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민중신학
최부옥(민중신학연구소 이사, 양무리교회 목사)
우리는 지금 마을에 교회가 들어와도 기뻐하지 않고 주위에 그리스도인 이 생겨도 반가워하
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런 현상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
수님의 몸이란 공동체가 출현했는데 외면당하고 예수의 삶을 이어갈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했는
데도 환영받지도 축복받지도 못하는 모습이란 확실히 어딘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세 상
의 지배적 권세들은 예수와 그의 무리들을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 하려 드는 것이 사실입
니다만, 그렇다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의 우 리 교회와 신자들이 그토록 외면당하고 있
다고 말하기에는 왠지 극단적인 자기도피적 변명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오리혀 우리
안에 더 크 고 구조적으로 반예수적인 문제들 때문에 우리가 사회와 역사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최근 어느 통계자료에 의하면, 새 정부 출범이후 퇴직당한 공직자들의 약 45%가 기독교인
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국민의 20%가 기독교인들이라 는 일반적인 통계 상황을 갑절로 뛰
어넘는 매우 충격적인 보고라고 생각됩 니다. 게다가 그 퇴직당한 부정 기독교인 공직자들 대
부분은 교회 안에서 적어도 집사, 장로급 인사들로 교회내 신자들의 지도급 인사들임을 추측한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밖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또 다른 비리의 크리스챤 공
직자들이 얼마나 있겠는지를 상상한다면 우리의 처지는 완전히 역사의 벼랑에 서 있음을 시인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러한 추한 모습의 생명력 잃은 모습들을 알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많은 교회수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강도만난 이웃
들을 외면한 채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교회
를 외면하고 신 자를 의식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음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하다는 느낌입니 다.
오히려 교회의 출현은 또 다른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이기적이고 배타 적인 집단의 출현에 불과
하다는 인식을 불식시키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계속 설자리를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정의를 신앙의 핵심적 내용으로 받아들인 한국의 초기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앙전통
을 계승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와 교회가 들어간 마을에 는 탐관오리들이 부임하기를 피하려고
했던 까닭도 바로 당시 교회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시교회도 그토록 부흥을
했던 커다란 이 유 중의 하나는 저들이 당시의 사회의 실종된 나눔과 섬김의 모습으로 가난 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진정한 이웃으로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었 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회정의를 추구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인 면만
을 강조해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왜곡된 의식에 젖어 있 습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가 한국교회
의 주도권을 이루고 있는 데서 나온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가
적당주의와 불의 와 타협한 상태에서 존립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성
장이란 미명하에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신앙인으로 양 육하지 못하고 제도와
제시된 교리에 순응하는 온상교인 만들기에 집중합니 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과 교회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워 주셨습 니다. 그러므로 세
상을 떠난 교회, 세상을 외면하고 도피적인 게토집단과 같은 교회,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줄 수 없는 교회란 이미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만 다니 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두 수레바퀴인 복음화와 인간화 양면을 함께 살려야 하겠습니다. 교회성
장 제일주의나 사회참여 일변도 만으로는 복음의 총체성 을 골고루 대변할 수 없습니다. 모이는
교회를 강조하는만큼 흩어지는 교회 도 역설해야 합니다. 또 나아가서 잘 증언하기 위하여 부지
런히 모여야 합 니다. 좋은 훈련없이 실행에 옮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성장 지 상주
의 영향 하에서 큰 것이 선이고 축복이며 힘있는 것이 정의라는 잘못된 생각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모이는 힘 없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하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복음의 양면이며 선교의 안팎임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 둘의 인위적 분리는 모두
를 파괴시킨다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에는 언제나 박해와 핍박과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 니다. 그것은 매 시
대마다 차이가 있을 뿐이지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은 언제나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복음화 과정에서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곧 순
교에 이르는 때 였으니까요! 그러나 70-80년대의 복음화 과정에서는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모이는 교회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의 인간화 과정에서 고난이 계
속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건설과 인권을 위한 교회 의 투쟁으로 인해 겪는 수난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러 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한 신학입니다. 민중교회도 그
신학에 대한 뜨거운 응답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민중신학은 교회라는 제 도권 속
에 갇혀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방시켜 고난받는 이 땅의 민중들 을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
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현장신학입니다. 사실 이 러한 민중신학은 주위의 많은 비판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선교역사 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이 시대에
유일하게 고난받는 복음의 현장이라는 특성도 띠고 있구요.
