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자료

케레이트

시골농군 2009. 5. 19. 16:57


동맹파탄

테무진은 1196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너케르 체제의 강화와 세 확장정책으로 인하여 토오릴과 비슷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싸움으로 몽골부내 적대세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테무진의 이러한 급상승에 위협을 느낀 토오릴은 테무진의 정적인 자무카를 세력권내에 수용하여 테무진을 견제하였다. 따라서 테무진은 토오릴과 이중으로 친목을 도모하려고 테무진의 큰아들 주치에게는 셍굼의 여동생인 차우르-베키를 짝지워 주고, 셍굼의 아들인 토사카에게는 테무진의 딸 코진-베키를 시집보내 양가가 사돈을 맺는 방법을 생각해낸 뒤, 이해 겨울 몽골풍습 상 최고의 동맹형태인 결혼안을 토오릴측에 제안하였다. 당시 토오릴은 노쇠하였으므로 테무진은 군사대결로 자기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보다 그가 사망할 경우, 결혼 동맹등으로 토오릴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케레이트부 내에 있는 친테무진계 세력을 활용하여 셍굼의 형 자격으로 케레이트부의 칸자리에 오르려하였다.

셍굼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친족이 그들에게 간다면 겔의 문옆에 서서 항상 주인이 앉아있는 정면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친족이 우리들의 곳에 온다면 주인이 앉는 정면에 앉아 겔의 문옆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고귀하게 생각하고 테무진을 깔보았다. 테무진이 승부수로 제기한 결혼제의는 셍굼의 이러한 입장으로 지지부진하게 되었으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옷을 입은 아들이 나 테무진이며 맨몸으로 태어난 아들이 너 셍굼으로 아버지 토오릴은 우리들을 항상 똑같이 취급해 왔다. 내가 아들로 된 이후 너 셍굼 안다는 나를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너는 아버지 토오릴의 마음에 심려를 끼쳐드리지 말 것이며 그의 거처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려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라."


키야트 노얀들의 집단반발

이렇게 케레이트부의 칸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테무진과 셍굼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테무진의 진영에서 예기치 않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테무진군의 한쪽 날개인 키야트씨족 노얀들의 집단반발이었다. 집단반발의 원인은 테무진의 독재화에 따른 키야트씨족 노얀들의 기득권 상실과 지위하락 때문이었다. 1203년 자무카는 키야트씨족 노얀들인 알탄, 쿠차르-베키 및 카다긴씨족, 에부게진씨족, 노야킨씨족, 수케겐씨족의 토오릴, 되르벤씨족의 카치운-베키 등과 모여 셍굼을 지지하기로 의견을 통일한 뒤 이들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자무카는 "그대들은 테무진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을 뗀 뒤, "그대들이 테무진을 치려 한다면 나도 함께 공격하겠다"고 하면서 셍굼에게 "테무진은 입으로는 토오릴을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그의 뜻은 딴 데에 있다. 아직도 그를 믿고있는가. 지금 그를 기습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가 닥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출내기에게 칸의 자리가 돌아가도록 한 것을 끊임없이 후회하던 몽골 칸의 적통인 알탄과 쿠차르는 "우리가 호엘룬의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으며, 에부게진, 노야킨, 그리고 카르타아트 씨족들도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 오겠다"라고 하였다. 수케겐 씨족의 토오릴이 말하기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는 테무진과 그의 백성을 빼앗아 오겠다. 테무진의 밑에 백성이 없어지게 된다면 그들은 꼼짝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되르벤씨족의 카치운-베키도 "닐카-셍굼이여! 우리들은 너를 따라 긴 나무의 끝까지, 깊은 물의 바닥까지 같이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무카는 "나는 좋은 시절이나 나쁜 시절에도 같은 곳에 사는 종달새지만 테무진은 겨울에는 날아가는 기러기입니다"라고 도 하였다. 이들의 말에 따라 셍굼은 테무진을 치기로 결심하고 토오릴을 설득하러 나섰다.

