 그리고 타타르의 잔여세력과 연합하였다. 이들은 알코이-볼락 샘물가에 모여 종마와 암말의 허리를 함께 자르면서 피의 맹세를 한 뒤 케룰렌호 주변에 있는 테무진과 토오릴군을 공격하러 떠났다.
테무진의 장인인 데이-세첸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토오릴과 테무진은 이들을 맞아 싸우러 떠났다. 쌍방은 부이르호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토오릴과 테무진측의 승리로 끝났으나 도망가는 여러 씨족 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에르군네강 일대의 자무카를 의식하여야 했으며 타타르 여러 씨족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을 테무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매처럼 산 위로 날아 부이르호를 건넜다. 나는 푸른 다리와 잿빛 깃털을 가진 학을 잡았다. 그것은 되르벤과 타타르였다. 나는 훌룬호를 지나 한번 더 푸른 다리와 잿빛 깃털을 가진 학을 잡았다. 카타긴, 살지우드, 그리고 콩기라트였다." 이러한 승리는 테무진에게 새로운 야망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먼저 케레이트 부족의 계승자가 되고 나아가 지배권을 몽골고원의 모든 부족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구르-칸 세력의 등장과 소멸
한편 케룰렌호 일대 반 테무진계 씨족들의 지지기반을 빼앗아버린 테무진은 자무카측에 염탐꾼을 파견한 뒤 토오릴이 있는 코바-카야쪽으로 이동하였다. 테무진이 케룰렌호 일대가 아닌 구렐루 산에 머무르기로 한 것은 토오릴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1201년 몽골부내 반 테무진계 씨족들이 위기에 몰리자 자무카가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몽골부내 반테무진계 씨족을 모두 규합하여 토오릴과 테무진이 확립하려는 주도권에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테무진에게 반대하는 몽골씨족 자지라트, 타이치우드, 콩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되르벤, 카타긴, 살지우드 뿐 아니라 메르키트, 오이라트, 나이만, 타타르도 자기 주변으로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이 연합군은 에르군네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주의 초지에 모여 자무카-세첸을 칸으로 선출한 뒤 구르칸(사해의 군주)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구르칸이 된 자무카는 자리를 옮겨 칸맹서약을 한 뒤 테무진을 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추대식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자무카 진영에서 활동하는 차우르를 통하여 즉각 테무진에게 알려졌다. 테무진은 지체없이 진군하여 데니-코르칸 강변에서 자무카 연합군과 격전을 벌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테무진은 자무카를 적극적으로 뒤쫓지 못하였다. 아직 자무카는 토오릴의 적대세력이 아니라서 테무진이 무리하게 자무카를 추격한다면 자칫 토오릴과 테무진간의 동맹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테무진은 이 싸움 후 자신에게 투항한 콩기라트 씨족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테무진은 타타르 씨족들이 자무카의 연합세력임을 알고 자무카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알치와 차강-타타르씨족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하였다. 테무진은 부이르호 근처에서 주변정세를 살피고 있다가 1202년 봄 이들을 공격하러 나섰다. 그러나 통합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타타르는 그 수나 세력에서 테무진의 무리보다 우월하였다.
타타르족의 전멸
1202년 봄 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우기 위해 대치하고 있을 때,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하여 사사로운 약탈을 금지시켰다. "적을 눌러도 전리품을 얻기 위하여 멈추지 말라. 다 누른 다음에 그 전리품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니 그때 나누어주겠다. 퇴각하면 처음의 공격선으로 돌아오자. 처음의 공격선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목을 베겠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은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유목민은 약탈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고, 각 수령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던 것이다. 테무진은 자신의 명령이 각 수령들의 불만을 살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같이 하여 규율 잡힌 군대를 만들지 않고서는 우윌한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대규모의 전투집단을 장기간 통솔하는데는 이러한 규율이 아주 중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테무진의 조치는 즉각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후 사실상 토오릴의 지원을 바랄 수 없었던 테무진은 단독으로 타타르부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섰다. 공격대상은 도타오트, 알로카이, 쿠인, 테레이트-타타르로서 이들은 테무진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테무진은 사로잡은 타타르백성들의 처리를 위하여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타타르 인들을 수레바퀴의 활에다 세운 뒤, 그보다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남은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삼아 나누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타타르부가 몽골부의 적대씨족이기도 하였지만 이 타타르부를 없애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되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타타르의 전사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두명의 타타르 미인 이수이와 이수겐을 취하였다. 타타르의 몰사는 테무진에게 배후지역을 확보해 주었고, 그는 다가올 전투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싸움 전에 약탈물 처분에 대한 테무진의 명령을 옛 몽골의 칸 쿠툴라의 아들인 알탄과 쿠차르, 그리고 테무진의 숙부 다리타이가 명령을 업신여기고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하였고, 그와 친족이면서 부족 내 서열에서는 자신들의 가문이 테무진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었고, 제베와 쿠빌라이를 보내 전리품으로 차지한 가축을 비롯하여 손에 넣은 것은 전부 몰수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알탄, 쿠차르, 그리고 다리타이는 테무진을 떠나 곧 그의 적들에 가담하였다.