그러나 우리는 '90년대에 이미 들어서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가 한없이 다원화되었고 각계
각층의 요구도 끝없이 다양해져서 이들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과거와 같아서는 결코 안된다는
절대적인 명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민족통일이라는 커다란 선교의 과제를 해결해 가야 될 우리 한국교 회들은 이전처럼 분
열된 선교체제를 가지고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알 고 있습니다. 이미 복음화 일변도(교회
성장주의) 캠프에서도 교회성장이 현 저하게 둔화되어가는 현실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지고 있
습니다. '교회 키 워서 도대체 무엇하겠다는 거냐?' 라는 통렬한 역사의 심판적 물음을 받기 시
작한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민중교회 캠프도 그 열악한 환경을 탈피하지 못하고 분출되어 나오
는 영적 변화의 욕구들 앞에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 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속에 불교와
카톨릭 보다도 더 공신력을 잃어버 린 종교집단 수준에 머무른 것이지요.
우리는 복음화의 두 캠프들의 서로를 비판, 백안시 하기에 앞서 서로 상 대 속에 담겨있는
장점들과 은사들을 존중하고 활용할 방안들을 찾아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기원하셨던 예수님의 기 도에 응답할 자세들을 겸손히 모색해야 합니다. 신학은 다
양합니다. 그리고 변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항구적입니다. 민중신학은 학문의 영역 그 자체에 온
존하려 하지 말고 교회선교에 공헌하고 교회목회를 깨우며 돕는 신학캠프 이기를 기원합니다. 엘
리트의식을 갖지 말고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종의 의 식으로 서십시오. '90년대 민중신학 활동을
기대합니다.
<"민중신학연구소" 통권 제2권 9호에서 옮김>
생산 공동체 태동의 신앙적 의미
*글머리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는데, 정작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라 는 현실 제도교회
를 향한 냉소적인 말이 새로운 문제제기는 아닐지라도, 오 늘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온겆
뒤틀린 것을 치유하며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현실을 자명하게 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새 삼스럽게 물어야 한다. 그것도 정직하게 스스로를 향하여 "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경험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역사는 이러한 갈망이 사라질 때면 언제나 "손에 쥘 수 있는 견고한 모양새"
라든지 '물리적인 힘'이 그 자리를 대치해 왔다고 말해준다.
또한 그러는 사이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사라지고 적당하게 '현 실적인 대안'이라
는 이름으로 복음은 윤색되고 뒤틀려 왔다고 지적한다. 예수 는 '견고하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약한자들의 진실이 숨쉬는 갈릴리 '에 기대를 두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주목할 일
이다. 약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작은 진실은 언제까지라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기초가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당시의 어그러진 시간 속에서 여린 가슴으로 때 로
는 두려워하고 좌절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작은 정의로움의 발걸음을 내 딛을 수 있었던 "
작은자들의 움직임"을 주목하신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 라를 이루어갈 주인공들이기 때문
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려하게 꾸며진 것 과 외적인 견고함이라든지, 과시할만한 모양새에
기대어 왔는가를 스스로에 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계속되지 못할 것이다. 말 그
대로 "하나 도 제자리에 놓여있지 못할 것"이며, 오직 약한 자들의 정직한 고백이 그 자 리를
대치할 것이다. 이러한 "작은 자들의 정의로운 복음적 결단과 움직임"은 오늘의 교회역사 속에
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들이 진정한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나
눔과 섬김의 전형을 보여왔다고 확신한 다. 더 이상 교회는 제도와 조직이 군림하는 모습을
전면에 두고 마치 그것 이 교회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준거점인 듯 행동할수는 없다. 교회는 "
공동체 의 의미"를 재고해야 하며, 교회의 "숨기"(생명력)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 특히 우리 빈민교회는 스스로의 "숨기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언제
나 예수께서 눈여겨 보시며 한결같이 주목하셨던 " 작은자들의 숨기있는 움직임"을 통해서 말
이다.