닐카-셍굼은 아버지인 토오릴에게 이러한 말들을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토오릴은 "너희들은 나의 아들인 테무진에게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지금까지 나는 그를 지팡이로 삼아왔다. 테무진에게 이렇게 나쁜 짓을 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다. 자무카는 중상을 잘하는 자이므로 그의 말을 믿지마라."라고 화를 냈다. 토오릴은 여태까지 테무진의 지원을 받아왔고, 자무카를 믿지 않았으며 그 자신은 이미 늙어 여생을 평화롭게 마감하고 싶었다. 토오릴이 듣지 않자 셍굼이 직접 말하기를 "지금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 있을 때에도 그는 우리들을 우습게 안다. 만약에 아버지가 죽기라도 한다면 할아버지 쿨자쿠스-부이룩-칸이 힘들여 이만큼 모아놓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다그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친아들과의 관계를 깰 수 없는 토오릴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우리는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나의 아들인 테무진을 어찌 죽이자고만 말하는가. 하여튼 너희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고 허락하였다. 셍굼의 개전 의지와 압력에 토오릴은 모든 전권을 넘겨준 것이다. 테무진과 케레이트간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카라-칼지드 전투

셍굼은 먼저 측근들과 협의끝에 "그들은 일찍이 우리들의 차우르-베키를 요구했다. 지금 허혼식장 보올자르의 음식을 먹으러 오라고, 거짓으로 혼약일자를 정하여 그를 불러 사로잡자"고 한 후 테무진에게 혼인제의를 받아들이겠노라고 하면서 그를 연회에 초대하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테무진은 서둘러 10명의 너케르만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몽릭의 집에 도착하여 첫 밤을 지내는데, 몽릭은 "일찍이 차우르-베키를 요구했을 때 그들은 우리를 깔보고 응하지 않다가 이제야 보올자르의 음식을 먹으러 오라고 하는가?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사람들이 왜 지금 차우르-베키를 주겠다고 초대하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테무진이여, 봄이 되어 우리들의 말떼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말떼를 돌보아야 한다는 말로 직접 가는 대신 사자를 파견하라"고 하였다. 테무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즉시 알아채고 사신만을 보낸 채 되돌아 가버렸다.

테무진이 직접 오지않고 사신만 온것을 본 셍굼은 "우리들의 음모가 발각되었다. 내일 일찍 테무진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 테무진을 포위한 다음 그를 사로잡자" 라고 하면서 기습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이것을 옅든 말치기인 바다이와 키실릭에게 새어나가 기습 일보직전에 테무진에게 알려졌다. 상황은 매우 급하였다. 케레이트군은 이 야습에 테무진군의 5배에 해당하는 3만명을 동원하였다. 셍굼에 대한 방비를 준비하기도 전에 급보에 접한 테무진은 급히 막료들을 불러 말떼를 풀게 하고 전투준비를 시켰다. 테무진 진영의 가족들은 마차와 낙타등에 그들의 긴급한 가구만 서둘러 챙겨 말을 타고 동쪽의 산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거추장스러운 막사와 무거운 수레들은 버렸다. 테무진은 케레이트군을 속이기 위하여 둔영지 주위에 핀 불을 지키는 엄선한 기마병을 남기고 그들에게 적이 접근한 마지막 순간에야 철수하도록 한 후, 나머지 정예 병사들과 함께 가족들을 뒤에서 엄호하면서 천천히 물러섰다.

흥안령의 돌출부, 칼카 강의 원류 부근인 카라-칼지드-엘레드까지 후퇴한 후, 그는 가족들을 강을 건너게 한 후 계속하여 가족들은 적은 수의 전투병과 함께 계속 행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테무진의 정예병 약 5,000명은 부근의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장비를 점검하는 등 서둘러 전투준비를 하였다. 테무진은 적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젤메를 마고-운두르산의 북쪽에 배치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그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는 먼지를 발견하고 곧장 테무진에게 이를 전하였다. 테무진은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토오릴의 대군을 기다렸다.

테무진군이 그들의 둔영지를 버린 지 채 한시간이 안되어 케레이트의 선발대가 접근하였다. 그들은 둔영지의 야영불빛을 보고 테무진군이 그들의 둔영지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여 주력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시간에 테무진군은 그들의 가족들을 더 멀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케레이트 본군이 온 후 테무진군이 둔영지를 버린 것을 알자 그들은 지체없이 이들의 추격에 나섰다. 몽골인들의 이동로를 뒤따라 케레이트군은 해질 녁에 강가에 도달하였다. 케레이트군은 테무진군을 빠르게 추격하느라 발빠른 말들은 앞서고 느린 말들은 뒤쳐지는 등 대열은 상당히 흩어진 상태였다. 테무진군은 강을 건너는 케레이트군을 밀집대형으로 차단하였다.

