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0-18 / 안식일의 치유
지난주 요한복음 5장 1~9절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간 일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종교의 기대와 희망이었던 메시아의 도래,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불치병 환자들의 상황은 구약종교의 모든 것을 보여 줍니다.
구약종교는 목마른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38년이나 되어 희망 없는 병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구약종교가 끝난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병자는 움직이고 걷고 뛰었습니다.
이것이 곧 응답이요, 복음입니다.
구약종교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끝났습니다.
유대 신앙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은 예수님께서 “이 성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지으리라”는 말씀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양의 문은 “내가 양의 문이로다”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많은 목마른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구약종교는 막을 내렸습니다.
목마른 제사와 구원은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계속 ‘죽고 죽고 죽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낳고 낳고 낳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죽는 종교이고 신약은 사는 종교입니다.
‘진리’를 유실한 형식 종교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둠, 죄악, 사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베데스다 못가의 좋은 사건에 약간 예감이 좋지 않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구약종교의 상징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 70번 정도 나타나는데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영향력 있는 권력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모아 구약종교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잘못된 구약종교의 신봉자, 계승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들에게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사람에게 진리처럼 불편한 게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출현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은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 단순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이미 잊어 버렸고,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날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자유케 하는 날로 여기지 않고 율법화, 종교화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의해 38년 된 병자가 살아난 사건을 기뻐하기보다 시비를 걸고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38년 된 병자의 감격과 기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위 실추와 영향력 감소 그리고 신뢰하고 율법화된 구약종교가 상처받는 것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11,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이 사람들은 누가 네 병을 고쳐줬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누가 왜 안식일에 걸어가라고 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즉 병이 나았으면 하루 더 있다가 일어나지 왜 안식일에 일어났느냐 하는 겁니다.
병자는 어떤 분이 자기를 보고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으라고 해 말씀대로 걷게 된 거라고 말합니다.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러면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병 고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주범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형태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종교의 허상입니다.
종교적인 형식과 율법의 제도로 인간의 본질과 자유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모습들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몇 마디로 자신의 병을 고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몰려들므로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광, 칭찬, 인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병이 오래된 불쌍하고 비참하며, 신세타령하고 팔자소관을 이야기하는
희망이 없는 한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제도, 방법, 권력, 인기 등에 관심이 몰려 있습니다.
도시 문명 속에서 죽어 가는 소시민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권력의 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가는 사람에 대해 별로 애정이 없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사람이 많을 때 예수님이 뒤에 계시다가 사람의 행적이 뜸해지자, 다시 이 남자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났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만났습니다.
온전한 치유
병 고치는 것의 놀라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의 반에 해당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난다면 의사나 별다를 게 없는 의료행위입니다.
인간은 정신과 영혼이 행복해야 합니다.
여기에 치유의 온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의사와 병원 근무자가 환자를 다루는 것은 반쪽짜리 치료에 해당합니다.
진정한 의사는 영혼을 치료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정신적, 영적으로 방황하는 이 남자에게 다시 찾아와 두 번째 치유를 해주셨습니다.
치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치유입니다.
둘째, 한 단계 높은 정신적 치유입니다.
방황, 좌절, 절망, 허무함 등에 해답을 주는 치유입니다.
셋째, 영적 치유입니다. 죄, 사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치유를 위해 조용한 틈을 이용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죄 짓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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