*가난한 이들의 생산 공동체
최근에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생산공동체"에 대한 비젼을 서로 나눈 바 있다. 이른바 "
몬드라곤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이러한 생각의 실마리를 열었다. 몬드라곤은 "인간적이고
무능하지 않은 체제"를 생산자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일구어 나가는 "미래사회에 대한
맹아적인 운동"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 물론 몬드라곤의 사례는 "민족주의의 한 반영" 이
라는 지적을 염두에 둔다 해도, 그리고 "시공의 제한을 갖지않는 항구적인 대안"이라고 는
못할찌라도 그것이 갖는 일정한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을 것이 다. 온갖 그릇된
인간의 제도와 체제가 인간의 삶과 고귀한 정신을 잠식하고 짓밟는 역사를 오래 전부터 경험
해왔던 우리에게 이러한 사례가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 아닐수 없다. 더우기 과연 우리 빈
민교회들이 지역운동적 차원 에서 이러한 감흥과 생각의 단초를 현실화시켰다는 것은 애초
우리가 가지 고 있는 "공동체"적 비젼을 구체적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미 몇몇 지역에서는 이러한 생산공동체를 새로운 각도에서 시도하거나 그 러한 계획을 세
우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것이 갖는 "공동체적 속 성"이다.
*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속성과 생산공동체
공동체는 맹목의 바람에 의해 모인 '무리'나 '떼'이거나 막연한 군중심리에 의해 모여든 무리
가 결코 아니다. 공동체는 "살맛나는 함께함"이란 말로 바꾸 어 놓을 수 있다. 편협하고 이기
적인 느낌이나 판단을 벗어난 곳이 바로 공 동체가 싹트는 자리이고, 함께 더불어 숨쉬며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인 공간 이 태동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아주 신명나 는 일이고 살맛나는 일이다. 공동체는 실로 "살맛나는 함께함"이다. 또한 공동
체에는 "인격"이 있다.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살아있는 방 향"이 있다. 외적인
조건에 의해 무시되거나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업신 여김이 여기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러한 공동체는 바로 "숨쉬는 공동체"이 다. 결코 만남이 맹목이나 습관이 되어버렸을 때 이를
"살아있는 해방의 공 동체"하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의 구
체적 인 내용을 만남속에 담겨져야 한다. 일방적이지 않고 종속적이거나 명령적이 지 않으며,
서로 나누며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살아있는 살림의 공동체"가 가능해질
것이다. 목적하는 바가 "공동체"라면, 그것도 "숨 쉬는 공동체"인 것이 분명하다면 함께 나누
며 섬김으로 "일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야훼 하나님의 정의로운 생각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이 구체화 해야 한다. "함께" 나아가야 하며, "함께" 일을 풀어가야 한
다.