처음의 교전에서 테무진군은 케레이트군의 선봉을 흐트러 놓았으나 곧이어 케레이트의 토오릴이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토오릴의 대군이 카라-칼지트에 도착하자 주르치데이-노얀과 쿠일다르-세첸은 자신들의 우루우트, 망구트씨족을 이끌고 테무진의 전면에 섰다. 여기에 케레이트군은 지르긴, 투멘-투베겐, 올롱-동카이트씨족, 그리고 토오릴의 1천호위, 토오릴의 중군 순으로 접근하였다. 테무진이 진을 펼치자마자 토오릴 측에서는 지르긴씨족을 선봉으로 공격해왔다. 케레이트군은 재정비하여 칭기스칸군을 없애려고 공격을 하였다. 지르긴씨족들이 공격해오자 우르우트와 망구트씨족도 그들에 맞서 돌격해 이들을 제압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번에는 투멘-투베겐씨족의 아칙-시론이 공격해왔다. 아칙-시론이 쿠일다르-세첸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자 망구트 군들은 쿠일다르가 쓰러진 곳을 감싸고돌았다. 이때 주르치데이-노얀이 아칙-시론을 공격하여 투멘-투베겐병들을 제압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올롱-동카이트씨족이 공격해 왔다.

주르치데이-노얀이 이들도 제압하자 코리-실레문-타이지가 1천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주르치데이-노얀은 다시 이들도 물리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셍굼이 공격해왔다. 이때 주르치데이가 쏜 화살이 붉은색의 크림이 칠해져있는 셍굼의 뺨에 박혀 셍굼이 말아래로 떨어지자 케레이트군은 모두 셍굼의 주위를 감싸고 섬으로서 진격이 주춤하였다. 그러나 접전은 실로 격렬하였으며 결국 케레이트군에 비해 중과부적인 테무진은 철저한 패배를 피하여 도망해야만 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의 공격에 몽골군은 점점 힘이 부쳐 밀리게 되자 테무진은 옆에 있는 기수 쿠일다르에게 케레이트군을 돌아 뒤편에 있는 언덕에 테무진의 군기인 툭(야크나 말의 꼬리와 갈기 털로 만든 군기)을 세우도록 하였다. 측면과 후면 공격은 당시 몽골군이 잘쓰는 작전으로 적 후방에 테무진의 군기가 나타나면 케레이트군이 군사를 나누어 그 언덕을 공격할 것이므로 이렇게 케레이트군의 공격력을 분산시켜야 만 가족과 물건들의 통과로를 막고있는 테무진군을 구할 수 있었다. 쿠일다르는 케레이트군이 테무진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형세를 장악하는 것을 보자 "내가 안다의 앞에서 싸우겠다. 안다여!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죽는다면 나의 자식들을 부탁한다"고 말한 후 전선을 돌파하여 적 후방의 야산에 이르러 군기를 세웠다. 산 정상의 군기는 케레이트군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케레이트의 지휘관들은 테무진군이 측면공격을 위한 추가군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토오릴은 재빨리 장수들을 모아 상의하였다. 칭기스칸은 증원군을 얻었는가? 케레이트는 그 산을 공격해야하는가 아니면 퇴각할 것인가? 해는 지기 시작하였으며 케레이트군은 매복작전에 말려들까 야습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조금 물러서서 다음날까지 공격을 미루기로 하였다. 테무진군의 퇴로는 열렸다. 케레이트군의 공세가 멈추고 해가 지자, 테무진군은 어둠을 틈타 급히 후퇴하였다. 그날 저녁 테무진군은 가족들이 후퇴한 길을 따라 철수하였으며 케레이트군은 다음날 그들을 계속 추격하였다. 테무진군의 우수성은 케레이트 군과 비슷하였고 테무진군은 가족들의 후퇴로를 지켜야 했으므로 기동작전을 구사할 수 없어 케레이트군의 수적 우세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케레이트의 선발대가 나타나자 테무진은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많은 지원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테무진은 이중에서 약 50명을 선발하여 그들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너희들은 케레이트 선발대사이로 스며들어 20,000명이 넘는 케레이트 본군을 공격한다. 너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군을 치고 또 치라." 이들은 재빨리 동료들의 곁을 떠나 케레이트 주력군을 향해 달렸다. 이들 소부대는 언덕과 구릉 등을 이용하여 케레이트 선발대 사이를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 케레이트의 주력군이 있는 평지에 도달하자 공격대형을 갖춘 후 말을 몰아 돌격하였다.

