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과 교구 부흥
청지기 훈련 강의안
들어가면서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부흥하기를 원하지 않는 교회는 없다. 교회가 부흥하기 원하는 교회마다 여러가지 가능한 방법을 다 활용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하고 영성 훈련을 하기도 한다. 우리 교회도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해마다 예수 사랑 큰 잔치를 하면서 온 교회가 전도에 집중하고 있다. 왜 교회마다 부흥하려고 하는 것일까? 바른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흥의 필요성은 무엇이며, 진정한 부흥이란 무엇이며 부흥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번쯤은 던져봐야 한다.
1. 부흥의 필요성
교회가 부흥되어져야 한다는 말은 수 없이 들어온 말이다. 왜 교회가 부흥되어져야 하는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함인가? 업적을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인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자신들의 업적을 드려내고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쌓은 바벨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는 것은 작은 나무가지에 붙은 불 하나로서는 충분한 열을 못내지만 그 나무들이 모이면 큰 열을 내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개인의 힘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여럿이 모인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마찬가지로 혼자의 신앙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모인 무리의 신앙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구제, 전도, 세계 선교를 여럿의 힘을 모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부흥되어져야 한다. 온 세상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의 힘으로 안되는 일들이 모여진 성도의 힘으로 할 수 있기에 교회는 반드시 부흥되어져야 한다. 교회가 부흥해야 되는 이유는 더 많은 주의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2. 개인의 영적 성장과 교구의 부흥의 관계성
그렇다면 교회가 부흥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영적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야 한다. 우선 이 질문을 하기에 앞서서 진정한 부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외적인 부흥이란 지금 있는 것들보다 양적으로 더 많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어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그 경건은 헛된 것이듯 내적인 부흥이 없는 외적인 부흥은 의미가 없다. 진정한 부흥은 내적인 성장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영적 성장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교회(성도)의 내면적 부흥이 없는 외적 부흥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의 진정한 성장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영적 성장은 교회의 성장의 필수적 요인이며 충분한 요인이다. 이 원리는 교구의 부흥에도 연관이 된다.
3.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
교회의 부흥이 개인의 영적 성장에 있다면 이제 우리는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성장하여야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필요할까?
1.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적 침체란 무엇인가? 영적 침체는 쇠퇴나 타락과 다르다. 영적 침체와 쇠퇴가 영적 타락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영적 타락이라 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요, 베드로의 세번 부인이 이런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침체는 다르다. 침체는 성장이 둔화된 것이다. 영적 침체가 시작되면 믿음이 약화되고 사랑이 식어지고 열정이 줄어든다. 순전한 마음의 헌신이 점차 와해된다. 양심은 마비되고 회개의 은혜가 역사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것에 별로 흥미가 없고 의무 수행을 기쁨으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고 불만과 불만족이 자리잡게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일은 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 영적인 사고보다는 육적인 생각이 우선하기에 영적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영적인 사고의 둔화로 인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차 있다. 지상과 천상의 기쁨을 동시에 누리기를 원하고 들릴라의 무릎에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나간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겸손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한다.
이런 사람들은 기쁨, 사모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만으로 일을 한다. 부부가 의무감 때문에 산다고 생각해보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모세 시절에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나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을 때나 모두가 다 자원하여(willingly)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 없다. 은혜가 힘을 잃고 충만하지 못하다. 독단적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온유와 겸손이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이 제사를 집행하고, 전쟁에 나가서는 모두 진멸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제작하고 좋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핑계를 하는 사울은 분명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적 방법을 우선으로 했던 영적 침체의 사람이었다. 이들은 공의보다는 사견이 앞선다. 이들은 빛 잃은 순금이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있다면 분명 영적으로 침체 혹은 쇠퇴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 이와같이 영적 침체에 빠지는 원인이 무엇일까?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릴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는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다. 세상의 유행이나 풍습을 좇는 일들이 우선이 될 때에 영성은 침체되어진다. 버리지 못한 취미나 습관들은 세상의 것에 더욱 더 애착을 느끼게 한다.