힝 나눔과 섬김의 손은 기적을 일으킨다
생산공동체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속성을 그 바탕으로 해야 한 다. 우린 예수께
서 가진 것이라고는 거칠어진 빈손 뿐인 평범한 노동자들, 어 부들의 손을 잡아 이끌고, 그
손들을 한 곳에 묶어세워 살맛나는 공동체의 기초로 삼았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사망과 절망적인 실의와 좌절을 희망과 용기로 바꾸어 놓고, 그들에 게 하나님 나라
를 일구는 손을 주셨다. 이해타산과 발빠른 계산은 눈에 보 이는 성과를 가져올 듯하지만,
결국에는 더불어 사는 삶을 부수고 만다. 섬 김의 손을 내미는 일이 당장 손해나는 일일찌라
도 기꺼이 우리의 일로 만들어 야 한다. 나눔과 섬김의 손은 기적을 일으키고, 진정한 변혁의
시작을 가져온 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기 집중과 고립적인 태도
는 사랑과 정의를 목마름에 지치게 하고 공동체 속에서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하 게 한다는 사실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동일한 시간을 대면하고 있다고 해서 함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함께 있다는 것은, "더불어 있다는 것"은 "시 간의 공유" 이상의 말인 까닭이다. 그것은 서로
가 서로에게 삶의 용기가 되 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감"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서로가 서로의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한가지 고정 된
방식으로 누가 누구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기꺼이 서로의 깊이를 나누
며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는 성 숙한 관계를 뜻한다. "자주적인
생산자 관리체계"를 기초로 하고 있는 생산 공동체의 정의로운 관계설정은 애초 이러한 정의
로운 관계의 성숙함을 전제 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외되어 버린다면 "외형적인 경제적 여
건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 "허약한 공동체의 지반"이 그것을 끝까지 지 탱
하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의 작은 움직임 속에 이것은 실재해야 한다. 달리 말하여
생산공동체 운동의 시작은 "정의로운 관계를 일구는 일" 이고 이것이 그 지반인 것이다.
힝 살맛나는 현재적 나눔의 생산 공동체
"첫 공동체"의 모습을 성서는 "지금 더불어 있는 것"과 "현재적 나눔과 섬김 "을 그 공동체의
특징으로 소개하고 있다. 성서는 이는 "모든 것을 공동소유 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
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나누어 주는 " 현재적 사건임을 밝힌다. "첫 공동체"는 사람
살이를 뿌리로부터 파괴시키 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요소를 "지금" 전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살맛나는 살림의 공동체"는 이렇게 자신자신의 이기성을 헐고 "더불어 함께함"을 현재 적 사
건이 되게 함으로써 구체화 하였다. "변화를 거부하는 폐쇄성"이 현실 공동체를 막고있다면
'살맛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애초 불가능하게 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일을 시작한 것은 온갖 "뒤바꿈의 시간"의 시작이었다. 예수의 기대는 현실적
으로 왜곡된 존재와 뒤틀린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었다. 예수는 당시의 고정관념이 규정한
죄인 들과 친구가 됨으로 이 회복된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는 보잘것 없고, 천대
받고, 권리를 박탈 당한 자들, 즉 어린이들과 여인들 편에 섰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 이들에게서 이미 경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재는 고스란히
미래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예수의 현재적인 온갖 움직임 속에 궁극적인 하나 님 나라의 경험
을 이미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이미 현재적 경험 속에서 미래는 실현되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경험의 폭은 더욱 구체화되고 깊 이를 더해갈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일관
된 걸음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대한 책임적인 태도가 새겨져 있다. 예수는 터무니도 없
는 미래를 허황 되게 갈망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다. 지금 그는 척박하고 참담한
땅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책
임적으로 엮어 나갔던 것이다. 실로 예수에게 있어서 희망하 는 일은 하나의 싸움을 의미했
다. 예수에게 있어서 미래는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이미 맛보는 그 어떤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잔지하고 성실한 싸움속에서 이미 그것을 경험하며 더욱 그 방향을 분
명히 했다. 그는 미래적 가치와 기준을 앞당겨 행동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미 실재하는
것처럼 사셨고, 이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존케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빈민지역에서 태동하고
있는 "생산공동체 운동"의 "탁 월한 성과"를 도식적으로 규정하거나 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도 중요한 것은 지금 살맛나는 공동체를 규모있고 정의롭게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살
아가는 것이고, 그 현재적 공동체가 미래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좋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현재와는 구별되는 혹은 비교도 될 수 없 는 질과 양의 멋진 미래에 대
한 꿈을 꾼다. 이러한 기대의 폭이 크면 클수 록, 현재와 견줄수도 없는 미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 되 어 버린다. 그것도 지금의 시점에 나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나의 현 재적 경험과 삶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러나 "현재와 단절된 미래"
는 환상에 불과하다. 언제나 "미래는 현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지금 현
재의 시점은 우리에게 행동의 책임성을 묻고 있다. 현재 의 시점에 무책임한 것은 곧 미
래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시 간은 결국 흐를 것이고 "언젠가"라고 말했던 미래
의 시점은 현재가 될 것이 지만 "무조건 시간이 속이 들어찬 내용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우
리가 이땅에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면, 그리고 "나눔 생산공동 체"
의 작은 움직임에 기대를 걸고 있다면 우리의 공동체의 현재적 경험 속에 그 내용이 반영되어
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만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 이다. 희망하는 일에는 그만큼의 책
임이 전제된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 망은 분명 "막연한 환상"이 아니지만, 무책임한 현재
는 미래를 터무니없는 환 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미래의 내용은 이미 지금 우리가 결정해
가고 있다.