케레이트군은 이들이 테무진 본군의 선발대로 생각하여 전군의 반 약 10,000명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이 결사대들은 북풍과같이 케레이트의 전투부대에 스며들어 그들 앞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도 자르고 죽였다. 결사대는 전부 쓰러졌지만 그들은 거의 1,000명의 케레이트군을 쓰러뜨렸다. 케레이트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전투정신을 가진 결사대를 본 적이 없었다. 테무진군은 이러한 공격을 할 수 있는 병사들이 아직도 3,000여명이나 있었다. 케레이트군은 위신과 체면이 있어 추격을 계속하였지만 이러한 형태의 공격을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진격속도를 늦추어 몽골군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이후 토오릴 진영에서는 테무진군을 계속 추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다 아칙-시론의 말대로 추격을 멈추었다. 토오릴은 부관을 불러 "몽골족의 대부분은 자무카, 알탄, 쿠차르와 함께 우리들과 같이 있다. 테무진의 몽골족은 타고있는 말밖에 없다. 그들이 이리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서 마른 말똥을 보자기에 싸듯이 잡아오도록 하자"고 말했다.

테무진군은 전쟁터에서 도망하는 길에 많이 이탈하였고, 부족민의 손실 역시 막대하였다. 이 싸움의 영웅이었던 쿠일다르가 상처가 도져 세상을 떠나자 테무진은 어르-노오사봉에 그의 뼈를 묻었다. 테무진의 셋째아들 오고데이, 그리고 두 명의 가장 충성스러운 장수 보오르추와 보로쿨은 행방불명이었다. 위급한 상황에도 테무진은 그들을 기다렸고, 사람들은 말 옆에서 고삐를 손에 잡은 채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한 사람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보오르추였다. 그는 전투 중에 말이 쓰러지자 걸어서 도망치다가 짐 싣는 말을 집어타고 몽골인 들의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테무진은 깊이 감동하여 가슴을 치며 "하늘이여, 이를 기억하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왔다. 보로쿨이었는데 그는 경동맥에 상처를 입은 오고데이를 말에 태우고 왔다. 보로쿨은 입으로 피를 빨아 오고데이의 상처를 치유하였으므로 그의 입가에는 피가 가득하였다. 이를 본 테무진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서둘러 불을 지피게 하여 상처를 불로 지진 뒤, 적이 오면 싸우자하였다.

카라-칼지드-엘레드 싸움후 위기에 몰려 있던 테무진군은 토오릴의 추격이 없자, 달란-네무르게스 지방으로 가서 남아있는 군사의 수를 점검한 후 다시 칼카강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칼카강의 어귀에는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배출한 콩기라트 본족이 있었으므로 테무진은 먼저 그들에게 친척관계를 들먹이며 도움을 청하면서 주르치데이-노얀이 이끄는 우르우트 씨족을 파견하여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테무진의 통첩

콩기라트 본족을 수습한 테무진은 계속 북상하여 퉁게개천의 동쪽에서 토오릴, 셍굼, 자무카 및 자기를 배반한 키야트씨족의 여러 노얀들을 비난하는 사자을 토오릴 진영에 파견하였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그들의 다정했던 세월과 그가 바쳤던 봉사를 상기시켜 옛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구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는 토오릴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과의 연합만이 그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두개의 바퀴를 갖고 있는 수레의 한쪽 바퀴가 부서지면 소는 그 수레를 끌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테무진은 당신에게 한쪽 바퀴가 아니었던가"라고 따졌다.