둘째는 불신자와의 교제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 가운데 산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물들어 사는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배가 바다에 빠져가고 있는데 그 배에 구멍이 생겨서 바닷물이 배 속으로 들어와 배의 침몰을 더욱 더 가속화시키듯이 지금 교회가 세상에 빠져가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구멍이 생겨서 세상의 것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교회에 대한 풍자임이 분명하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되 그 속에 빠져도 안되지만 구멍이 생겨서 세상 것들이 들어와서도 안된다. 오직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세상의 것들을 진멸해야 한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모든 것을 정복하라고 하라고 분부하셨다. 모두 죽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불신자(죄)와의 교제를 끊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들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좋지 못한 사역에 동참이다. 죄악된 일임을 알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상황을 핑계하여 동참하는 것은 영적 침체를 이루는 길이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잘못된 부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는 마음의 나태함이다. 나태하면 무디어지고 무디어지면 타협의 영이 역사하게 된다. 조급함은 실수를 낳지만 나태함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만함과 긴급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섯째는 죄를 변명함이다. 죄를 변명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변명은 영원한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죄를 변명하는 사울은 왕위에서 폐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의 용감함은 그의 죄를 통회하며 눈물로 침상을 썩히는데 있었다.
여섯째는 교만이다. 사람은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만은 안된다. 교만은 더욱 더 금물이다. 교만은 주의력을 결핍시키고 죄를 허용한다. 교만을 버리지 못하면 회복할 기력이 없다. 이런 영적 침체적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2. 말씀과 기도의 무장이 필요하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가 기도생활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다. 우리의 의지를 아뢰는 것이다. 받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새로운 피조물의 호흡이다. 호흡이 방해를 받으면 전 기관이 고통을 받듯이 기도가 없으면 영적 생활 전반에 걸쳐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기도는 의무 이상의 그 무엇이다. 시130:1의 말씀과 같이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어야 한다. 죽음의 깊은 곳, 고난의 깊은 곳, 눈물 골짜기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야곱은 밧단아람의 삼촌 집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야곱의 모습은 달라졌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잠28:13의 말씀과 같이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말씀의 묵상이다. 말씀은 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묵상되어져야 한다. 내 속에 들어와야 한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고백을 이루어준다. 말씀은 하나님께로 촛점을 맞추게 한다. 사진기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촛점을 맞추지 않고 찍은 사진을 알아 볼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찌라도 하나님께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모든 조건이 아무 소용이 없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열망하므로 촛점을 맞출 수가 있다. 시42편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준다. 시27:4에는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말씀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신앙 열정은 오히려 성전을 삼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말씀 묵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한다.
천국 소망은 기도와 말씀 생활을 더 충실하게 만들어 준다. 세상에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천국 상급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일하는 의미도 약해진다. 헌금도 전도도 희생적 봉사도 의미가 없다. 열심히 하지 못하는 이유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설 그 날을 사모하는 자마다 영적으로 무장된 생활을 한다. 소망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는 소망 안에서 성령 충만을 이루게 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만이 올바른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
3. 행함으로 드려진 삶이 있어야 한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다. 영성은 이론에 있지 않다. 삶 속에 드려짐이 있어야 한다. 히11장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다. 중요한 것은 생활이다. 드려져야 한다. 롬 12장에서 신령한 예배, 영적인 예배, 살아 있는 예배를 말함에 있어서 신령한 삶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드려지는 삶이 있어야 한다. 삶은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이어야 한다.
이것은 계속되어지는 훈련으로 되어진다. 경건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다. 끊임 없는 훈련이 핖요하다. 운동 선수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동작이라 할찌라도 계속해서 훈련한다. 거듭 반복되는 훈련이다. 경건은 계속 반복되는 훈련이어야 한다. 딤전 4:7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다. 연습을 하는 사람에게 몇 가지 유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 푯대가 정해져야 하고 그 푯대를 향해서 계속적인 추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는 헌신이다. 자기 자신이 드려져야 한다. 셋째는 유능한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스승에 따라서 선수의 실력이 달라진다. 감독이 바뀌면서 성적이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경건과 영성에 있어서 가장 유능한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넷째는 연습, 또 연습이다. 말씀과 기도를 연습, 또 연습해야 한다. 계속되는 연습만이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
나가면서
살아 있는 물체는 성장해야 한다. 어린 아이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이가 계속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로는 안타까움이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성도는 성장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여야 한다. 성장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는 일이다. 온유와 겸손(고후 10:1, 마 11:28,29)을 입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죠지 베듄은 1839년에 기록한 그의 책에서 “아마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계발하는 것 중에서 가장 뒷전을 차지하는 것이 온유일 것이다. 사실 온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성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성질이나 밖으로 드러난 행동 양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하지 못한 것을 결코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이 있는 다음에도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변화되지 못했다.
영적으로 부흥하는 성도는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성장한 후에는 베푸는 삶이 있어야 한다. 자기만 성장하려는 자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성도는 받은 은혜를 저장하는 탱크(TANK)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전달해야 하는 관(TUBE)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개인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이번 훈련을 기점으로 해서 개인과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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