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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설립과 스콜라 신학

시골농군 2009. 9. 24. 12:35

대학의 설립과 스콜라신학

지난시간 우리는 중세교회의 수도원의 설립과 그 발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중세교회의 수도원은 개인의 수도를 통한 구원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학교를 세워 고대 기독교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지난시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샬레만 대제 같은 이는 수도원의 본연의 임무보다도 학문과 교육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궁정학교”를 신설하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클루니 수도원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은 수도원이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말련해주고 수도원에서의 교육의 비중을 줄여주는 한편 파리, 옥스포드, 케임브리지등 유럽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의 설립을 보게하였고 교육의 비중은 수도원으로 부터 대학으로 서서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대학의 설립과 스콜라신학의 발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게르만 민족의 침략으로 고대교회와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던 찬란한 문화는 어지없이 파멸되고 단절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자질이 우수하여 중세역사의 주역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인 운동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이 잉글랜드에와서 선교했을 때 그들은 잉글랜드에 선교에의 열정과 학구의식을 남겨주었습니다. 베데(Bede)의 「영국 민족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tica gentis Anglorum)」는 오늘날에도 영국 교회사의 중요한자료가 되고 있으며,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이 쓴 「지식의 원천(the Fountain of Knowledge)」은 동방교회의 신학을 체계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세의 대학설립의 효시라고 한다면 역시 샬레만 대제의 궁정학교의 설립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궁정학교는 9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논쟁들을 불러 이르으키게 됩니다. 고트샬크(Gothshalk)가 어거스틴의 이중예정(二重 豫定)을 강조하여 흐라바누스(Hrabanus Marnus), 힝크말(Hinkmar von Reims)과의 사이에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어 격국 고트샬크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비참한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특히 아일랜트 출신의 요한 스코투스(John Scothus)도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되며, 이 이중예정은 후일 종교개혁기에 요한 칼빈을 거쳐 오늘날 장로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가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영혼의 기원과 그 본질에 관한 논쟁은 창조설과 유전설의 대립을 가져왔고,성모 마리아의 동정녀설에 관한 논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찬에 대한 논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라트람누스(Ratramnus)는 어거스틴의 상징설을 주장하였으나, 고트샬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그것을 받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신비하게 객체적으로 성찬에 임재한다는 소위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라드벌투스(Radbertus)는 떡과 잔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즉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화체설을 로마 카톨릭의 정통적인 성찬교리로 자리잡았으며, 종교개혁가였던 루터도 이 교리를 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진보적인 종교개혁가였던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주장하였고 장료교회의 기본교리를 확립한 요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중세의 학문들은 주로 기독교의 교리논쟁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VII세와 황제 헨리IV세와의 세력다툼 이후 학문적인 노력은 더욱 왕성해졌으며 여러 대학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학문을 우리는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학자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헬라와 로마의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즉, 논리변증법, 삼단논법등을 도구로 사용하며 그 학문을 이끌어나갔으며 고대 교부들과 성경의 교훈들을 발췌하여 신학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센텐스(sentence)라고 하는데 피더 롬바르드(Peter Rombardus)의 센텐스가 가장 유명하며 13세기 이후에는 같은 주제에 대한 여러 해명을 나란히 서술하여 그 관계를 논리적으로 살펴 종합적 결론에 도달하는 새로운 학문적 방법이 채택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숨마(summa)라고 부릅니다. 토마스 아귀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총론(Summa totius theologiae)」이 가장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또한 철학을 도구로 사용한 학문이었기 때문에 철학적인 인식론의 문제가 자주 대두되었는데 유명한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사이의 논쟁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논쟁에 대하여는 다음시간에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콜라 신학은 12,3세기에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됩니다. 이시기는 중세의 고립된 신앙으로 부터 십자군 전쟁을 통한 동서의 문화와 종교가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게되므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무조건적 신앙으로 부터 철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신앙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안셀무스는 「나는 알기위하여 믿는다.」고 했으며 이 명제를 플라톤의 직감적인 이성으로 설명하려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스콜라 신학은 집대성되고 절정을 맞았습니다. 교황 레오XIII세는 아퀴나스를 카톨릭교회의 신학의 표준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 이후 스콜라 신학은 요한 둔 스코투스(John Dun Scotus)에의해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스코투스는 안셀무스나 아퀴나스와는 달리 신앙과 이성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진리는 그 어떤 것도 이성을 통하여 증명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유명론자인 오캄에 의해 계승되어 스콜라신학을 완전히 붕괴시켜버리고 맙니다.

이로서 중세교회의 모든 신학체계는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성이 허물어진 것이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하나님을 증명하고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오직 믿음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역시 인간의 좁은 사고의 한도에 하나님을 묶어두려하지 말고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우리를 향한 사랑과 역사를 아멘으로 전적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중세 스콜라 신학을 무너지게한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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