사실 테무진은 토오릴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는 토오릴을 도와 빼앗긴 부족민을 찾아주었고, 토오릴이 두번째로 도망쳤을 때에는 테무진이 그에게 부족민들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메르키트족을 습격하여 빼앗은 것들을 그에게 모두 주었으나 토오릴은 메르키트족의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독점하였다. 뿐만 아니라 테무진은 '사걸'을 보내 나이만족 쾩세위-사브락에게 빼앗긴 셍굼의 처자와 부족민을 되찾아주었고, 되르벤, 타타르, 살지우드, 통하이트와 같은 씨족들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테무진은 "나의 아버지, 칸이여. 그대는 나에게 어떤 은덕을 베풀어 주었는가" 라고 다그쳤다. 그는 또 둘 사이에 맺은 맹약을 깬 책임을 물으면서 자무카의 선동과 유혹에 빠져,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려 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토오릴은 측근으로부터 소외된 감이있는 차에 테무진의 이러한 힐난은 그를 흔들었다. "나는 법도에서 멀어졌다. 이제 나의 아들 테무진을 보고 나쁘게 생각한다면, 내피가 이처럼 흐를 것이다" 라고 하면서 토오릴은 화살을 깎는 칼을 들어 자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 조그만 나무통에 담아 테무진에게 보냈다.

테무진은 알탄과 쿠차르에게도 사신을 보내 자기편이 되라고 말하였다. "과거 우리에게는 칸이 없어 나의 큰할아버지 바르탁의 후예인 사차와 타이추를 칸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두 사람이 사양하였기 때문에 나의 큰아버지 네쿤-타이지의 아들인 너 쿠차르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너 역시 사양하였다. 그렇지만 일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어 쿠툴라칸의 아들인 알탄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너 역시 사양하여 너희들이 나를 칸으로 추대한 것이 아닌가. 너희들은 토오릴에 봉사하고 있으나, 토오릴은 변덕이 심하여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는데 하물며 너희들인들 별 수 있겠는가." 그는 알탄과 쿠차르가 그에 대한 분노를 씻어버리고 몽골부를 위하여 그에게 봉사할 것을 호소하였다.

셍굼에게도 테무진은 그를 벌거숭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아버지 토오릴은 우리 두 사람을 똑같이 키웠다. 철이 들면서 의형제 셍굼 너는 나를 시기하여 쫓아내 버렸다. 나는 아버지 토오릴이 살아있을 때 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셍굼은 "이 말의 의미는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빌게-베키와 토도얀은 전투의 깃발을 올려라. 말을 살찌우라. 더 이상 의심할 것 없다" 라고 하였다. 셍굼 역시 다가올 전투가 결정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승리한다면 우리부족은 그에게 들어갈 것이고, 우리가 승자가 된다면 그의 부족은 우리에게 들어올 것" 이라고 단언하였다.


불발 쿠데타

토오릴과 테무진의 관계가 깨지고 테무진이 패퇴하자 변덕스러운 유목민들의 반 테무진 동맹은 스스로 해체되었다. 테무진의 숙부인 다리타이-옷치긴, 테무진의 숙조 쿠툴라-칸의 아들인 알탄-제운, 테무진의 숙부 네쿤-타이시의 아들인 쿠차르-베키, 자지라트부의 자무카, 바아린 씨족노예였던 수케게이의 토오릴, 망구트인 타카이-쿨라카이, 타타르부의 에미르인 쿠투-테무르는 함께 모여 패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우리들은 토오릴과 같이 있을 수도 없고 테무진과도 같이 있을 수가 없다. 토오릴이나 테무진 어느 쪽과 손을 잡지 않아도 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도록 먼저 토오릴을 급습하여 그를 죽인 뒤 우리들이 칸이 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토오릴에게 새나갔다. 토오릴은 바로 그들을 공격하여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았기 때문에 다리타이-옷치긴이나 바아린 씨족 및 케레이트부의 한 갈래인 사카이트 무리, 운진 무리는 테무진에게 도망쳤으며 자무카-세첸, 알탄-제운, 쿠차르-베키등 반 테무진계 몽골부의 대다수는 동 나이만부의 타양-칸에게 도망갔다.

이 불발 쿠데타는 카라-칼지드 싸움으로 테무진이 무너져 테무진과 자무카의 공존정책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자 자무카나 키야트씨족 노얀들은 이번에는 자기들이 제거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여 먼저 토오릴을 제거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들려 한 것이었다. 이 사태로 토오릴은 테무진 잔당을 계속 추격할 수 없었다.