이 달란-네무르게스 싸움의 승리로 테무진은 타타르부가 소유했던 방대한 말떼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타타르 씨족들을 멸망시킴으로서 몽골부내 반 테무진계 씨족들과 주변세력과의 연합에 제동을 걸었으며 이들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갈팡질팡하는 몽골고원의 수령들 가운데 테무진만이 고정된 축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강인한 성격이 끊임없는 게릴라성 상황을 자신에겐 유리하게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테무진은 이전과는 성격이 크게 다른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쿠이텐 싸움
1202년 가을, 톡토아-베키는 서나이만의 부이룩-칸, 되르벤, 타타르, 카다긴, 살지우드 여러 씨족과 오이라트부, 그리고 케룰렌호 일대의 반 테무진계 몽골씨족을 끌어들였다. 데이-세첸이 이를 테무진에게 알리자, 그는 토오릴칸과 연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려 하였다. 토오릴에게 연락을 보내자 토오릴은 곧 군대를 이끌고 왔다. 이들은 일단 테무진이 있는 실루겔지트강에서 합류하였다. 테무진과 토오릴은 메르키트, 나이만, 오이라트 부와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 씨족이 만날 수 있는 케룰렌호 서남일대로 급히 북상하였다. 선발대를 전방에 배치한 뒤, 본군은 케룰렌강을 따라 쿠이텐 땅으로 이동하였다. 셍굼이 지휘하는 선발대는 반 테무진 세력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다시 척후를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 앞쪽 첵체르산에도, 다시 그 앞쪽에 위치한 치쿠르쿠산에도 한 부대의 척후를 배치하였다.
셍굼의 선발대가 오드키야에 도착했을 때 치쿠르쿠산에 배치한 척후병으로부터 적이 온다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때 치쿠르쿠산 일대에 도달한 적군은 대군이어서 셍굼의 선발대는 후퇴해서 쿠이텐 땅의 본군과 합류하였다. 셍굼의 뒤를 추격해온 연합군과 테무진-토오릴군은 쿠이텐에서 서로 대치한 뒤, 아래로 위로 서로 물러나며 진을 갖추고 있을 때, 부이룩-칸과 쿠두카-베키가 자다석을 사용하여 비바람을 부르자 적진에 휘몰아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의 진영위로 휘몰아 쳐 그들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지는 등 그들의 진영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쿠이텐 땅의 악천후로 전투능력을 상실한 이 연합세력은 제각기 자기들의 본거지를 향하여 도주하였다. 이때 자무카군이 쿠이텐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연합군이 붕괴되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연합군을 약탈하고 에르군네 강을 따라 도주하였다. 자무카가 뒤늦게 싸움에 참가한 것은 그가 반 테무진계 씨족들에게 배제되자 이들에 대한 보복과 위기타개를 한 것이었다.
테무진과 토오릴은 이들을 추격하였다. 테무진은 오논강 쪽으로 도주하는 타이치우드의 아우추-바아토르를 추격하여 타이치우드의 나머지 세력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맹했던 살지우드, 카타긴, 알치-타타르, 되르벤씨족과는 밀약을 맺었다. 토오릴은 에르군네 강을 따라 자무카를 추격하였다. 토오릴이 자무카를 추격한 것은 테무진이 자무카의 세력을 무너뜨릴 경우 테무진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잘 견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은 자무카를 추격했던 토오릴이 자무카를 용서하고 그를 환영하자 불만이 컸다. 테무진의 격렬한 항의에도 토오릴은 자무카를 자기의 동맹자로서 인정함으로서 이들 사이에는 골이 생기게 되었다. 하여튼 자무카는 다시 테무진, 토오릴진영에 들어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