우리가 책임적인 태도로 희망함으로써,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일들을 마다 하지 않으므로,
외적조건에 매몰되지 않음으로써 "견고하고 속이 들어찬 내용 있는 미래"가 가능할 것이
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미래를 사는 것"이다.
어떠 어떠한 생산공동체의 도식화된 전형을 애써 만드는 것을 조급하게 서두 를 이유는 없다.
그리고 어떠한 역사적 모델에 집착할 이유 또한 없다. 우리 의 역사와 현장 속에서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엮어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성과물"을 평가하는 잣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를 가능케하는 최소
한의 기준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지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만약
애초 그 시작의 시점에 지반으로 삼고 있던 것이 여전하게 고집스러움으로 발딛고 서 있지 않
다면, 어떤 식으로든 발전 되고 세련된 형식을 취하고는 있을찌라도 "긍정적인 평가"는 유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살맛나는 현재적 나눔의 생산 공동체의 출발선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실이다. 또한 자신의 폐쇄성을 깨는 작업 역시 그러하다. 정 의로운 원칙은 요구되는 것이지만
폐쇄적인 울타리를 극단적으로 설치하는 일 은 불필요한 것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
은 예수께서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규정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남는 것은 인 간이라는 사실, 애초 살맛나는 현재적 나눔의 생산 공동체는 다름아닌 인간 을
촛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강조되어야 한다.
* 글 꼬리에
애초 너무나 작은 움직임이라는 선입견으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시 해 버린 일이나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아무도 짐작하지 않았지만, 더우기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원하지 않았 지만 언 땅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움직임과도 같은 역사의 흐름을 아무도 거 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
리는 "생산공동체 운동"의 작은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변혁의 기운을 잉태하는 "작은 자들의 움직임"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살아있는
겨자씨와 생명 력있는 누룩"(누가 13:18-21)은 뿌려질 때 그 효과는 발휘되기 마련이다. 결 국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며, 밀가루를 모두 부풀려 버린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정의의 복음
"은 진지하게 뿌려져야 한다. 씨는 뿌려지지도 않았는데 막연하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
겠지" 라는 생각은 위험천만이다.
우리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씨는 뿌려 져야 하며, 스스
로 질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과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 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적합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또한 물어야 한다. 단지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막연하게 함께 있는 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야 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 대한 "적합한 결단적 행동"이 요구된다. 예수 가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뜻을 척박하고 잔혹스러운 땅에서 용기롭게 일구어 낸 것처럼, 스스로
가 누룩이 되고 겨자씨가 되어 땅에 뿌려진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교회는 하나님 나를 향한 길'을 고 집스럽게 가야
한다"(누가 13:33).
(낙골교회 김기돈 전도사,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 발행 "일어서는 사람들" 제17호에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