발주나 서약

퉁게 개천에서 토오릴측을 비난하며 일시 휴식을 취한 테무진은 칼카 강을따라 부유르 호와 달라이 호 북쪽 몽골초원의 가장 끝이며 중국의 변경에 가까운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바이칼 호 동쪽의 변경지역인 발주나라는 늪지대로 피신하여 그곳에 진영을 갖추었다. 이때까지의 과정은 테무진의 일생 중 가장 큰 시련에 봉착한 시기였다. 그러나 테무진이 이 위기의 순간을 맞고도 그것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시 테무진이 처음부터 힘들여 구축해왔던 강력한 너케르 집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은 발주나호로 들어간 후 먼저 이 지방에 유목하고 있는 친자무카계 코롤라스씨족 집단을 항복시켰다. 테무진은 이곳에서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1203년 여름을 발주나에서 보냈다. 이때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숫자는 불과 2,600명이었다. 코롤라스씨족의 투항 후 테무진은 에르군네 강 일대로 장사하러 올라온 코라즘 상인 하산을 만났다. 하산은 당시 궁지에 몰려있던 테무진 군에게 식량제공은 물론, 카라-칼지트전 후 벌어지고 있는 케레이트부의 사정이나 각지의 정세까지도 상세히 테무진에게 설명해 주었으며, 후에 테무진의 코라즘 원정에도 참가하였다. 무슬림 상인인 하산이 테무진과 손을 잡은 것은 그가 승리할 경우 유목민과의 거래나 중국과의 교역에서 그의 비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이 비난사절을 파견한 것은 토오릴측을 비난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는 휘하세력들에게 자기가 어디에 건재해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뜻이 강하였다. 실제로 쿠이두등 케레이트 내의 친 테무진계 세력이 곧 테무진 진영으로 들어왔다. "토오릴에게서 떨어져 나와 테무진과 연합하게 된 사람은 수많은 선물과 최고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하여 어떠한 혜택이 그들에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에 끌려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들었고, 그의 주위에는 수레들이 둘러쳐졌다. 이렇게 해서 테무진의 세력과 영향력은 점점 강해졌고, 그의 명망과 집단의 규모는 커졌다. 케레이트의 투항자들 가운데에는 테무진의 가까운 자문으로, 오고데이의 치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칭가이도 있었다.

여기서 테무진은 이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특수부대 창설을 생각하였다. 그는 지체없이 특수부대를 모집하였다. 이 말은 비밀히 이 겔에서 저 겔로 이 진영에서 저 진영으로 퍼져나가 전투의 승패를 떠나 죽음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특수군이 편성되었다. 이제 테무진은 역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겨울이 되자 양 진영은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테무진은 토오릴을 공격하기 위하여 발주나 호에서 이동하여 케룰렌 강변의 아르칼-게우기에 이르렀다." 다가올 전투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번 싸움은 케레이트군의 수적 우위와 테무진군의 정신적 우위의 싸움으로 테무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이 전투에 걸었다.

이처럼 중요한 고비에 처해 있는 그와 행동을 함께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그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 테무진은 손을 벌려 하늘을 향해 맹세하기를 "제가 대업을 이루게 하시어 모든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하게 하소서. 만약 제가 이 말을 어기면 이 강물과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면서 휘하 장군들과 함께 발주나의 흙탕물을 마셨다. 이 맹약에는 단지 19명만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그뒤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그들의 열전에는 빠짐없이 '발주나 사람들' 혹은 강물을 마신 사람들로 기록되어졌다. 이중에는 키타이(거란)족, 탕구트족, 무슬림들도 참가하였다. 이 민족이 연합을 해올 경우 서약을 하는 것은 일종의 관례로서 이들은 케레이트를 무너뜨리려 발주나에 모여 연맹식을 가졌던 것이다.


기습공격

발주나 호에 머무르고 있던 테무진은 주변정세가 점차 자기에게 유리하게 호전되고, 군세도 재정비되자 토오릴에 대한 기습에 나섰다. 당시 동생 조치-카사르는 형 테무진과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케레이트 군이 그의 처자식을 습격하자 부인과 세 명의 자식을 그대로 둔 채 불과 몇명의 너케르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테무진이 있는 발주나로 찾아왔다. 테무진은 토오릴에 대한 기습에 앞서, 카사르가 온 것을 이용하여 토오릴 진영에 대한 탐지와 적의 무방비를 이끌어내려고 카사르의 너케르인 칼리우다르와 차우르칸을 이용하여 "형을 찾아 헤맸지만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의 족적을 추적했지만, 결국은 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형은 듣지 못했다. 나는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초목의 뿌리를 베개삼아 누워 잤다. 나의 처자가 칸 아버지의 곳에 있다. 만약 칸 아버지의 믿을만한 사신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칸 아버지의 곁으로 가고싶다" 라는 거짓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테무진은 이들 사자와 케룰렌 강변에 있는 아르칼-게우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다음 발주나호를 출발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진군하였다.

