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이레네eirene(헬1515)(3)
■ 신약성경의 에이레네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 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서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가복음 5:34(눅7:50)와 야고보서 2:l6에서 작 별인사로, 누가 10:5; (24:36); 요한복음 20:19, 21, 26에서 도착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파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사도행전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을“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 인 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 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 용했다. 요한계시록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 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들어 베드로전서 5:14; 요한삼서 15절에서 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사도행전 15:33과 고린도 전서 I6: 11에 나오며, 누가복음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 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 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실서에 반대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 (행7:26; 갈5:22; 엡4:3; 약3:18; 참조:벧전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24:2; 마 10: 34; 계 5:4에서는 전쟁의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15:l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누가복음 l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 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 레네
고린도전서 l4:33에서 바을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 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흔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 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 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 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 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누가복음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된 종말론적 구원 이다.
누가복음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 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누가복음19:42에“평화에 관한 일”과 19:38에“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12:10과 19:1에“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브리서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 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브리서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 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6:15; 참조: 행10:36; 엡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14:27). 세상은 오직 [살롬]을 원하며, 그리 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5:34; 평행구, 눅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하는 선물이다. 그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편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10:5이하; 마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 부터 영원 히 제외되에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빌1:2; 살전1:1; 몬3절)과 요한계 시록(1:5)에서“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 에서‘긍흉’대신‘은혜’를 취하여“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 라고 축복한다.
그는“은혜와 평강”을“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 므로, 예배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 를 수여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그가 고린도전서 1:4-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라디아서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 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 부터 구원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 히브리서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 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 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로세서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립보서 4:7 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 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 도할지라도 그렇다(마10:34이하).
⒝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 행하며, 바울은 로마서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 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 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 (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드릴 존재양식 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은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 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은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같은 특징은 베드로후서 3:l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 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 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없 는 완전한 복지(안녕)이나 정상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로마서 16:20에서“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 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 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후서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 용은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 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 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브리서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있다. 에이레네 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 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 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 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에베소서 2:14-17이다. 바울은 이사야 57:19을 생각하고 있었 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 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 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 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 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 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 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 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 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 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를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 (원수된 것)이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 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다면 로마서 5:l 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로마서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 의한다(참조, 엡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 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로마서 14:I7에서 바울은“하나님의 나라는 먹은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회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 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 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는"(뤼페이타이)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 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 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듣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평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 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 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 진시키는 일은 의심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있다: "그 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 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 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는니라.”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 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 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안이라 이유(reason)을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 러나 but’가 아니라‘오히려 rather' 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 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 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 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시오.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 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 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사작한다. 여기서‘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 닌다.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디모데후서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 고‘…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 는‘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에 베소서 4:3 :“화평의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야고보 서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의가 자라 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 (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베드로전서3:l1에서 시편 34평에서 인용하 여“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 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함(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로마서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 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 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 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 (고요함, 평온)과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 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 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 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 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로마서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라디아서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러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 네] 항목).
빌립보서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로새서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 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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