오논강쪽으로 북상한 테무진군은 이곳에서 군사들을 보충한 뒤 아르칼-게우기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이 아르칼-게우기에 도달한 직후 토오릴 진영에 파견되었던 사자들도 토오릴군의 정보를 가지고 토오릴의 사신인 이투르겐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들은 "토오릴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금 장막을 세워 연회를 베풀고 있다. 재빨리 이동하여, 밤에도 이동하여, 불시에 그들을 기습 포위하시오."라고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테무진은 "밤에도 쉬지않고 이동한 끝에 토오릴군이 제제에르-운두르산의 제르협곡 입구에 있을 때 포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먼저 테무진의 결사대가 케레이트 진지를 돌파하였으며 나머지 몽골군은 이들을 뒤따랐다. 케레이트 군은 당황하였지만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케레이트군을 포위한 테무진군은 "3일 밤낮동안 포위공격을 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열세에 몰린 그들은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은 이 전투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토오릴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쳐 나이만에게 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나이만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셍굼 역시 티베트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다시 호탄과 카쉬가르 지방으로 갔으나 쿠차에서 위구르인에게 잡혀죽었다.


케레이트부의 해체

테무진은 타타르나 타이치우드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케레이트를 몰살시키지 않았다. 테무진은 그들에게 저항을 멈추고 자기 군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그는 격렬한 저항을 한 장군 카닥-바아토르의 용맹함과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찬양하면서 용서하고 100명의 주르킨 무리와 함께 죽은 쿠일다르-세첸의 가족에게 힘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토오릴의 숙부 자카-감부도 용서하고 케레이트의 왕녀들과는 혼인을 맺어, 자카-감부의 큰딸 이바카-베키는 테무진이 처로 취하고 둘째딸 소르콕타니-베키는 막내아들인 톨루이에게 주었다. 톨루이는 이외에도 토오릴의 손녀인 도쿠즈-카툰을 맞아들였고, 큰아들 주치는 토오릴의 딸 차우르-베키와 결혼하였다. 이외에 케레이트 백성들을 여러 몽골씨족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분산 배치하여 흡수하였다.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은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누구보다도 토오릴의 습격을 미리 알려 생명을 구해준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릭이 많은 보상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말치기에게 테무진은 병사와 노예 그리고 많은 가축과 물건을 준 뒤, 그들의 아홉세대까지 잘못을 추궁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제까지 토오릴은 테무진을 신임하여 그를 지지해 주었고 세력을 잡도록 도와주었으나 의심이 많았다. 토오릴은 테무진의 강한 개성을 너무 늦게 파악하여 경솔하게 지원했다가 동맹을 파기하고 테무진을 공격함으로써 테무진에게 똑같은 구실을 준 셈이었다. 몽골부가 보잘것없는 집단으로 출발한 것도 테무진의 성장에는 적당하였다. 테무진은 지도자로서 족한 혈통이지만 그것을 자랑할 정도의 명문은 아니었다. 나이도 들고 고생도 하고 경험도 풍부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동료 너케르에게는 아주 자상하였다. 더욱이 토오릴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았으며 계속 측근들에게 시달려 유목민의 분쟁조정력이 풍부한 테무진에게 정치적으로 패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 테무진은 자신의 후원인이자 주인이었던 토오릴의 자리를 기습으로 가로챔으로서 오랫동안 꿈꾸어온 그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열어 군사조직과 생활관습에 관한 새로운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는 절도나 간음과 같이 문란한 풍습은 모두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는 떨어져나간 부족, 씨족들에게 자신을 따를 경우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을 것임을 알렸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인 큰 부족으로는 오이라트와 콩기라트가 있었다. 이들은 테무진의 군대에 편입되어 후대를 받았으나 그에게 저항한 세력들은 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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